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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호] 어느 사학도의 역사 풍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10-21 14:48
조회
429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박태순의 소설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1980)에 나오는 “이 새로운 시대는 분명 잘못되어진 시대였고 진보가 아니라 퇴보로 뒷걸음질 치는 그러한 새로운 출발점을 이루었다”는 구절에 ‘감전’되어 그가 '역사 서당'에서 풍월을 배우고 익힌 지도 어언 4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말이 좋아 역사의 풍월이지, 사실 그가 주로 읊조린 건 풍월의 지엽말단(枝葉末端)에 불과했다. 그가 간신히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가락이라는 것도 서양사⊃(=중에서도)사상사⊃서양근대사상⊃자유주의⊃19세기 말 영국의 신자유주의 정도였다. 하여 그는 역사 풍월을 익힌 거의 모든 동무나 성님-아우님들이 그러하듯, 다른 갈래의 역사 풍월이나 역사 풍월 전반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길 삼갔다.


출처- 알라딘 중고서적


 불조심하듯이 말조심을 한다는 경계의 마음이 있어서 그리했다기보다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사 풍월이라는 게 넓기가 한량(限量)이 없고, 갈래가 수십, 수백인지라 일언지하로 그 전모를 언술하기란 썩 어렵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가락을 하는 소리꾼이라고 해서 죄다 명창도 아니고, 명창이라 해도 '대문자로서의 역사'를 논할 식견을 겸비한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서도 매우 드물었다.


 사정이 그러했음에도 그는 ‘역사 서당’의 언저리를 쉬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유명한 소리꾼이 되겠다는 꿈, 그에게는 그런 명창의 꿈 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다만 역사의 가락 가운데 한 대목이나마 자기 색깔의 소리로 불러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을 뿐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많지만, 행여라도 자기처럼 노래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그에게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은 있을법한 시구(詩句)가 아니라 틀림없는 사실(事實)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그가 초로(初老)의 사학도가 되면서 역사 풍월을 생계의 수단보다는 생각의 길잡이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돈에 의해 재단되고 있다. 돈이 되는 것만이 쓸모가 있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쓸모만이 아니라 가치 있음/없음 자체가 경제적 유용성에 의해서 평가된다. 사람의 노동만이 그런 게 아니다. 사람 자체를 ‘돈이 되는 사람/돈이 안 되는 사람’으로 나누는 게 당연시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사랑의 윤리(倫理)보다는 교환의 이윤(利潤)에 좌우되고 있다.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경제적 유용성이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시장전체주의”(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의 표현)의 세상에서, 그에게 역사 풍월을 읊조리는 일은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이것은 홍세화 선생의 표현)을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얼핏 본 역사 세계지만, 거기에서 <그저 배부르게 사는 삶과는 다른 삶도 있다; 사회적 금기를 깨려는 시도는 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치부나 정치적 출세에는 무용한 일에 젊은 날(의 한 시절)을-나아가 일생을- 걸기도 한다>는, 한 마디로 의미 추구의 삶도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의 가락을 얻기도 했다.


 대다수 국민과 마찬가지로 그도, 현재의 정권은 검사 생활로 잔뼈가 굵은 대통령과 이런저런 인연이 얽힌 검찰 출신들로 짜여 있다고 생각한다. 검찰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출세한다고 하나 그들은 그저 속칭 ‘바지사장’이거나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청받아서 하는 일꾼처럼 보일 뿐이고, 국정의 요직은 검찰 출신들이 꿰차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봐도, 법무부 장관과 차관, 통일부 장관, 법제처장, 보훈처장, 금융감독원장,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국무총리실 비서실장이 검사 출신이고, 대통령실의 인사, 법률, 공직기강, 총무 관련 업무도 검찰 출신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검찰 출신들이 독식하고 있는, 대단히 이례적인 인사편중 현상이야말로,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검찰 공화국’이라고 칭하기도 어려운 ‘검찰 독재’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라고 그는 생각한다.


 ‘열흘 붉은 꽃은 없고(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권력은 십 년 못 간다(권불십년, 權不十年)’라는 옛사람들의 말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역사 풍월을 읊조리다 보면, 아무리 막강하고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권력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한다. 역사상 모든 형태의 독재가 그러했듯이, 작금의 검찰 독재는 끝날 수밖에 없단다. 무오류의 교황권(Ultramontanism)을 내세웠던 서양 중세의 가톨릭 단일 신앙 체제이든; 신의 이름으로 왕의 권력을 정당화했던 절대주의의 독재이든; 공산당 독재와 같은 ‘일당독재’이든; 히틀러처럼 (돌격대, 친위대, 비밀경찰 등의) 준군사조직을 동원한 독재이든; 군부독재와 같은 ‘(한) 조직의 독재’이든 간에, 예외 없이 무너졌다. 끝나지 않는 잔치도 없고, 끝나지 않는 독재도 없다! 이 주장은, 그에 의하면, 주관적 소망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끝이 좋으냐, 나쁘냐이겠다. 인간의 지혜가 모자랐던 옛날에는 (가뭄, 홍수,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의 힘, 운명(의 장난)이나 신탁, 초월적인 존재의 섭리나 영웅적 개인의 의지에 따라 비극으로 끝날지, 희극으로 끝날지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통 사람들의 집합적 의지와 힘이 역사를 좌우한다는 게 역사적 상식이 되었다. 따라서 지록위마-아니, ‘지(指)바이든위(爲)날리면’으로 표상되는 저 무도한 검찰 정권에게 어떤 결말을 지어줄지는, 눈과 귀가 멀쩡한 우리네 시민에게 달린 일이 되었다. 역사는 우리가 일하기 나름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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