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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투쟁을 통한 평화다(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1-31 15:03
조회
112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 역사는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역사의 흐름을 어느 궁극적인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고 여기는 사상이 있다. 이를 목적론이라고 한다. 목적론으로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다.


한 알의 도토리는 환경을 잘 만나 적응하면 마침내 거대하게 우뚝 솟은 참나무가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도토리를 참나무의 가능태이고, 참나무는 도토리의 가능태가 현실화한 거라고 말한다. 도토리는 도토리 자체로는 현실태지만, 도토리가 참나무라는 목적을 지니고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참나무의 가능태다. 참나무도 마찬가지다. 참나무를 참나무 자체로 보면 현실태이지만, 참나무가 목수의 손을 거쳐 아름다운 가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참나무는 아름다운 가구의 가능태다.


이처럼 만물은 지금 그 자체로는 현실태(energeia)지만, 그것이 미래에 다른 무엇인가를 될 수 있고 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그 다른 무엇인가를 향한 가능태(dynamis)다. 그리고 만물의 각각은 자신의 가능태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모든 변화가 일어나 작동하는 이치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가능태의 분량은 줄어들고 현실태의 분량은 늘어난다. 현실화의 과정이 마무리되어 더는 현실태로 바뀔 가능태가 없어지고 오로지 온통 현실태만 존재하게 되면 그 완전한 현실태를 완전태(entelekeia)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역사는 궁극적으로 완전태를 향해 변화해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완전태는 신 또는 순수이성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받아들여 역사는 신의 섭리를 완성하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신의 섭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몸의 기관으로 삼아 완전한 하나의 몸 즉 완전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 완전한 몸에서는 평화와 정의가 하나가 되고, 진리와 자유가 하나가 되고, 모든 일이 절대적인 이성에 따라 진행한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한 올의 죄도 없다. 이를 이루는 게 신의 섭리다. 이러한 기독교의 목적론은 헤겔(G. W. F. Hegel, 1770∼1831)을 비롯한 서양의 철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2. 역사는 투쟁에 따른 우연의 부침일 뿐이다?


목적론과 대립하는 것을 흔히 기계론이라고 한다. 거시적이건 미시적이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빈틈없는 법칙에 따른 운동을 반복할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 기계론이다. 이 기계론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에 의해 체계화되어 근대과학 혁명을 일으키는 철학적인 기반이 된다. 이에 따르면, 물질적인 우주의 변화 과정 즉 역사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런데, 목적론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오래된 이론이 있다. 만물의 변화는 사랑 즉 화합과 투쟁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다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494∼434)의 우주 순환론이다. 그는 온 우주가 흙, 물, 공기, 불 등 네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원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화합과 적대적인 투쟁에 따라 현재의 살아있는 상태가 결정되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살아있는 상태가 결정되어 나타난다고 보았다.


만약 사랑의 화합만 있다면 만물은 흩어짐이 없이 뭉쳐지기만 하고 마침내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만물이 변화하면서 역사를 이루는 건 근본적으로 투쟁이다. 모든 변화와 운동은 투쟁을 통해 일어난다.


헤겔은 모든 운동을 모순에 따른 투쟁으로 보면서도 투쟁은 새로운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고, 모순에 따른 투쟁을 통해 도달하는 그 새로운 단계는 계속 상승하여 마침내 절대 이성의 대화합 상태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 투쟁의 과정을 변증법적인 지양, 즉 이전 단계를 포섭하면서 새로운 상태로 올라서면서 발전하는 걸로 보았다.


이러한 헤겔의 목적론적인 투쟁 이론은 엠페도클레스가 투쟁을 통해 만물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순환한다고 본 것과는 크게 다르다. 엠페도클레스의 순환론적인 투쟁 이론에 따르면,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저 우연한 드러남과 사라짐의 반복일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립과 투쟁이 처절하게 일어난다.


3. 정치는 투쟁인가, 아니면 화합인가?


한낮에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괴한이 양날의 칼을 꼬나쥐고 날아들 듯이 뛰어들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목을 깊숙이 찔렀다. 이 대표는 단번에 쓰러졌고 피를 흥건히 쏟았다. 여러모로 방송 중이었고 많은 국민이 보고 있었다. 뭔가 불안하더니 기어코 이런 참극이 벌어졌다. 이 살해 시도는 사법적으로는 살인 미수고, 정치적으로는 암살 테러고, 도덕적으로는 반인륜적이다. 한순간의 한 가지 행위에 사법과 정치와 도덕이 중첩되어 작동한다. 거꾸로 말하면, 사법도 정치도 도덕도 모두 대립과 투쟁의 일환임을 드러낸다.


불과 2년 전쯤 일명 태극기 부대는 “문재인을 찢어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들을 위시한 보수 세력은 이른바 조국 사태 때 윤석열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마침내 그 위세를 믿고서 대선에 출마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대통령 윤석열은 누구한테서 어떻게 배웠는지 알 수 없는 자유라는 말로 위장한 시대착오적인 반공의 가치 이념을 내세운다. 그리하여 대미 · 대일의 굴종적인 외교로 일관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를 중심으로 한 미·중 헤게모니 투쟁에 돈키호테적인 선봉장을 자임해 국민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지만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민족이 절멸할 수도 있는 명운을 걸고서 남북 간의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국무위원들에게 야당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싸워라. 전사가 돼야 한다”라고 말한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투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조건 투쟁이다. 권력 의지를 불태우는 투쟁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집에 의한 자존심을 위한 투쟁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신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투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을 위한 투쟁이 아닌 건만은 분명하다. 도대체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암튼 대통령인데도 윤석열은 거대 야당의 대표인 이재명을 마치 불가촉천민으로 여기는 양, 감옥에 있어야 할 자가 어딜 감히, 하는 심사를 내보이면서 대통령 취임 2년이 다 되도록 아예 만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표의 범죄 의혹 운운하면서 거의 400번에 달하는 압수수색과 체포 영장 발부를 망설임 없이 집행했다. 마치 이재명이란 자는 이 땅에서 제거해 버려야 마땅하다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해 확산했다. 이를 떠받치면서 세뇌된 자들이 없을 수 없고, 급기야 환한 대낮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거대 야당의 대표 이재명이 암살범의 공격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너무나도 심중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윤석열은 대통령으로서 한 치 빈틈도 없이 배후를 철저히 조사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사건 직후 대테러센터를 통해 마치 별것 아닌 사건인 양 ‘과도’, ‘1cm 열상’, ‘출혈량 적음’ 등으로 각색하여 가짜뉴스를 퍼뜨렸다. 이에 심지어 어느 유튜버는 몇 번씩이고 사건 현장의 장면을 보여주면서 종이칼이라고 우기면서 비아냥댔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퇴원한 직후 이재명 대표는 “싸우지 말자. 전쟁 같은 정치를 끝내자.”라고 말했다.


약자의 위치에 놓인 화합의 정치인과 권력의 고지를 점령하고서 강자의 입장에 선 투쟁의 정치인이 격돌하는 셈이다.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도 중요하거니와 그보다 앞서 이제 결국에 가서 누가 어떻게 싸워 현실적으로 승리의 효과를 가져올 것인가가 중요하다. 진정 누가 강하고 약한지 결론을 내야 하는 싸움이다. 화합의 메시지도 투쟁의 수단이고, 투쟁에 대한 독려는 말할 것조차 없다.


그래서 “싸우지 말자”라는 이재명 대표의 말은 해석학적인 맥락을 고려할 때 적극적으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게 진실이고, 진실의 힘이다. 그 진실은 그가 늘 하던 말대로 싸우지 않고 ‘싸워’ 이기자고 하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싸우는 자’는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난센스다. 진실은 싸우지 않는 평화와 싸우는 투쟁이라는 양날의 검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투쟁이라는 외날의 긴 칼을 마구 휘두르는 자를 상대를 맞아 어떻게든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기독교인들의 정신적인 맹주인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하고서 외쳤다. 예수가 어찌 검만을 주러 왔겠는가.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내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피도 눈물도 없이 자기의 권력을 위한 투쟁만이 빛나는 긴 칼을 마구 휘두르는 자에게 이제 싸우지 말자고 제안하는 건 얼핏 약자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른바 강자는 한편으로 간담이 서늘할 것이다.


이제 총선이다. 이재명 대표는 화합의 칼날이 어떻게 투쟁의 위력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 화합을 뒤집어 투쟁을 위한 투쟁의 칼날을 번뜩이며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이 절로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처절한 투쟁이 없을 수 없다. 정치야말로 화합과 투쟁이라는 양날의 검을 적재적소에 휘두를 수 있어야 하는 이른바 전인적인 예술인 것이다. 화합 일변도로 윤석열을 낳은 문재인의 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