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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 여전사와 여성경찰(이회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5-15 13:55
조회
644

이회림/ 00경찰서


 쿠르드 여전사 '딜진'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고향에서는 산책을 하고 싶으면 남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면서 “여권(女權)을 수호하려고 전투한다. 적(IS)뿐 아니라 가부장제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역할(전쟁)을 수행해 편견을 깼다. 이것은 평등을 이루려는 투쟁”이라면서 “여성해방부대에 합류한 것은 처음 맛본 자유”라고 털어놓았다.

 위의 쿠르드 여전사의 인터뷰를 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미투운동의 물결 이후 가속화 된 여권신장운동과 쿠르드 여성들이 자진해서 전쟁터로 뛰어드는 현상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쿠르드 여전사들이 전쟁터에서 히잡을 벗고 총을 든 것처럼 한국에서 여성경찰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나는 큰 걸음을 뗀 순간입니다.

 한국의 여성경찰은 경찰의 당면 업무를 하나씩 배워나가며 이를 책임 있게 잘 수행해내는 과정을 통해 저절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제 사회 규범에 의해 양육되었을지라도 경찰 제복을 입게 되면서 새롭게 재사회화의 과정을 겪는 셈이지요.

 그런데 얼마 전 저희 내부망으로 전달된 전체 메시지를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4월 한 달에만 전국에서 접수된 경찰 내 성희롱, 성폭력사건의 수가 두 자리 수 였기 때문입니다. 성범죄가 보통 암수범죄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더 많은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고 말입니다.

 그동안 경찰 조직 내에서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소수 미꾸라지들의 소행"이라고 일축했던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교사 등을 포함한 공무원 전체의 발생 통계를 따져보면 경찰관에 의한 성비위 사건은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이라는 통계까지 인용하면서요. 그리고 오늘 5월 13일, 전주지법 제11형사부(부장판사 강동원)는 여성경찰관을 성폭행하고 성관계를 암시하는 촬영물을 찍어 동료인 남성경찰관들과 돌려본 혐의로 기소된 A에게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습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재판부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피해 여성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 생각하지 않고 범행을 저질렀다”며 “범행으로 인해 피해자는 수치심과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며 앞으로도 정상적인 근무를 어렵게 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습니다.

 징역 5년을 구형했던 검찰은 "피해자가 강간당한 이후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노력한 것은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소문이 날 경우 자신에게 닥칠 모진 현실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성범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수치심’ 입니다.
 여러 범죄 유형 중, 피해자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는 ‘성범죄’ 이외에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성인들 사이에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폭행사건의 경우, 대체로 남성 대 남성의 구도에서 발생하고 있고, 피해를 입은 쪽이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숨기려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남성 대 여성 구도에서 대표적인 범죄 유형인 ‘성범죄’의 경우, 여성 피해자들은 대체로 피해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의 여성경찰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해자들은 종종 피해를 알리지 않고 숨기며 심지어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고 노력하는데다 불특정 다수에 의한 ‘소문’까지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수치심’이 그들의 마음속에 크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입을 떼기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2019년 10월, 노래방 안에서 만삭 여경에게 노래를 강요하고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하였다는 혐의로 A총경이 직위 해제되었다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그때 그 여경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임신까지 한 몸으로, 그런 분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 자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상황인 것 같습니다.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나 그 노래방 안이나 둘 다 야만스럽기는 마찬가지 아닌지요?

 "적(Is)뿐 아니라 가부장제와도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던 쿠르드 여전사와 한국 여성경찰이 만난다면 서로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