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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권력에 따라 춤추는 대한민국을 생각하며(황문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2-14 14:55
조회
208

황문규 / 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1. 세상이 혼탁하다. 어디선가 본 드라마에서 ‘아직도 정의를 찾는 사람이 있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부정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검사 출신 몇몇 무리의 말이 곧 정의의 기준이 되고 있다. 압수․수색은 수사가 아니라 통치의 수단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보이는 세상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종사하도록 되어있는 검찰과 경찰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압수․수색에 나선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국정원이 그에 뒤질세라 열심이다. 관료사회에서는 감사원이, 언론사회에서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기특하게도 압수․수색 없이도 제몫을 다하고 있다. 법원은 짐짓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압수․수색을 위한 영장 발부로 동조한다. 압수․수색을 당한 자의 모멸감과 공포감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런 세태는 어느 사진작가에 예술적 영감을 주어 ‘무빙 데이(Moving Day)’라는 작품으로 이어질 정도가 되었다.




사진: 옥정호 작가의 사진프린트 패널 작품 ‘무빙 데이(Moving Day) - No.2’.

2. 불과 얼마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권력기관이 정치적으로 중립성을 유지하고 민주적인 통제 장치가 작동하는 긍정적 의미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시도와 기대가 있었다. 그 시도는 그렇지만 너무나 민주적? 방식으로 진행된 나머지, 그리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버리는 권력기관(관료)에 포섭되어, 그나마 그때까지 매여있던 고삐를 느슨하게 하고 심지어 풀어버리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가 검찰개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삐가 풀려버린 것이다. 이른바 ‘검찰국가’ 시대가 도래하자, 그간 검경 수사권조정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기 위해 ‘경찰이 곧 시민이고, 시민이 곧 경찰이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인권경찰’을 표방하던 경찰은 어느새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의 무조건적 수용’이 경찰의 적극적 법 집행에 방해가 되는 저해요소로 평가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권력에 춤추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후과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사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돼버렸지만, 사람 좋은 어느 전직 대통령을 탓할 수만 없는 이유다.


3. 어느새 권력에 따라 춤추는 모습이 일상화된 대한민국이다. 정권교체는 이제 전 정권을 청산이 필요한 적폐로 내몰고, 대한민국을 새로운 권력에 따라 춤추게 만드는 게임의 승자에 다름 아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정부의 적폐청산이 ‘전 정권 죽이기’가 아니라, 친일잔재, 군사정권의 잔재, 그리고 예컨대 오래 전의 책이지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지적한 유교문화 중 현대사회와 모순되는 폐습 등등이 청산되고 새로운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법과 제도를 다듬고 보완하는 계기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기대가 현실이 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의 정권도 내일이면 곧 청산되어야 할 또다시 새로운 적폐로 내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간 세상이 다시 거꾸로 가고, 더 거꾸로 가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4. 혼탁한 세상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그저 각자도생해야지라는 생각이지만, 각자도생조차 버거운 세상이다. 그래도 세상이 혼탁하지 않았던 역사가 과연 있기는 했을까, 오죽했으면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탁하거든/ 내 발을 씻을 수 있어라〉가 나왔을까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나아가 노자의 숙능탁이정지서청(孰能濁以靜之徐淸)처럼 자신을 기꺼이 흐리게 만들되,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탁류를 가라앉힘으로써 세상을 서서히 맑게 할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선택하는 안목을 가진 다수가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