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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역내정책 이해하기 : 아랍대의ㆍ종교ㆍ종파ㆍ정치이념 초월 (홍미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14
조회
592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2015년 4월 15일, 미국 정보 분석가 로버트 패리가 내 놓은 정보에 따르면, 사우디인들은 이스라엘에게 적어도 지난 2년 6개월 동안 160억 달러를 제공했다. 이 자금은 제 3의 아랍 국가를 통해서 이스라엘 개발기금구좌로 들어갔으며,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는 등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을 박탈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이스라엘-사우디 협력정책 명분은 공동의 적인 이란 핵프로그램에 대한 반대정책이다. 오늘날 사우디 역내정책은 왕가의 국내외 패권을 유지ㆍ강화시키기 위하여 아랍대의ㆍ종교ㆍ종파ㆍ정치이념을 초월하여 동맹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우디역내정책의 기본구조가 석유생산 초기인 1950-1960년에 형성되었다고 판단한다. 다음의 1950-1960년대 이집트/사우디 패권경쟁 분석은 오늘날 사우디 역내정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역내 공화국 창설 도미노: 나세르와 사우디의 패권경쟁

1952년 이집트 가말 압둘 나세르는 ‘자유 장교단’ 쿠데타를 주도하여 왕정을 붕괴시킨 뒤 ‘이집트공화국’을 창설하고, 영향력을 역내로 급속히 확장하면서, 1958년 2월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연합 공화국’을 창설하였다.

사우디의 사우드왕(재위:1953-1964)은 시리아 정보부장 압델 하미드 알 사라지에게 190만 파운드의 뇌물을 제공하면서, ‘아랍연합 공화국’의 창설 축하를 위해 시리아를 방문 중인 나세르 암살을 시도하였다. 이 사건이 실패하면서, 아랍세계에서 나세르의 명성은 더욱 고양되었다. 그런데 3년 후, 1961년 9월 사우드왕이 후원한 시리아 군부쿠데타가 성공하게 되자, 시리아는 ‘아랍연합 공화국’에서 탈퇴하였다.

다른 한편 나세르 역내 영향력 강화에 맞서서, 역내경쟁자였던 사우디왕가/하심왕가(이라크와 요르단 통치)가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우드왕은 1957년 처음으로 바그다드로 이라크 왕 파이잘 2세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다음해 1958년 7월 이라크 하심왕가가 군부쿠데타로 전복되고, ‘이라크공화국’이 창건됨으로써, 사우디왕가와 하심 왕가 사이의 관계 개선시도가 중단되었다. 4년 후인 1962년 이집트가 예멘해방운동을 후원하자, 사우드왕과 요르단 후세인왕은 같은 해 8월 30일 알 타이프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집트에 대항하는 사우디-하심가 협력체제를 창출하였다.

소련이 후원하는 나세르 통치하의 이집트는 비동맹운동과 범 아랍주의를 대표하게 되었고, 세속주의와 공화주의를 대변하였다. 대조적으로 사우디는 절대왕정과 이슬람 신정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영국, 미국 정부와 전반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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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인도의 네루 총리,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과 회담 중인 나세르.
집권 당시 나세르는 제3세계 지도자들과 돈독한 유대 관계를 과시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 사우디왕가 내 입헌군주제 개혁요구

역내 분위기에 편승하여 사우디왕가 내부에서도 나세르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958년 나세르의 범 아랍주의에 영향을 받아 사우디아라비아 창건자인 이븐사우드의 20번째 아들인 탈랄왕자(사우디 대부호 왈리드 왕자의 아버지)는 ‘자유 왕자단’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노예제폐지, 교육제도개혁, 노동법 도입을 포함한 광범위한 정치개혁을 제안했다. 탈랄왕자는 1960년 8-9월 입헌군주제 개혁초안을 사우드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사우드왕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탈랄왕자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62년 10월 23일 탈랄왕자는 나세르를 지지하면서 ‘아랍해방전선’을 조직하고 민주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유 왕자단’/울라마들과 합세한 ‘보수적인 왕자’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발생하였다. 이 때 그랜드 무프티 무함마드 알 셰이크가 ‘자유 왕자단’의 개혁요구를 반대하는 파트와를 내놓았다. 결국 1964년 2월 탈랄왕자는 사우디 국내외정책에 대한 비난을 철회하고, ‘자유 왕자단’을 해체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우디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나세르의 역내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입증한다.
◇ 예멘 내전과 사우디 위기: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 사우디 구원

나세르는 1962년 1월부터 예멘 해방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 9월 나세르가 지원한 ‘반-왕당파 장교단’ 쿠데타가 성공함으로써 ‘예멘 아랍공화국’이 창설되었다. 이후 나세르가 후원하는 공화파정부군과 사우디-요르단이 후원하는 왕당파 반정부군 사이에 예멘내전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나세르는 아덴 및 남부예멘에서 영국을 축출하고, 사우디왕국 혁명을 통해 우호적인 정권을 창출함으로써, 석유 자원의 보고인 걸프지역에서 서방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이집트의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나세르가 예멘 파견 이집트군대는 점차 증가하여 1967년경에는 7만 명 정도가 예멘에서 작전 중이었다. 이제 예멘내전 판도를 결정할 정도의 군대를 보유한 이집트는 북예멘을 넘어서 사우디에 일격을 가할 태세였다. 이 때 사우디왕가는 1818년 제 1사우디왕국이 이집트 이브라힘파샤 군대에게 공격을 받아 완전히 붕괴되었고, 마지막 왕 압둘라 빈 사우드가 처형당한 악몽을 상기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갑자기 이집트를 공격하고, 이집트가 대패하면서, 사우디는 이집트점령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몽에서 극적으로 벗어났다. 결국 이스라엘의 이집트공격 7일 후 6월 12일, 이집트는 예멘으로부터 군대를 대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8월 31일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과 사우디 파이잘 왕은 카르툼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담에서 예멘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역내에 왕국을 대체하는 공화국창설이라는 돌풍을 몰고 왔던 나세르의 역내 영향력은 극적으로 소진된 듯이 보였다.

실제로 1967년 이스라엘의 이집트공격은 역내 정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 사건 이후 아랍대의를 내걸고 역내 정치변동을 이끌던 나세르가 몰락하고, 대신에 막대한 석유자원을 보유한 보수적인 사우디왕가가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