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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어린 공감이 사라져 버린 사회 (정재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13
조회
217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탈감정사회>의 저자 스테판 메스트로비치는 다양한 개인의 감정이 브라운관을 거치며 진정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현대 사회 구조를 지적한다. 개인들이 사적인 상실에 대해 반응하자마자 곧바로 슬픔과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자주 생방송으로, 그리고 현장에서 전 세계로 방송되지만 진심으로 우러나와 털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진정성은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이렇게 잃어버리는 것들 중의 일부가 바로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사회 곳곳에 많은 동정심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빗나간 동정심은 문화산업이 대량으로 생산한, 알맹이가 없는 대체된 동정심이라고 지적하고, 동정심은 이제 구매한 물건에 싫증이 나는 현상과 유사한 ‘동정심 피로’로 귀착되는 소비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저작은 세월호 사건에 대해 ‘지겹다’거나 ‘짜증난다’는 여론이 상당한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느끼고 있다시피, 진심 어린 공감이 사라져 버린 우리 사회에서 일시적 동정심으로 치솟았던 슬픔과 분노의 감정은 그리 오래지 않아 깊은 무기력과 피로감, 그리고 의도적 무관심으로 전환되었다. 메스트로비치의 주장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이후의 이러한 한국 사회의 감정의 기복은 공동체적 연대가 무너진 데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피로감과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기복 중에 혐오와 모멸의 감정이 덧붙여져 증폭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열등한 집단을 범주화하고 멸시하는 한국 사회의 통념이나 문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서울 강남이 아닌 경기도의 안산, 이렇다 할 고학력, 고위층 가족도 아닌 별로 잘나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이 ‘감히’ 정부에 맞서서 자신들의 주장을 조직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은 이 사회의 상당수 집단들에게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현대 사회의 객관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정치’에 의해 악의적으로 조종, 통제되거나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 ‘정치’는 한 국가 사회 내 지배 엘리트들의 이해와 이익을 위해 작동된다. 비록 희생자 숫자가 많고, 그 대부분이 학생들이며, 방송기술의 발달로 미숙한 구조작업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보도되어 초기에는 분노와 슬픔의 파고에 어쩔 수 없었지만, 우리네 위정자들은 반전의 변곡점에 다다를 때를 기다려 왔다.

그러나 곧바로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이를 이용하여 친정부 인사들의 포섭과 보상금 등으로 타협파를 다수로 만들어 사태를 일단락 지으려는 위정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세월호 유가족들은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조직적이었고, 합리적이었으며,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당황한 위정자들은 국민들의 감정을 피로하게 만들기 위해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각도와 수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년이 지난 현재 아무 것도 밝혀지지 못 하거나 의도적으로 은폐된 상황에서 괴이하게도 유가족들이 ‘죄인’이 되어 버렸다.

메스트로비치의 주장의 전제와는 달리, 우리 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붕괴된 지 오래다. 따라서 연대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인간들 간의 경쟁은 극대화되어 있으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복지 수준이 최악인 상황에서 피로감의 내용이나 진전 속도, 깊이도 서구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부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는 데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다른 집단에 대해 단순한 차별을 넘어 혐오와 모멸을 가하는 행위도 서구에서의 그것과 질적인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앞에서도 강조했다시피 그러한 차별과 모멸과 혐오를 ‘국가’ 혹은 ‘국가’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받는 ‘지배 엘리트들’이 조장하거나 조종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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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세월호특별법 정부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안타깝게도 이러한 위정자들의 기도에 맞서 싸워야 할 노동대중, 시민들, 그리고 지식인들 역시 잘못된 통념과 편견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피착취자나 피해자로서의 권리에는 민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행하고 있는 착취자, 가해자로서의 모습에는 매우 둔감하거나 아예 궤변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데 능하다. 극단적인 경쟁이 미화되고 복지 수준이 낮은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태되어진 자기방어본능이라고 하기에는 그 도가 지나치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여론 변화 역시 감정의 기복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더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일반 시민은 물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관점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이들조차 일베로 상징되는 사회부적응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인종주의와 타민족혐오주의에 휩싸여 이주민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와 모멸의 감정을 쏟아내는 여론을 만들어낸다. 재미교포, 재일교포 등 부유한 국가에 거주하는 해외 교민들이 당하는 차별과 인종주의적 공격에는 비난에 열을 올리면서도, 열등하다고 마음대로 규정한 중국교포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정을 쏟아낸다. 살인을 저지른 이민자는 ‘개인 범죄자’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국적이나 민족의 이름으로 전체가 범법 민족이 되고 만다.

타 민족에 대한 의식 수준은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민족, 국민들 내에서도 집단에 따른 뿌리 깊은 구별 짓기와 차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데, 전통적인 전라도 혐오와 차별 외에도 여성에 대한 혐오와 조롱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소위 여성 일반에 대한 비하나 ‘잘 난 여성’에 대한 모멸과 혐오도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신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성산업이라는 사회의 가장 착취적 공간에서 나락에 빠져 신음하는 여성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다.

성매매는 거의 대부분 남성이 일방적으로 여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성을 선택하는 형태로 ‘성적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인간의 매매이고, 무엇보다도 1대 1의 자유로운 거래가 아닌 중간 알선 범죄 조직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범죄행위이라는 것을 억지로 무시한다. 여성의 상당수가 가정의 문제 등으로 10대에 성매매를 시작하며, 수많은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걸릴 수밖에 없으며, 여러 이유로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가 힘들어 평생을 주변화된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줄 알면서 성적 자유와 성매매가 같은 것인 양 호도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녀들의 생존권을 갑자기 걱정해 준다. 합법화된 국가에서 얼마나 비합법 영역에서의 성적 착취가 만연하고 있는지, 일상에서의 성차별과 성폭력이 증가하고 있는지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을 집행하고 사회정의에 앞장 서야 마땅한 정치관료, 검경, 언론 등이 오히려 성접대 문화의 수혜자인 상황에서 이를 눈감고 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양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부인하거나 정당화하는 작태가 또 재현되는 것을 보았다. 소수 엘리트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국가가 상황을 왜곡하고 진실 추구를 방해한다면,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직접행동이네 뭐네 하더라도 소수의 시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만의 선도적인 운동만으로는 한계가 너무 크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적, 비판적이지만 미시적, 사적 영역에서는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 억압자, 착취자, 그리고 가해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