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젊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젊은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아현(인권연대 연구원),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서동기(대학생),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송채경화(한겨레21 기자),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농부), 이회림(○○경찰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어떤 영화가 장애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가?(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0-31 18:03
조회
63


-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 장애인 문제를 다룬 영화? 장애인이 만드는 영화......  -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중략)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 1984.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중에서 소리의 뼈.)


우리에게 지금까지 보여진 것들·····


 왜 장애코드이고 장애인 캐릭터인가?


 ‘문화’는 타일러(Tylor, 1871. 1. 1)가 정의하듯, 한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생활양식의 총체(a whole way of life)로써 지식·신앙·예술·도덕·법·관습 그리고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과 습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전체다. 뒤집어 말하면 어느 특정한 집단의 능력과 습성, 즉 그 존재성을 구별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실천’ 및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대의 영향 있는 문화 ‘매체’다. (ex. 도가니 2011, 감독 황동혁)’에서 목격하듯이. 또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다. 수많은 지역에서 진행되는 장애인 영화제와 제작되고 있는 장애인 영화들 다큐멘터리 등등에서. (ex. 글러브 2011, 감독 강우석). 그렇게 영화는 문화의 산물이자 문화의 ‘도구’이다. 또한 산업이기도 해서 소비되고 소모된다. 산물이자 도구이며 산업이기 때문에 영화의 구성요소와 코드들과 기호들은 서로 관계가 있고 서사적이며 권력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극장의 우상’ 효과와 ‘동굴의 우상’ 효과를 함께 일으킨다. 우리는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를 영화관에 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성찰하거나 피드백하기 어렵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영화가 전해주는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및 관점을 보고 따라가고 몰입하고 감동한다. 영화의 막강한 힘은 매체로서의 파급력(필름 복사를 통해 전 인류가 동시간대에 볼 수 있다)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사람들의 물리적 공간을 재배열하고 일상생활의 많은 활동들과 장소들을 시간적으로 재조직하면서 우리 사회의 관계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문화로서의 영화는 기존의 생각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새로운 가치를 일깨워 주기도 하지만, 왜곡된 가치관이나 잘못된 관점을 부여하기도 한다.1)


 영화는 진실을 만들고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본의든 아니든 간에 진실을 숨기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속 캐릭터로서의 장애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대부분의 장애인 영화 - (여기서 ‘장애인 영화’는 공식 용어가 아니다. 장애인 영화가 여성 영화나 페미니즘 영화나 퀴어 영화처럼 정체성을 가지고 장르화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 -가 ‘장애인의 것’과 ‘비장애인들의 것’을 확연히 다른 것처럼 억지로 나누고, 다시 그것을 서로 비교하여 충돌시키면서, 그 관계를 긍정적으로 재통합시키지 못하고 되레 왜곡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절대 다수의 비장애인 관객은 장애인이라는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를 영화라는 거대한 매체를 통해 우선 접촉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영화에서의 장애 코드는 이야기의 논리성과 상상력을 완결하기 위해서 표현되는 장애를 가진 인간 캐릭터의 ‘완성’이나 ‘발견’이 아니라 인간 캐릭터의 왜곡과 두려움, 상징이 주된 목적이었다. 장애 코드를 영화 기호화 하는 것은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등장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대상화 되었고 그들의 장애는 커밍아웃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아웃팅 되어왔다. 또한 장애 자체나 장애인이란 캐릭터가 영화라는 것과 직접적으로 긴장 관계를 가진 것은 한국 영화에서는 얼마되지 않았다. 한국 영화에서의 장애코드나 장애인의 등장은 주로 문학과 텍스트영역에서 변용되고 각색되고 재구성되어왔다. (ex. 소설 <백치 아다다> - 1935년 5월 조선문단에 발표한 계용묵의 단편소설이 1956년과 1987년 두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 졌다. 1956년은 이강석 감독에 의해 ‘백치 아다다’, 1987년엔 임권택 감독에 의해 ‘아다다’라는 이름으로 개봉됐으나 영화적으로 재창작되는, 즉 패러디되거나 풍자됐다고는 보기 어렵다. )



우리나라 영화 중에 ‘만종’(An Evening Bell, 1970)이란 영화가 있다. 한국 영화중 최초로 수화가 비중있게 나오면서
농아인 연인들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둘 사이에 결합을 방해하는 것으로 한 의사가 ‘장애가 유전된다’는 잘못된 정보를 활용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영화가 수화를 사용하는 남녀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의미이외에도 그 시대의 장애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런 흐름이 90년대까지 이어 오다가 2000년 초 각종 인권영화와 여성 영화 및 퀴어 영화들의 등장으로 장애 코드와 장애인 캐릭터는 본격적으로 영화 자체와 긴장 관계를 가진다. (ex. 오아시스 2002. 감독 이창동.) 영화 ‘오아시스’의 등장은 영화에서 장애코드와 장애인 캐릭터의 본격적인 논쟁의 시작이었다. 영화 기호로서의 장애여성에 대한 묘사, 이야기, 비장애인 주연 배우가 장애 연기를 하는 것에서 촉발된 장애인 당사자 배우 등장에 대한 논쟁 등이 그것이다. 장애인을 연기했고 장애인 문제를 다루었던 것이 장애인 영화냐 아니냐 하는 장르적 토론까지 영화적 담론을 뜨겁게 끌어냈던 영화였다. 아마도 감독이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영화 기호로서의 장애와 영화 주제로서의 장애인 또는 장애 코드 등등. 즉, 어떤 주제를 그 영화에서 잘 형상화 해내기 위해 장애인이 그려졌는가? 아니면 장애인을 형상화한 영화인가? 하는 문제의식이었다. 2)


 그리고 이런 영화를 시대 흐름에 따라서도 분석하고 분류했다면 글쓴이가 드러내고 싶은 주제의식이 –고정 관념의 변주와 확장에 따른 장애인 캐릭터의 변화- 이  더욱 분명해 질 수 있겠다.
  
 매체는 문화적 경험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메시지를 그 매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위협받게 되는 문화적 경험을 결정한다.


 이는 비장애인에게나 장애인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과거에 영화를 통해 드러난 장애 코드는 장애인에게는 자기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심어 주고 비장애인에게는 장애인들은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무조건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 그리고 우리들은 은연중에 삶의 방식을 강요받게 된다. 장애인을 약하거나 나쁘게 혹은 왜곡되게 그리는 영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다양하게 그리는 영화가 없다는 사실을 비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미 짜여진 의식이나 틀에 의해 만들어진 장르로서의 장애인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파괴되어야 한다. 장애 코드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가 보아야 할 것들······.


 “청각장애라는 것은 장애(handicap)가 아니다. 이것은 문화이고,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청각장애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만약 의학이 발달해 내 청력을 돌아오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내가 죽을 때까지...”   미식축구선수 영화배우청각 장애인 존 림니즈
청각장애는 또 다른 문화다. (The Deaf Celebration of Separate Culture)


 나의 개성, 나의 장애, 나의 영화. 우리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 적어도 납득할 만한 규정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용어들을 아주 쉽게 사용하곤 한다. 일상에서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소통이 되지만 사실은 분명치 않은 용어 말이다. 그런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영화 언어’이다. 앞으로 규정해야 할 대상이 그 규정 전에 전제되는 논리의 오류가 발생한다. 장애가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도 할 수 없으면서 영화에서 장애 코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인이 등장하는 (비장애인이 등장하는 또는 장애인이 직접 연기하는) 것이 장애 코드인가? 장애인 문제를 다루면 그게 영화에서 말하는 장애 코드인가? 장애인 감독이 연출하고 영화에서 장애인들이 직접 자문을 해주면 장애 코드가 충실히 반영된 영화인가?


 장애인의 문화 행위와 문화 실천이 ‘문화’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먼저 ‘장애(Disability)’ 자체가 문화적으로 가치 있어야 한다. ‘장애(Disability)’가 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다면 ‘장애인’ 역시 문화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고, 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 ‘장애(Disability)’ 상태의 사람들이 생산하고 누리고 즐기는 문화 역시 사회적인 힘과 영향을 지닌 문명으로서의 ‘장애인 문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꼭 항상 긍정적일 필요도 없고 좋을 필요도 없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있는 그대로 영화에 나오면 그만이다. 장애가 흡연보다 나쁘지는 않으니까. 3)


 ‘장애’가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치 있음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장애’ 자체가 문화적으로 가치 있다고 믿고 신념으로 확인해야 우리들에게 그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장애’가 가진 소수성을 창조하고 획득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소수성을 창조하고 획득하고 확인 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에서의 장애 코드는 완성될 것이다. 


 tvN 드라마 ‘마이 디어 프렌즈’처럼, 주인공이 3년 전에 사고 당했다는 설정을 고려하면 오히려 사실적이다.
 
 미국 영화 ‘SuperHero Movie (2008, 한국제목:잠자리맨)’를 보면 유명한 장애인 과학자 ‘스티븐 호킹’이 온갖 비속어를 내뱉으며 자기비하를 일삼아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패러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메디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장면이나 대사가 가끔 등장하면 미국에 비해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물의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 미국 영화의 개봉 이후 호킹 박사나 장애인 단체 등이 문제제기를 하거나 소송을 했다는 소식은 찾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외국의 경우 개그의 소재로 장애인이 등장해도 별문제가 없는 것은 아마도 누가 보더라도 장애인 당사자라고 인식할 수 있는 캐릭터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면을 폭로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은 아닐까?


 논의를 막는 도구로써 문화는 장애인 개인이나 집단의 개별성으로 도드라지는 문화가 아니라,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의 주류 문화에 용해되어 자신들의 장애를 ‘극복’하거나, 불굴의 의지로 인간 승리를 하거나,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것으로써 ‘장애’를 사회화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끊임없이 중요한 주제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치의 이용가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애인과 그의 장애가 뭔가 멋있고 강력하고 폼나는 것으로 표상된다면(피터팬의 후크선장처럼), 장애가 손해나 패배로 작용하지 않는다면(미국 드리마의 명탐정 뭉크처럼), 그런 문화실천과 행위로 문화를 생산할 수 있다면, 장애인의 문화 그 자체가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주고 그들에게 자부심의 권능을 심어주고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발산하게 될 것이다(미국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의 절단 장애 소년 주인공과 투슬리스 용처럼). 자신의 장애가 인생의 멍에나 고통이 아니라 뛰어난 문화 콘텐츠 아이콘으로 변환된다면, 장애인의 장애를 기적과 구원의 대상이 아닌 향유하고 즐겨야 할 예술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그 문화를 닮게 할 수 있다면 장애인 문화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시청률 1, 2위를 달렸던 미국 드라마 ‘Glee’를 보면 실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소녀가 고등학교 치어리더로 등장하면서 극의 진행을 이끌고 있으며, 유명한 ‘C.S.I’에서는 시즌별로 약 2편씩 발달장애인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폐인의 관점에서 미국의 동물학자를 다룬 영화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도 개봉했다. 그 실존 주인공은 정보 공유 강연 사이트(Ted)에 나와 15분 동안 ‘우리 사회는 왜 자폐를 필요로 하는가’란 제목으로 대중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미국 제작자들은 반드시 제작 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을 참여시킨다. 이는 장애인 당사자들을 실제로 주연 배우로 등장시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그들의 삶을 세밀하고 일상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극으로서의 재미도 떨어지지만, 장애인 당사자에게 당장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고소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코미디 소재나 풍자의 소재로 발달장애인이 희화화된다 하더라도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 스스로 그것에 대한 방어권을 행사할 기회가 많을 뿐 아니라 희화화한 것 외에도 장애인을 멋있고 능력 있게 그려낸 다른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처럼, 영화 아이언맨처럼. 그리고 아카데미 최연소 최초 여우주연상을 받은 농아인 배우 말리 매틀린(Marlee Matlin) 4)처럼.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1947년)은, 보스턴 출신 미국의 동물학자이다. 비학대적인 가축시설의 설계자이며, 콜로라도 주립대학 준교수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좋은 지도자를 만난 덕분에 1960년대에는 뉴햄프셔 주 린지에 있는 기숙학교 햄프셔 컨트리 스쿨에 들어가 1970년에 프랭클린 피어스 컬리지에서 심리학 학사, 1975년에는 애리조나 주립대학 에서 동물학 석사, 1989년에 일리노이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0년 그녀의 이름을 딴 극 영화가 제작되어 2011년 1월 미국 LA서 열린 제17회 미국배우조합상(SAG)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장애인당사자가 주인공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도 이영화가 당사자의 관점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근자에 와서야 1960년대 바보 캐릭터 ‘영구’가 만든 발달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를 ‘내 마음이 들리니’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겨우 넘을 수 있었고, 영화 ‘도가니’를 통해 장애인의 현실을 ‘착한 일’, ‘좋은 일’로, 도덕적 면죄부에서 벗어나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제야 시각 장애인을 그릴 때는 시각 장애인에게 물어보고 청각 장애인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들을 참여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제쯤 장애인 배우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 자아를 찾아가는 올바른 길임을 강조하고, 굳이 장애코드를 드러내지 않고 장애인을 등장시키며 네 장애는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재미있게 설득하는 ‘X-man’이나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본질을 통찰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익숙해지자는 류 감독의 장애인 캐릭터 상의 시도는 중요한 출발이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학에서 예능으로, 그리고 사진 영역으로까지 넓혀보자. 그래서 장애인을 문화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창조해보자. 물론 이를 위해서 장애인들의 영화적 창작 활동이 적극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고 기존 영화마당에도 장애인 당사자들이 더욱 많이 뛰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메가폰을 들고, 카메라를 들고, 조명판을 들고, 시나리오를 들고서. 특히 보다 많은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이, 정신 장애인들이, 희귀 장애인들이.     

「당신의 편견에 도전하라. 아니면 그것들이 당신에게 도전할 것이다. -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 시즌 1기 4부 중에서」


1) 우리가 문둥병이라고 잘못 부르는 한센병은 현대에 와서 의학적으로는 단순 전염성 피부병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전히 ‘문둥이’란 단어는 그 어떤 모욕어나 차별어보다 그 힘이 강하다. 문둥병이란 호칭은 단지 당사자에 대한 차별을 넘어 아직까지도 자식들이 파혼까지 당할 수 있는 세대간 차별이나 전지구적인 모욕을 야기한다. 오죽했으면 지난 1월 일본의 유엔 친선 대사가 "폐기된 용어를 차별적 의미로 사용"한다고 개탄하면서 "문둥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촉구하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결의문까지 발표했을까? 한센병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사회화 시키는 가장 강한 무기 중 하나가 ‘영화 벤허’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아직 그것을 뒤집을 만한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2) 전자의 대표적 예인 찰리 채플린의 <City Lights>에 나오는 시각 장애인인 꽃 파는 소녀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영화적 형상화를 거친 언어일 뿐이었다. 채플린은 시각 장애를 가진 소녀가 어떻게 해서 룸펜을 재벌이라고 여기게 되는가를 형상화 해내야 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교통이 매우 혼잡한 곳을 오락가락하다가 모퉁이에 주차해 있는 리무진의 한쪽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른 쪽 문으로 나오는 방법을 썼다. 눈먼 소녀는 무거운 차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는 ‘재벌’이 값비싼 차에서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예로는 1995년 베니스 영화제 은곰상 수상한 팀로스의 비열한 거리 (1994)에 나오는 장애인 폭력배, 우리나라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심혜진이 밑은 정신 장애인, <고래 사냥>에서 이혜숙이 분한 실어증 언어 장애인등이 있다.


3)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주연 배우가 여장남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는 대사를 변용했다.


4) 1986년 《작은 신의 아이들》로 영화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데뷔작을 통해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을 만들어 놓고 있다. 하나는 현재까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유일한 장애인 연기자라는 기록이며, 또한 그가 수상했던 여우주연상은 해당 부문의 역대 최연소로 기록되고 있다(수상 당시 21세 218일).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