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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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한 사회를 여는 재산비례 벌금제 (경향신문, 2021.01.01)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1-05 10:29
조회
111

사진 출처 - 한겨레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은 소득과 재산에 따라 달리 낸다. 부자는 좀 더 많이 내고 가난한 자는 적게 낸다. 공평하게 내는 거다. 1993년 금융실명제, 1995년 부동산실명제 도입으로 세상은 투명해졌고,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제대로 운영할 만한 틀도 이미 마련했다.


그런데 유독 벌금만은 소득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매긴다. 빈부의 차이가 엄연한 세상에서 무차별은 더 노골적인 차별과 다름없다. 소득과 재산에 따라 다른 액수의 건강보험료를 내는 게 당연하다면, 벌금도 그래야 한다. 형벌은 고통을 주어 죗값을 치르는 거다. 벌금형은 돈을 빼앗는 고통으로 죗값을 치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의 벌금을 매기면, 형벌로서의 효과는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누군가에겐 벌금형이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선처가 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에겐 무거운 형벌이 된다.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가는 사람은 매년 4만명 이상으로 여전히 많다. 형벌은 대부분 벌금형이다. 그러니 벌금형이 공평하지 못하면 형벌 자체의 근간이 흔들리는 거다.


오랫동안 소득이나 재산과 연동해 벌금을 정하는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학계 논의는 30년이 넘었고 인권운동가들에겐 좀체 풀리지 않는 숙원사업이었다. 인권연대가 장발장은행을 만든 건 벌금제 개혁활동의 일환으로 일종의 궁여지책이었다. 벌금을 못내 감옥에 갇힐 위기에 놓인 우리 시대의 장발장들을 위해 무담보, 무이자 대출을 6년째 계속하고 있지만, 장발장은행의 목표는 얼른 문을 닫는 거다. 벌금제를 고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독 가혹한 형벌을 강요하지 않고, 빈부의 차이를 떠나 모두에게 공평한 형벌이 적용되는 세상을 위한 작은 디딤돌 역할일 뿐이다.




재산비례 벌금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지금의 총액 벌금제를 재산비례 벌금제로 바꾸는 것은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절실한 과제였다. 법이 정의를 위한 도구가 되려면 무엇보다 공평해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집권세력은 별 관심이 없었다. 국가의 형벌만큼은 공평해야 한다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반가운 토론회가 열렸다. 지난달 22일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형사정책연구원이 함께 연 ‘자산(재산)비례 벌금제의 입법 방안’ 정책토론회였다. 새로운 제도에 대한 시민 일반과 전문가들에 대한 의식 조사도 했고, 챙겨야 할 여러 쟁점도 함께 다뤘다. 이름이 낯설어서 그렇지 설명을 들은 대다수 시민들은 재산비례 벌금제 도입을 찬성했다. 소병철 의원은 재산비례 벌금제 도입을 위한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터였다.


법무부 소속 검사만이 유일한 반대론자였다. 반대라고 꼭 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하면 재판이 지연되어 피고인 인권침해 등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정확한 소득과 재산을 조사하려면 시일이 꽤 걸릴 테니 그만큼 재판이 지연될 거란 말이다. 또한 형법만이 아니라 개별 법률들을 모두 찾아서 고쳐야 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도 필요하니 시간을 갖고 더 많이 연구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했다. 흔한 ‘시기상조론’이었다. 다들 공평한 세상을 바란다고 말하지만, 실질은 이렇게 많이 다르다.


한국은 역동적인 나라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처럼 힘센 사람들의 이익이 걸리면 유독 뜸을 들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형사정책 중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의했던 주제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농익혔지만, 검사는 시기상조란다.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한 나라들도 꽤 많아서 참고할 모델이 차고 넘치는데도 딴소리다. 핀란드는 1921년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 정확히 100년 전이다. 스웨덴 1931년, 덴마크 1939년, 꽤 늦었다는 독일(연방공화국)도 1975년에 도입했다. 2021년의 대한민국이 1975년의 독일, 심지어 1921년의 핀란드만큼도 못하다는 걸까.


재산이나 소득을 파악하는 데 별도의 예산이나 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건강보험료 기준 소득 분위를 그대로 활용해도 된다. 국가장학금처럼 보건복지부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을 활용해도 된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부족한 것은 정확한 소득과 재산을 파악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공평한 형벌을 집행하겠다는, 나아가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책의지다.


새해다. 코로나19도 잘 극복하고, 한국 사회가 보다 공평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재산비례 벌금제가 그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