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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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이’란 사람과 잊혀질 권리(경향신문, 2020.11.06)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1-06 11:39
조회
55


출처 - 구글


조두순의 재범 확률은 76.4%란다. 법무보호복지공단이 대학과 공동 연구했다며 내놓은 결과다. 일기예보조차 엇나갈 때가 많다. 앞날을 내다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재범 확률을 소수점 이하까지 정확히 제시한다. 이런 식의 황당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몇년 전부터 조두순 출소를 예고했던 언론은 이젠 D-며칠 하는 식으로 아예 날짜까지 매겨가며 기사 제목을 달고 있다.


1952년생 조두순은 출소 직후 일흔 살이 된다. 희대의 악당이니 늙었다고 경계를 늦출 수는 없을 게다. 법이 정한 전자발찌와 신상공개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갖가지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법무부, 경찰청, 여성가족부와 안산시까지 발 빠르게 대책을 내놓고 있다. 조두순 집 근처에는 출소 전까지 200여대의 CCTV를 설치하고 내년까지는 모두 3700여대를 더 설치한다. 보호관찰관은 일대일로 24시간 조두순을 감시하고, 경찰은 집 앞에 방범초소를 세우고 특별 감시시스템을 운용한단다.


12년 전 조두순이 저지른 범행은 참혹했다. 말뜻 그대로 비참하고 끔찍했으며,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해서 조두순의 이름은 곧바로 공포를 불러온다. 게다가 조두순이 했다는 “교도소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나올 테니, 그때 봅시다”라는 말 때문에 더욱 섬뜩한 존재가 되었다. 감옥에 갇힌 12년 동안에도 내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니, 조두순이 사회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여론이 들썩이는 건 당연할 게다. 그는 현존하는 괴물이다. 조두순이 지닌 악마적 이미지 때문에, 어떤 기사든 조두순과 엮으면 주목받을 수 있다. 언론의 클릭 장삿속이 조두순이라는 폭발력 있는 뉴스메이커를 불러내는 거다.


오늘도 조두순을 둘러싼 온갖 보도가 차고 넘친다. 조두순의 재범률을 정확히 예측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했다거나 조두순이 했다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들까지 여과 없이 보도되고 있다. 그래도 좋다. 조두순은 몹쓸 짓을 했으니, 그가 족쇄를 차고 사는 것도 어차피 치러야 할 죗값일 테니, 그렇다 치자.


문제는 조두순 사건에서 반드시 함께 거명되는 그 피해자, 여전히 ‘나영이(가명)’라 불리는 사람이다. 세월이 흘렀고, 그도 이젠 성년을 넘긴 청년이 되었다. 그에겐 더 이상 친권자도, 보호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래 청년들이 그렇듯, 그도 평범한 대학생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언론은 여전히 그를 조두순 사건의 피해 어린이로만 다루고 있다. 언론은 조두순을 불러낼 때마다 ‘나영이’도 함께 호출하고 있다. 그의 범죄 피해는 조두순의 악마성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며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온갖 과장을 덧붙이기도 한다.


어떤 정치인이 이끄는 사단법인은 나영이를 위해 모금을 한다고 분주하다. 이미 성인이 된 사람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돕겠다는 거다. 도움은 도와달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거다. 적어도 성인에게는 그렇다.


‘나영이’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경찰관에게 들었다. 그는 나영이 자매가 언니라 부르며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다. 나영이 자매를 살뜰하게 챙겼고 국내여행은 물론 해외여행도 함께 다닌다. 누군가의 후원이나 모금을 통해 하는 일도 아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찰관으로서의 미안함, 아니 그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안타까움은 그를 나영이 자매의 든든한 후견자가 되도록 했을 거다. 그는 최근 한 인권단체의 홈페이지에 쓴 기고문을 통해 조두순 출소를 앞둔 과도한 관심이 ‘나영이’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달라고 호소했다. 언론이 조두순에 대해 보도할 때마다 나영이가 함께 언급되는 상황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거다.


‘나영이’란 사람은 신체적·정신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살기 위해 애썼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그러니 조두순이란 괴물 때문에 ‘나영이’의 상처를 들쑤시는 일은 이젠 그만둬야 하다는 거다. 무엇이든 ‘나영이’와 관련된 결정은 ‘나영이’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 그건 부모도 예외가 아니어야 한다.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초등학생 때의 상처만을 계속 부여잡고 살 수는 없다. 범죄 피해만으로도 힘든 사람에게 끔찍한 기억을 자꾸만 되살리는 것은 너무 폭력적인 일이다. 이런 게 바로 2차 가해다.


범죄피해자를 대할 때는 언제나 섬세하고도 신중해야 한다. 언급조차 조심스러워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나영이’란 사람을 돕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을 그냥 두는 것이다. ‘나영이’란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잊혀질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