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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호] 튀빙엔(독일)의 도착보고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10-21 14:47
조회
259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겨우 한 달 남짓 살고 이곳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한 것도 있고 이상한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은 메모를 해두었는데, 피차 거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중 서너 가지 소개합니다.

 *9유로(euro) 티켓 : 올해 6월~8월 사이에 9유로(13,000원) 티켓 하나로 일반 대중교통인 버스, 기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연방의회에서 시행했다. 석 달 동안 교통비가 9유로라는 말이다. 시내버스 2.9유로(한 달권 55유로), 튀빙엔에서 근처 도시로 전철을 타면 20유로는 기본이기 때문에, 9유로 티켓 있을 때 가고 싶은 데 가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8월 16일에 도착한 우리는 보름 남짓 혜택을 누렸는데, 그 위력을 실감하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기한을 늘이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가스, 전기값 인상에 따른 재원 준비가 우선이라 더 연장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코로나 상황에서도 중산층 이하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훨씬 여유로워졌다. 버스와 전철이 공영이라 가능한 제도라고 한다. 역사를 보아도 공공재의 사유화, 이걸 두고 선진화, 효율화라고 하는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9유로 티켓 : 이 티켓이 준 안정감이 과연 싸다는 이유만으로 설명이 될까.]

* 숲 : 근대 조림(造林)의 선구였던 나라답게 숲이 많다. 숙소 근처의 쇤부흐(schönbuch)를 자주 간다. ‘너도밤나무 숲’이란다. 멀리서 보면 스멀스멀 귀신이라도 나올 듯하다. 저녁 무렵이나 안개라도 피어오르는 날이면 영락없이 미녀와야수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날 그런 모습이다.

 귀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춘추좌씨전》에는 옛날 하(夏)나라 우 임금이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한 뒤 거기에 숲이나 강에 사는 각종 귀신의 모습을 새긴 뒤 백성들에게 알려 그들을 피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이 얘기는 뒤집힌 걸로 보인다. 이미 숲이나 강을 이용하며 그 속에 살던 인민들은 숲과 강에 익숙했을 것이다. 정작 숲의 귀신을 몰랐던 것은 우 임금이 아니었을까? 우 임금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몰랐을 것이다. 로빈훗이 노팅엄 셔우드 숲으로 들어갔을 때, 그를 잡겠다고 왔던 국왕의 군대는 숲속에서 지리멸렬했을 뿐이다. 국가 행정이 주민들이 사는 동네나 그 언저리까지 미친 것은 불과 2세기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런 추측이 거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숲은 사람들이 사과나 딸기 같은 열매, 집이나 외양간 지을 목재, 빵을 구울 땔감,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꿩, 사슴, 멧돼지 등을 공급받는 공유지였다. 강과 함께 숲은 사람들의 생계에 유력한 후원자였다. 잉글랜드 〈마그나 카르타〉나 조선의 《경국대전》에서는 이곳들을 ‘사사로이 점유할 수 없는 공유지’로 못박아놓고 있다. 흥미롭게도 튀빙엔 여행안내소에서 얻은 자료가 16세기 〈튀빙엔 협약(Tübinger Vertrag)〉 사진과 번역문이었는데, 여기에도 농민들의 공유지 이용권에 관한 조항이 명시되어있다.

[쇤부흐 숲 : 로빈 훗이 나올 듯한 숲인데, 곳곳에 길이 나 있어 사람들이 걷고 뛴다.]

* 걸림돌 : Stolperstein. 걸려넘어진다는 stolpern + 돌 Stein의 합성어이다. 재질은 돌이 아니라 구리이다. 튀빙엔 대학 한국학과에서 본관으로 걸어가다가 이 슈톨퍼슈타인에 발이 걸렸다. 알고 보니 정말 발에 걸리게 0.5cm 정도 도드라지게 설치한다고 한다. 유대인, 집시, 기독교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 ‘차별받고 처분된 인간’을 기억하기 위한 조각품이다. 인권연대의 ‘5월 걸상’과 가까운 기억 프로젝트이다.

1940년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보면서 그의 리얼리즘에 놀란 적이 있다. 이후 조금 더 사실을 알고부터는 놀라기보다, [당황(betroffenheit)]이라는 《나치시대 일상사》를 썼던 포이케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놀라서 설마, 하면서 고개를 돌리다가도 뒷머리를 당기는 듯해서 외면할 수 없고 왜 그런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뒤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야 내가 인간일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소피 벨, 여기 살다. 1852년 생. 1942년 추방. 그해 12월 8일 사망.]

* 비자 신청 : 석 달 전에 9월 13일 비자 신청을 예약했다. 그 며칠 전에 날짜를 상기시켜주는 메일이 왔다. 고마웠다. 13일 3시에 시청 대기실에 도착하여 차례를 기다렸다. 시간이 꽤 지나도 예약번호가 뜨지 않았다. 이상해서 외사과에 가보니 담당자가 결근했다. 그런데 그가 결근한 지 동료 직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무단결근.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이 사람이 어디 사고를 당했던지 아픈가보다, 싶었다.

 내가 메일을 보낸 지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내 주민등록이 검색이 안 된다고. 첫째, 주민등록은 이미 했다. 또 서류는 비자 신청 때 접수하면 되는 것이지, 검색 여부와 상관이 없다. 무단결근으로 못 지킨 비자 예약날짜를 다시 잡아주면 되는 거다. 그래도 나는 일단 주민등록 서류까지 메일로 보내주었다. 또 소식이 없다. 내가 다시 메일을 보냈다. 영국도 가야하고 해서 비자가 필요하다, 다시 예약을 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혹시나 했던 걱정은 이제 무책임에 대한 어처구니없음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난 뒤 27일 2시 반에 오라고 메일이 왔다. 나와 예약 일시를 상의한 게 아니라 그냥 그때 오란다. 직장에 나가야 하는 형편이었다면 어땠을까? 일시를 나와 상의해서 조정하자는 메일을 쓰려는데, 동료가 말린다. 더 번거로워질 수 있다고. 그날따라 기분도 좋고 다른 약속이 없었던 나는 ‘남의 나라니까’ 하고 참기로 했다.

 신청하는 날. 주한 독일대사관 서식에 신청서를 미리 작성해갔는데, 그 서식이 아니라며 튀빙엔 시청의 신청서를 준다. 외무부 서식 다르고, 시청 서식이 다르다? 웃긴다. 기재 내용? 다 같다. 칸과 종이 색깔만 다른 거다. 게다가 혼인증명서가 필요하단다. 대한민국 대법원의 배우자증명서와 외무부의 아포스티유까지 첨부했거늘. 안 된다고 했다가, 나는 이 외에 다른 혼인증명서를 제출할 수 없다고 항의(?)하니 그럼 알겠다고 한다. 그럴 걸 왜…….

 숙소계약서, 대학계약서를 추가로 보내달란다. 숙소계약서가 없으면 주민등록(Anmeldung)이 안 되니, 주민등록 서류를 제출했다는 말은 숙소계약서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숙소계약은 대학 웰컴센터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학과의 초청장과 대학의 협약서가 없으면 숙소계약서는 애당초 발급받을 수가 없다. 쉽게 말해 추가로 요구한 둘은 비자 신청에 전혀 불필요한 서류인 것이다. 지금도 그 직원이 이 일의 담당자가 맞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동료는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한다. 그럴까? 그럴 리 없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무책임이라면 처음일 리가 없다. 어떤 동료의 말로는 독일 공무원은 처우나 사회적 인정이 낮고, 그래서 책임감이나 뭐 이런 거 기대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럴까? “인간은 스스로를 우습게 여긴 다음에 남들이 우습게 여기는 법이다.[人必自侮然後人侮之]” 더구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나중에 책임을 지게 되는 상황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은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더 문제이다. 책임감은 공무원의 덕목에 관계되지만, 사과할 줄 모르는 것은 인간다움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

[튀빙엔의 시위와 장날. 인구 9만의 도시가 갖는 자립성과 안정감이 부럽다. 대도시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에 분산되어 살 수 있는 힘일 텐데, 이걸 잘 들여다보아야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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