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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제대로 놀 수 있어야 한다(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4-05 17:43
조회
497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일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놀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사치고 일과 싸움과 놀이의 성격을 동시에 갖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 비중이 어떻게 다른가에 따라 중심이 되는 성격과 주변이 되는 성격이 다를 뿐이다. 회사에서의 일도 싸움과 놀이의 성격을 아예 결여할 수 없다. 퇴근한 뒤 이루어지는 회사의 회식은 기본적으로는 놀이지만, 암암리에 일과 싸움의 성격을 수반한다. 정치적인 투쟁의 일환인 대대적인 시위는 한편으로 축제와 같은 놀이의 성격을 지니기 일쑤다.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놀이의 성격은 한껏 줄어들고 싸움의 성격이 전격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일 즉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기초다. 싸움 즉 투쟁은 궁극적으로 노동을 통해 생겨난 가치 생산물을 과연 정당하게 배분하는가를 둘러싸고서 일어난다. 놀이 즉 유희는 노동과 투쟁이 결합하여 일군 최종적인 가치 생산물을 다수건 소수건 함께 소비하면서 살아있음을 즐기고 향유 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드높이는 최종의 행위다.


 이를 사회적 삶의 영역에 비추어 보면, 노동은 경제 영역에, 투쟁은 정치 영역에, 유희는 문화 영역에 각각 할당된다. 인간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드높일 수 있는 계기는 문화 영역에서의 유희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은 대상적인 가치를 지닌 재화를 생산해 문화 영역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투쟁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 대상적인 가치를 가능하면 최대 다수가 공정하고 평등하게 고루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그만큼 유희할 수 있는 사회 전체의 가치 생산물의 양이 늘어나고, 정치가 발전하면 그만큼 모두가 함께 유희함으로써 각자가 더 넓고 깊은 환경에서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향유 하는 문화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통한 유희의 폭과 깊이가 인간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고, 그래서 유희 즉 놀이는 인간 됨의 출발이자 완성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노동을 통해 경제 활동과 투쟁을 통한 정치 활동은 유희를 통한 문화 활동을 위한 수단이고, 문화 활동은 경제 활동과 정치 활동의 목적이다.


 한 사회의 경제력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정치의 수준이 낮으면 양극화의 폭이 커지면서 소수의 유희를 위해 다수가 노동에 집중하는 일이 강화된다. 정치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는 모두가 열심히 일해 사회적 가치의 총생산량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사회적 가치의 총생산량을 최대 다수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그저 사람들이 협력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각자의 존재 가치가 공동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활동에 얼마나 더 넓게 더 깊게 참여하는가에 따라 각자의 존재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 존재에 관련한 이 원칙에서 공동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문화 활동이다. 문화의 향유야말로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를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제반 영역에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른 정치가 요구되고,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자의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이른바 비(非)지배의 자유에 바탕을 둔 공화주의의 원칙에 따른 정치가 요구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이 다름 아니라 국민의 최대 다수가 참여할수록 더욱 역동적으로 활성화되고, 그럼으로써 모두가 모두를 통해 인간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실현하는 것을 나라의 기초로 삼는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이 헌법 조항은 그 실내용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은 문화의 민주공화국이다.”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특히 통치자인 대통령과 국민을 대신해 입법행위를 하는 국회의원 그리고 검찰 일을 하는 검사들과 재판 일을 하는 법원의 판사들 등, 정치 엘리트들이 최대 다수의 동등한 참여를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는 민주 공화의 문화적 가치를 저해하거나 방해하는 쪽으로 행위 하는 것은 곧 헌법, 그것도 최상의 준엄한 헌법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다.


2.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날 숨죽이고서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충분히 이기겠구나 하는 희망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아뿔싸 자정이 넘어서부터 충분하다고 여겼던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새벽 두 시쯤이었지 싶다. 이윽고 돌을 삼킨 듯 가슴 어딘가에서 내뱉을 수 없는 먹먹함이 더해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암울함에 이어 절망이었다. 결국은 0.73% 차이의 패배였다. 눈을 뜨고 있었으나 시야가 어둠에 휩싸였다.


 후보 윤석열 씨가 이른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후보 이재명 씨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텔레비전을 차마 보지 못했다. 그동안 수시로 드나들던 유튜브도 끊었다. 며칠 그냥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베란다 바깥을 하릴없이 내다보곤 했다. 우울이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각오를 억지로라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다시 유튜브를 뒤적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이 마찬가지로 납덩이 같은 심정을 겨우 버티어냈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쏟아냈다. 보기 싫은 그 얼굴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것이 두려워 한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고들 했다. 패배한 자들 간의 격한 공감이었다. 다들 향후 5년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하는 황망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 내면의 진상은 무엇일까? 정확하게 짚을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후퇴할 것이다, 남북의 평화와 자주적인 나라의 도래가 물 건너갔다,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양극화의 해소는커녕 더욱 심화할 것이다, 검찰 권력이 강화되어 이른바 ‘검찰 공화국’이 도래하여 죄 없이도 누구나 불안에 사로잡힐 것이다, 보수 언론의 권력과 부패한 금융 세력과 재벌 세력들이 불공정한 자의를 휘두르는 검찰 권력과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의 위세가 더욱 등등해질 것이다, 심지어 합리성을 내팽개치고 손바닥에 새긴 ‘王’자가 여실히 말해 주듯 무속이니 신내림이니 하는 영기(靈氣)를 맹신한 가운데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일방통행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통치자의 무식과 무능함에 그의 주변에 호가호위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네들만의 이익을 위해 설쳐댈 것이다, 여러 기준의 갈라치기에 의한 갈등과 대립이 판을 칠 것이다, 첨단고도과학기술에 의한 대전환의 위기를 헤쳐나가지 못해 정치가 사회경제의 거대한 물결에 휘청대면서 국가의 명운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등등이지 싶다.


 소위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대선 경쟁을 하던 중에 주당 120시간까지라도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을 아연실색게 했다. 주 5일을 근무한다면 하루 24시간, 아예 잠도 자지 않고 오로지 일하기만 하는 인간으로 산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는 식의 발언이다. 반발이 심해지자, 마치 창조적인 노동을 하는 인간은 자발적으로 그렇게 아예 잠도 자지 않고 일하고자 하니 허용해야 하지 않느냐는 변명으로 바꾸었다. 노동을 최소화하고 제대로 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 인간다운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아예 어떤 실마리조차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참다운 인간의 삶인가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이 “정치는 종합예술입니다. 정치를 통해 내가 아닌 국민이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래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한 김구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서 제시한 문화인으로서의 국민 개개인의 삶을 지향하는 일종의 예술로서의 정치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오로지 기업활동의 자유만을, 잘 먹고 잘사는 강자들의 편에 서서 통치를 할 것이다. 그가 혹시 국민 모두의 삶을 윤택하게 하겠다고 말하더라도 입에 발린 겉치레에 불과하고, 그는 본능적으로 기득권 카르텔을 중심으로 한 강자들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다. 그러니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의 정치로 모두 함께 잘 사는 대동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의 애민(愛民) 통치의 바람을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그 의의의 실마리조차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검찰 권력이 무소불위의 권력임을 믿고 살아온 현재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드디어 그 자신 패거리 권력 투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정치판’에서 가장 유리한 우두머리의 지위를 차지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힘을 정확하게 의식한 탓임에 틀림이 없는 대통령 당선인으로서의 기이한 첫 행보를 보인다. 무슨 이유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청와대에는 단 한 발짝도 들이지 않겠다.”라는 발언을 하고, 전혀 들먹이지 않았던 용산 국방부 건물을 접수해 대통령 집무실로 쓰겠다는 고집을 고수하여 관철하는 행보를 계속한다. 그러니,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이 “국민이 역사의 주체이고 대한민국의 주인입니다. 국민이 결정해준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발언을 왜 했는지, 그 배경과 의의 및 취지를 어떻게 조금이라도 알겠으며, 무엇보다도 동학 혁명의 정신을 들먹이면서 국민을 향해 여러분이 ‘역사의 주체’라고 한 이재명의 말에 담긴 처절한 애국의 심정에 어찌 조금이라도 공감하겠는가.


 현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대선 후보 때 핵을 탑재한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있을 경우를 가정해 “선제타격 말고는 방법이 없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아울러 북한을 일러 주적임을 명시적으로 내세웠다. 남북 간의 평화 공존을 지향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안보 불안을 부추긴다. 그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과 대치 상황을 빌미로 미국이라는 국제적인 예외국가가 어떻게 우리를 강압해 반(半)-종속국으로 만들어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훼손해 왔는가에 대한 의식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러한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다행한가, 하는 내심을 전혀 감추지 않고 강하게 내세운다. 어떻게든 남북의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해 온 문재인 정권을 ‘빨갱이 정권’ 운운하면서 꽉 막힌 반공적 냉전 의식에 사로잡힌 세력에 힘을 싣는다. 그러니 “3.1운동 당시에 만세를 부르던 우리 선조들의 뜻을 이어서 평화로운 나라, 진정 독립되고 자주의 나라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이라고 외치는 상대 후보인 이재명의 말에 실린 미래를 향한 긍정적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의사가 전혀 없거니와 심지어 그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새겨볼 한순간의 겨를조차 있겠는가.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나라가 어떤 상태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관련해 이처럼 가치가 충돌하는 전격적인 투쟁에서 패배해 버렸으니, 어찌 크나큰 희망에서 더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출구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갱 속에 갇히고 말았다는 심경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3.
 그러나, 포기할 겨를도 이유도 없다. 대선 패배 직후 등장한 <재명이네 마을>에 몰려든 십 수만의 이른바 MZ 세대의 젊은이들이 벌이고 있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크게 힘을 북돋우고 있다.


 이 기회에, 일하기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해 일한다는 사실, 싸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놀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 모두가 제대로 놀기 위해서는 모두가 일군 일의 성과를 제대로 배분하여 양극화를 극복하고 이를 통해 배타적인 소유 의식을 떨쳐버리고 놀이의 기초 조건인 열린 평등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 아울러 놀이의 재료이자 목적이 되는 문화 예술을 비롯해 학문의 성과를 창의적으로 드높여야 한다는 사실,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한 창의적인 기술 개발에 힘써 전 세계적으로 놀이의 다채로운 방식을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전쟁의 가능성과 위협을 미리 방지하고 소멸함으로써 놀이의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평화와 자유가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떠올려 강조하게 된다.


* 워낙 중차대한 국가적인 사태를 맞이한 탓에 흥분한 어조로 중언부언 깜냥에 넘치는 원칙적인 이야기들을 뇌까린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양해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