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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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아현(인권연대 연구원),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서동기(대학생),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송채경화(한겨레21 기자),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농부), 이회림(○○경찰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친절과 애정으로 구원한 사람들 ‘청춘’을 인권으로 완성하다 2 (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6-05 10:48
조회
198


밥도, 식판도, 필기도 다 우리에겐 인권이었다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민주 광장에 모였다 하면 일만 명이 족히 되었던 한총련 그들, 저들, 저들 중 백 명만 있으면, 아니 50명만 있으면 당장 경사로를 만들 수 있는데, 당장 점자책이라도 구비할 텐데. 수화 통역을 부를 수 있을 텐데... 저들은 일만 명이나 모였다면서 힘없이 경찰에 걸려 내가 탈출시켜야 하는 걸까?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와 주장은 참 궁금했지만 언제나 나를 만날 때마다 그들은 밥을 챙겨 주었고 내 식판을 제일 먼저 들어 주었고 늘 강의 노트를 빌려 주었다.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 때는 밥이 ‘인권’이었고 식판 들어주는 사람이 ‘인권’이었고 강의노트를 빌려 주는 사람이 ‘인권’이었다. 그들은 통일을 위해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그래도 나에게 그런 선배들 밖에 없었다. 


 대학입학 때부터 유난히 나를 챙겨주고 신경써준 과선배가 있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하얀 얼굴이었고 하얗다 못해 창백했었고 목소리는 자주 쉬고 갈라졌으며 자주 세브란스에 입원했다. 어느 날 어디가 아파 세브란스를 다니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문이라서 병원비가 싸다고.


 그는 과에서 '천재'소리를 들었고 국문과면서도 특이하게 독일어를 잘했다. 제 2 외국어 독일어 수업을 버거워 하는 나에게 그는 병원복을 입은 채로 슬리퍼를 끌며 나에게 몇 시간이고 문과대 안터 나무의자에 앉아 공짜 과외를 해 주곤 했다. 그렇게 1학년 첫 학기 제 2 외국어 수업을 마치기도 전에 그 형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곧 병원갈 일이 없을 거라던 형은 원래 백혈병을 앓고 있었고 함께 세브란스 검진 가자던 약속을 뒤로 하고 급성으로 악화되어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다. 이상하게 최루탄으로 눈물이 날 때마다 그 형의 새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자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96년 여름방학 때는 학생회관 3층 적십자회 동아리방에서 한총련 집회가 끝날 무렵 별로 친하지도 않은 과선배 한명이 동아리방을 지나치며 나를 불렀다. 학교 서문 근처 기찻길 옆 옥탑 자취방에 가자고 했다. 동아리방에 쌓아둔 짐을 싸들고 오란다. 방학 때 목발을 사용하는 나를 받아주는 하숙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형은 학원 강사를 오래 했는데 밤이 되면 오래된 프라이드를 몰고 나를 여의도 등지로 드라이브 시켜 주었다. 그리고 늘 이야기 했다. 건강하라고, 끼니를 챙기라고.,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이번에는 이름을 기억했다. 김. 겸. 손. 언젠가 잘 되면 한우 갈비에 도가니 특으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런데 20여 년 지난 지금도 저녁을 사드리지 못했다.



사진 출처 - dreamstime.com


종합관 5층에서의 결의, 종합관 결의, 장애인인권동아리 게르니카의 탄생.


 기숙사에서 문과대를 거쳐 종합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고 아침 9시 1교시 수업에 지각하기 일쑤였다. 1학년 여름이 오기 전 어느 늦은 봄날 그 가파른 길을 목발로 쇳소리를 내며 가고 있는데 내 뒤로 95학번 동기 여학생이 따라 올라왔다. 종합관 3층 전공 선택 과목 수업 교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나를 앞질러 가지 않았다. 보통은 다들 앞서 지나 가는데 의아했다. 교실에 와서 뒤돌아보니 그녀가 훌쩍이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렀다. 왜 우냐고 물었다. 그녀는 언덕길을 오르는 내 뒷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슬퍼서 울었다고 했다. 내 뒷모습을 끝까지 보며  울어주는 여인은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몇 년 뒤 그녀는 결혼하고 외국으로 간다며, 나에게 청첩장을 주면서 밥을 샀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지만 그때는, 그리고 지금도 그 인사와 그 밥의 의미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사준 그 밥은 지금도 늘 마음의 굶주림을 사라지게 해준다. 그녀의 이름은 남. 유. 정.


 그렇게 전방부대 군대생활 같은 대학 새내기 생활이 끝날 무렵 같은 과의 휠체어를 사용하는 친구가 63빌딩 꼭대기가 내다보이는 캠퍼스 건물 꼭대기로 조용히 날 불렀다. 그는 세무 공무원을 아버지로 둔, 언뜻 보기에는 부르주아적 장애인이었다. 아침마다 기숙사로 와서 자기 차로 기숙사까지 나를 날라다 주곤 했었다. 그는 더 이상 대학 생활을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만 가지고는 버틸 수 없다며 우리들만의 목소리를 내야하지 않겠느냐 했다. 왜 그는 가난한 날 붙잡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까? 당시에 나는 대학 내에 장애인 시설로 자원봉사 가는 중앙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동아리 사람들은 한 달 내내 동아리방에서 기타치고 놀고 술마시면서 한달에 한 번 겨우 재활원에 가서 한 두시간 봉사하고 오는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도서관을 못 들어가고, 승강기가 가지 않는 강의실은 수강신청 조차 하지 못하고, 화장실 대신 오줌통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장애인 학생에 대해서는 때때로 개인적으로 도와주기만 할뿐 그들을 위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구해서 활동보조를 쓰고 있던 그와의 회합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우리끼리 만나고 모이는 동아리를 만들어 보자고 결의하였다. 이른바, ‘종합관 결의’, 95년도에 시행된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장애인 대학생들이 장애인 인권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전국 최초의 동아리였다.  


 얼떨결에 ‘결의’는 했는데 이름이 없었다. 사랑이니 봉사니 이런 낱말이 붙는 이름은 싫었다. 손발이 오그라들 뿐 아니라 사랑이니 봉사니 하는 것들은 일시적이고 미봉책일뿐 우리들에게 필요한 간단한 경사로 하나도 만들어 주지 못했다. 식판과 휠체어를 옮겨 주던 친구들은 군대로 가버리고 졸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에게 이름은 중요했다. 전동 휠체어와 목발을 쓰는 장애인 두 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동아리의 활동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름 하나로 고심하며, 등록금 삼백만원 넘게 내는 대학 캠퍼스의 휠체어와 목발이 만나 변변히 회의 할 곳도 찾지 못해 친구 집에서 회의를 해야만 했다. 우리의 애잔한 모습을 보고 있던 미술을 전공했던 친구 동생이 보다 못해 한 가지 이름을 제안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이건 뭐지? 우리가 미술 동아리인가?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할 건데 웬 그림이름? 도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숨겨진 심오한 뜻과 의미가 있는가? 진실을 이야기 하자면 이름을 붙일 때는 아무런 의미도 연관성도 부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 조직의 이름을 듣고 수많은 질문을 해왔고 그 질문을 통해 우리의 존재는 각인되었다. 홍보면에서 대성공이었다. 게르니카가 5.18 광주와 같이 스페인 내전의 학살과 인권의 역사를 담은 작품임을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동성애 운동과 여성 운동을 만나다.


 이름도 지었으니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야 했으나 우리는 막막하기만 했다. 같은 해에 입학한 12명의 장애인 학생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활동에 아니,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못해 강렬히 거부했다. 단 한 명, 지금 광진구 구의원 후보로 나온, 풍물패를 하고 있던 김주현씨 만이 우리의 결의에 동참했다. 그리고 교육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수화를 쓰던 농아인 선배. 정. 희. 찬 그가 대학에서 제일 먼저 같은 장애인이 와서 반가워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대견해하거나 안쓰러워하지 않고 그는 몇 번이고 격하게 포옹해 주었다. 내가 수화를 잘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다수의 비장애인들이 우리들의 존재에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가장 뜨거운 사람들은 대학 최초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동성애 인권동아리 ‘컴투게더’와 총여학생회 사람들이었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한창 천막 농성을 진행하던 컴투게더 사람들은 우리에게 농성하던 자리와 천막을 남겨 주었다. 장애가 없지만 우리와 거의 같은 현상으로 차별 받고 억압당하고 배제당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학 오기 전까지 동성애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이성애자였지만 그들은 우리의 경호원이었고 활동 보조인이었고 대변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차별과 혐오를 벗겨내고 이겨내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스스로 멋지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멋진 장애인, 좋은 장애인이 되는 것이라고, 내가 만난 멋진 게이 형들이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장애인 두 명이 학생회관 아래에 서명판을 벌였지만, 경험도 없고 조직도 없는 우리들은 막막했고 서명 책상은 휑하기만 했다. 그렇게 뙤약볕 아래에서 고래고래 2~3시간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학생회관 3층에서 한 무리의 여성들이 무엇을 잔뜩 들고 내려왔다. 그들은 여학생회에서 나왔다면서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우리 책상을 온갖 자보와 색상지로 꾸며 주면서 엄청난 김밥과 음료수를 안겨 주었다.


 그들을 미리 만나거나 우리의 서명운동을 설명한 적이 없는데도 여학생회 사람들이 들고 온 색상지에는 이미 우리의 요구 사항들이 다 적혀 있었다. 그들은 3층에서 우리가 외치는 것을 다 듣고 정리했던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일주일 동안 우리의 식사와 간식과 서명 자보를 챙겨 주었고 동아리방이 없던 우리에게 총여학생회 한켠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