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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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쓸 짐승의 말을 하는 김홍도의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는 까닭(05.01.17)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4:03
조회
358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금란교회, 서울 망우리에 자리 잡은 이 교회는 목사 김홍도가 1971년 부임할 당시 7~80명에 불과한 교인이 12만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온 대형교회이다. 전세계에서 4번째로 크고, 감리교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이 교회의 성전은 무려 1만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김홍도 담임목사 외에도 부목사 13명, 은퇴목사 1명, 심방전도사 60명, 교육전도사 12명, 해외 선교사 8명, 음악 전도사 1명, 장로 52명 등의 교역자들이 ‘담임 목사의 목회 방침에 따라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13개의 대교구와 60개의 교구, 393지역, 5580속의 잘 짜인 지역조직을 갖고 있고, 245개의 남선교회, 230개의 여선교회가 선교에 주력하고 150명씩 모이는 성가대만 9개가 있으며, 주일학교 교사만도 1,000명이 넘는다.


최근 언론은 이 놀라운 영적 능력을 보여준 김홍도 목사의 설교를 다루고 있다. 김목사가 새해 첫 예배에서 “서남아시아 여러 나라가 바다 속 지진과 해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이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그는 “8만 5천명이 사망한 인도네시아 아체라는 곳은 3분의 2가 이슬람교도들인데 반란군에 의해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고 교회가 파괴됐고, 스리랑카 역시 불교의 나라로 역시 반란군에 의해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라고 지적했고, “태국의 푸켓은 구라파 사람들이 와서 향락하며 마약하고 죄 짓는 곳”이며 “제일 기뻐하는 명절인 크리스마스 주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런데 가서 음란하고 방탕하게 죄짓지 않는다”며 “설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데 놀러 갔더라도 특별히 하나님이 건져 주신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특별한 건져짐의 방법은 “정신 차리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김홍도 목사의 발언에 분노한다. 전쟁보다 더 끔찍한 재해를 당한 사람들의 처절한 고통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에게 내리는 심판’이라며, 자연재해마저도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 활용하는 그 뻔뻔함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고통과 연대하는 목회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만 열심히 기도하면 재해도 피해갈 수 있는 특별한 건져짐이 있을 것이라는 그 독단 때문이다. 삶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을 예수에 기대 사는 나에게도 김홍도 목사의 발언은 추악한 사탄의 소리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을 그에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그가 홀로 일으켰으며 홀로 영적 지도를 하는 금란교회는 여전히 12만명의 성도가 모여 연일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금란교회 홈페이지가 자랑하는 이 교회의 30여년의 연혁은 온통 언제 몇평 짜리 성전을 새로 짓고, 언제 교인이 몇 명 더 늘었고, 언제 김홍도 목사가 이런저런 근사한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다.


나는 그를 교회 돈을 제 돈처럼 여기고 호사스런 삶을 사는 목회자, 천박하기 그지없는 인식의 소유자, 남의 고통을 오로지 제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악한으로 규정하지만, 그의 부흥의 역사는 끝도 없는 것처럼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왜일까?


김홍도 목사는 그 다음주 설교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가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묻는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시고 또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인데 어떻게 하면 이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가 제시하는 답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설교를 좀 더 따라가 보자.


“그것은 바로 시간의 7분의 1,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과 물질의 10분의 1,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국 교인들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체험한 사실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하자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고 재앙과 사고가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이외에도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하고, ‘드림으로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 “자식에게 재산 물려줄 생각 말고 하나님께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황 중에도 호황을 누릴 수 있고 불경기에도 호경기를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김목사는 만약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는다면, “돈 많이 벌고 벼슬하고 잘 사는 것은 동남아시아에 지진과 해일이 덮친 것처럼 언제 나아갈지 모르는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제 겨우 놀라운 성장의 비밀을 풀 실마리를 찾았다. 교인들이 그가 제시하는 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면 그의 보증으로 ‘불황 중에도 호황을 누리고 불경기에도 호경기를 누리는’ 신묘한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기가 너무 팍팍한 세상이다. 표현은 점잖아서 ‘경기 양극화’라지만, 국민의 8,90%나 되는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고단하다. 장사도 되지 않고 불황과 불경기는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어렵다. 어려운 사람들이 복을 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은 것은 부자도 마찬가지이다. 부자라고 고초가 없을 리 없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신에게 축복을 구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문제는 김홍도 목사처럼 놀라운 역사를 이룬 목회자들이 제시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이들은 하느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불위(無所不爲)한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쯤 되면 하느님이란 분이 참 옹졸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분이, 천년도 지나간 어제처럼 여기시는 분이 왜 보잘것없고 기껏해야 100년도 살 수 없는 하찮은 인간의 찬송과 돈푼에 그토록 연연해하시는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아드님이 참혹한 고통을 겪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신 분이 왜 그토록 사람의 찬송과 사람이 내는 돈푼이 아니면 축복을 허락지 않으시는 건가. 왜 그렇게 좀스럽기만 하신가.


세상에 공짜가 없는 법이니, 사람도 복을 받고 나아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값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 까지는 좋다. 이것 자체로 정의에 반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때 사람이 지불하는 값은 최후의 심판 장면을 설명해 준 예수의 말씀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하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하고, 이기적인 것이 사람이라고 해도 찬송하지 않고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도 없다며 협박을 일삼고 그것도 모자라 처절한 고통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아 재앙을 당했다”는 몹쓸 짐승의 말을 하는 작자의 교회가 그토록 놀라운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자기와 자기 가족만 온갖 축복을 다 받겠다며 교회에 돈푼이나 내는 쉬운 일로 현세와 내세의 축복을 구하는 따위 얼렁뚱땅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것인가.


새해이다. 예수를 팔아 치부하며 현실적 권력을 찾아 부나비처럼 몸부림하는 목회자들의 극성이 새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새해에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의 가르침을 묵묵히 실천하며 사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을 한명이라도 더 만나고 싶다. 새해이니 그런 꿈도 가져볼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