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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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희망은 '현장 교사'다. (시민의신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23 16:23
조회
239
다시 희망은 ‘현장 교사’다

2006/7/27
오창익 기자


올해부터 두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운영위원이 되었다. 내 직업과 이력 때문에 학교에서는 조금 부담스러웠나 보다. 누구도 내색하지 않지만 학교 책임자들이나 학부모들의 태도에서는 확실히 선입견이 느껴졌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내가 들어서면 말을 멈추었다. 뒷풀이 자리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해 실없는 개그를 몇 번이나 반복한 다음에야 그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고 나를 사람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감시‘견’으로만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반응도 있었다.

운영위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한 첫 날, 남자 선생 둘이 반가운 체 했다. 아빠가 학교 일에 관심을 갖거나 실제로 참여하기가 쉽지 않은데 큰 결심을 했단다.

서울에 있는데도 한 학년에 3개 반만 있을 정도로 학교 규모도 작은데다 남자 교사도 3명밖에 없는 터라, 편하게 술잔이라도 기울일 수 있는 ‘남성’의 출현에 반가워하나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선입견을 주었던 나의 이력을 보고 반가워했던 것이다. 요즘 말로 코드가 맞을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었던 거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김씨 성을 가진 두 남자 선생들과 만남이 잦아졌다. 회의 끝나고 하는 뒷풀이에 운영위원도 아닌 선생이 끼거나, 뒷풀이 2차를 따로 하는 경우도 있었고, 방학했다거나 하는 이런저런 핑계로 술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다. 나의 출현을 반가워했던 두 김선생은 흔히 하는 말로 ‘활동가’는 물론 조합원도 아니었다. 잘 모르지만 자랑할만한 경력도 없는 것 같고 교장, 그 이전에 교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줄을 서겠다는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초등 교사로서 학력만 강조하는 학교 당국과 학부모들의 요구와 달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꿈을 심어주기 위해 교사가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 생각에서 나온 실천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어린이날 우리 집 아이는 담임선생이 주었다며 꽃다발을 내놓았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김선생의 가족들이 몇날며칠을 모여앉아 접고, 오리고 붙이기를 반복한 선물이었다. 두 김선생에게 선물은 교사가 학생에게 주는 것이지, 학부모가 학생의 편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학년별로 움직이는 수련회나 다른 학교도 다 하는 스카우트 야영은 물론이고, 교육계획에도 없는 학급별 야영을 마련하기도 하고, 학예회나 경로당 방문 같은 프로그램도 자꾸만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어린이다운 꿈을 지닐 수 있는 학예회를 활성화하고, 어르신들과의 만남을 통해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경로당을 찾아 각자의 재주를 펼쳐놓도록 돕는 교육은 논술이니 영어니 하는 학력 위주의 교육보다 훨씬 더 교육적인 활동이지만, 이를 실행하는 것은 첩첩산중을 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유감스럽게도 동료 교사들이었다.

이때 두 김선생이 생각한 방법은 둘 다 부장을 맡고, 학교의 이런저런 잡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퇴근시간은 보통은 8시나 9시였고, 늦을 때는 10시, 11시도 보통이었다. 오후 4시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빠져나가는 다른 교사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마치 80년대에 공장에 침투한 활동가들이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함으로써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려 했던 장면이 떠오르는 발상이었다.

두 김선생이 이토록 열심히 일을 자청한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는 토대가 필요하고, 토대는 자기 헌신이 아니면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쉽지 않은 길을 가려는 사람은 비록 소수여도 어디나 있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우리 사회는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가거나 최소한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교육희망에 대해 말하지만, 결국 그 희망은 구체적인 현장을 살아가는 선생들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조직이나 정책, 담론, 구체적인 전술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필요한 이유이고 바탕인 아이들에 대한 선생들의 애정이다. 입시 환경, 새로운 교육과정과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 대통령의 반교육적 시각 때문에 선생이 단지 기능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답답한 현실을 극복할 방도도 쉽게 찾기 힘들다. 그래도 결국은 선생들의 마음에 기댈 수밖에 없다. 선생들의 마음이 모인 전교조라는 조직이 귀한 탓도 여기에 있다.

아무튼 우리는 선생들의 마음 때문에 교육에서의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을 수 있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