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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호] '헌트’로 기억난 야만의 시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9-20 11:06
조회
277

이윤/ 경찰관


 얼마 전 ‘헌트’라는 영화를 봤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에 화려한 액션까지 있어서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다. 다만 정보기관의 고문 장면은 불편했다. 고문 묘사가 간략해서 그다지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고문당하는 공포와 고통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했다. 교수, 대학생, 방산업체 사장, 심지어 정보기관 내 다른 부서 근무자도 고문 대상이었다. ‘저 사람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투서나 첩보 한 줄이면 누구라도 고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 속 장면보다 더 잔인한 현실이 존재했던 80년대까지의 한국 현대사는 메카시즘이 만연한 야만의 시대였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인 88년 1월, 몇몇 경찰대학 재학생 대표들은 경찰 중립화 선언 준비로 분주했다. 졸업한 1, 2, 3기 선배들과 함께 총동창회 명의로 「경찰 중립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각 언론사에 배포하기로 하고 문안을 작성했다. 당시 과 대표로서 참석했던 나도 종로 어느 식당에서 선배들의 토론을 지켜보았다. 어리숙한 나는 허공에 날아다니는 문장을 따라잡기에도 숨이 찼다. 당시 선배들은 성명서가 보도되면 주동자와 참여자들이 잡혀갈 수도 있다며 그에 대한 대책을 고민했다. 나에겐 그 고민이 좀 생뚱맞았다. 그래도 경찰관인데, 민주 사회를 위한 의견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잡혀갈까 걱정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걱정을 이해하게 된 것은 거의 20년이 지난 후에 한 1기 선배님의 경험담을 들었을 때였다. 그 선배님은 88년 총학생회 성명서 배포 며칠 전 이미 일부 언론사에 「경찰의 발전과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참회록」을 보냈다. 양심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며칠간 조사받고 나왔다고 했다. 끌려갈 때는 어디로 무슨 이유로 간다는 아무런 설명 없이 눈이 가려진 채 차에 실려 갔다고 했다. 몇 대 맞기도 했고 온갖 욕설과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고 했다. 그 선배는 80년대를 성인으로 살며 시대의 부조리를 직접 경험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었고 또 그 공포를 견디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입을 헤 벌리고 들으며 살갗에 돋는 소름을 느낄 뿐이었다.


 ‘헌트’를 보면서 느낀 불편한 감정은 그때의 기억과 함께 내가 저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저 폭력을 견딜 수 있었을까. 저 자리에서 저런 고문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죽을 수도 없는 무한한 고통의 굴레에서 얼마나 절망하였을까. 그래서 누군가는 고문 중에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풀려난 후에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거나 스스로 끊었을 것이다. 그들이 느꼈을 고통과 공포와 절망의 깊이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진 출처 - 영화 '헌트'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이 국민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법을 사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권력이 고문 같은 비인간적인 행동을 못 하도록 국민의 약속인 법으로 정하고, 사회적 필요에 의해 체포, 구속, 압수 등 신체․재산의 자유를 제한할 때는 반드시 법이 정한 요건이 충족될 때, 법이 정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그나마도 최소한으로 하라는 것이 법치주의다. 대학생 시절 헌법과 형사소송법 교과서는 ‘적법절차’와 ‘무죄추정 원칙’,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을 지켜 수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원리와 원칙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던가 보다. 도서관에서 본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라는 책도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 많은 법학 교수님과 법조인들의 말과 글이 공허하고 무책임해 보였다.


 아직도 지구별 어딘가에서는 고문과 사법 폭력이 자행되고 있을 것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911테러 용의자로 구금되어 고문당했다는 증언이 최근에도 공개되었다. 실화에 기반한 ‘제로 다크 서티’라는 영화를 보면 CIA 요원들이 빈 라덴을 추적하기 위해 알 카에다 대원을 고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고문이 불가피할 경우 고문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한 철학적 딜레마다. 인류 문명은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우린 아직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만의 시대는 종식되어야 한다. 특히 권력 장악과 유지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특히 경찰이 야만의 첨병이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더더욱 간절히 바란다. 법률 속 글자 몇 개와 시행령 속 문장 몇 줄을 걱정할 만큼 대한민국이 허약하지 않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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