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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校씨 , 장애인은 어디로 가나이까? : 통합이 교육을 만드는가? 교육이 통합을 만드는가? (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2-13 17:03
조회
290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 이 원고는 월간 서울교육 11월에 기고한 원고를 대폭 수정 보완한 원고입니다.


「'진실은 발을 차갑게 하는 이불 같은 것입니다. 잡아당겨도 늘어트려도 이불은 부족합니다.
무슨 수를 써 봐도 이불을 우릴 전부 덮어주지 못합니다. 울면서 태어난 날부터 죽음으로 떠나는 날까지 울고 절규하고 신음하는 우리의 얼굴만을 덮을 겁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올해 들어, 1977년 12월16일 특수교육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40년 동안 누구도 하지 못한 특수학교의 사회적 인식이, 국회 위원이 무릎을 꿇은 장애인 학부모를 외면한 사건으로 변화되었다. 이 사건은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특수학교’를 짓게 하라는 담화문까지 발표케 했다. 집 근처 좋은 시설의 특수학교를 열망하는 일부 학부모들은 환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애인 학생의 통합 교육의 정책 방향이 후퇴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특수학교냐 특수학급이냐 라는 논란은 현재의 돌발적인 여론과 정책 흐름의 본질이 아니다. 통합 교육이라는 가치가 사회 통합과 차별 금지에 있다면 그 가치는 공간의 특성이나 학교의 종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진대, 유독 장애인 학생에게만 그것이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과도한 일반화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교육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왜 이런 현상과 결과가 나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학교는 학생을 가리지 않습니다.”
학교가 문제일까요? 사람이 문제일까요?


 글쓴이는 뇌병변 장애가 있다. 부산에서 12년 동안 특수학급은커녕 장애인 화장실, 경사로도 없는 일반학교를 다녔다. (입학하고 나서 좌변기를 화장실을 설치해 주었다.) 당시에는 교육청에서 취학 통지서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고 당시 두 곳 밖에 없던 특수학교는 대기자만 수십 명이었으며 열 곳 넘는 일반 공립학교는 ‘위험하기에 나를 위해서’ 입학을 거부했다. 5살 때부터 입학가능한 학교를 찾아 전국을 헤메였으나 입학을 허락하는(?) 학교들은 부모와 떨어져 시설 입소를 해야 하는 곳들뿐이었다.(장애인학생이 법적으로 완전히 의무교육대상자가 된 것은 1995년이다.)


 결국 이미 지적 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 학생을 두 명이나 받았던 부산의 사립학교에 혹시나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서 입학 허가를 문의했다. 수화기 너머 얼굴도 모르는 입학 담당 교사는 딱 한마디만 했다. “학교는 학생을 가리지 않습니다.” 추첨으로만 학생을 뽑던 명문 초등학교였던 그 학교 교장은 필자를 위해 비장애인 학생 6명에게 일부러 불합격 제비를 뽑도록 제비뽑기를 조작하기까지 하셨다. 1981년의 일이다.


 결국 취학통지서는 부모님께서 장학사에게 헌법 제31조 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를 들고 가서 직접 받아왔다. 개인적으로는 단 며칠 만에 취학통지서를 준 그 장학사가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데 크게 기여 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 그 어떤 특수교사도 만날 수 없었고 지원인력도 없었지만 하교길에 데리러 올 부모를 기다리던 나에게 라면을 끓여 주시고 가끔 바지에 실수라도 할 때면 손수 씻겨 주시던 학교 수위 ‘이또범’ 선생님이 계셨다.


 사춘기가 불타는 중학교 때 자잘한 학교 폭력과 놀림에서 벗어나고 싶어 청산가리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붙잡아 준 것은 학교 현장에서 만나기 힘든 중한 장애를 가진 학생을 만나서 너무 좋다면서 두 번이나 담임을 맡았던 초등 때 스승님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손이 불편해도 컴퓨터로 얼마든지 글 쓰는 작가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국어 선생님도 계셨다. 드물지만 가끔 나의 장애를 매력있다고, 목발이 섹시하다고 격려해주는 비장애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놀리는 학생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서관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다”


 특수학교를 늘리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정규 특수교사를 늘려야 할 자리에, 1년이면 떠나야 하는 비정규직 자리와 특수교육 지원인력만 늘렸다 학부모에게 특수교육대상자로 선정되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한 권리라는 것을 알려주기보다 낙인과 혐오, 그리고 차별로 스며드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특수학급 신설이나 장애인 학생 입학을 거부하는 교장이 없었다면, 동네 학교의 특수학급이 중증 장애인 학생의 통합 교육에 기여했다면, 교육청을 포함한 지역 사회가 수화 통역사와 점역 지원을 제공하고 편의시설 전문가를 각 학교에 지원 해주었다면 부모가 다시 특수학교를 요구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지역 주민이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학교에 시설 좋은 특수학급을 요구하고 특수교사의 전문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라고 요구했다면,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장애인학생 옆에 앉겠다고 자처했더라면, 졸업 이후에 지역사회에서 그들을 적극 고용하고 이웃 주민으로 초청했더라면, 그들이 원하는 한방병원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진 출처 - 필자


 반대로 교장이 편의시설이나 특수학급을 만들 수 없으니 특수학교로 가시라는, 선의로 은폐한 차별과 모욕을 하지 않도록 각 교육청의 교육감과 특수교육지원센터가 교육과 징계를 강화했다면, 특수교육계가 학벌과 파벌로 얽혀서 특수학교 자리를 나눠먹기를 하지 않았다면, 특수학교가 지역에 완전 개방되고 민주적이어서 장애유형이나 정도를 가려서 선발하지 않고, 특수학교를 다녀도 장애인 학생들이 자기 동네에서 원하는 만큼 비장애인 친구를 사귀고 함께 활동할 수 있다면, 특수교사를 보면서 장애인 학생 스스로 장애인임을 자부할 수 있다면, 비장애인 학생과 부모가 당신들을 보면서 장애인을 낳아도, 장애인 등록을 해도, 특수교육대상자가 되어도 괜찮구나 하는 믿음을 얻는다면, 부모들이 명절 때마다 친인척들에게 특수학교 학생증을 당당히 내보이고 특수학교 졸업식에 초대할 수 있다면, 많은 장애인 당사자와 인권 활동가들이 작금의 현상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교육과 교육 환경이 사회 통합과 교류와 존중을 향하고 있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각자의 한계와 모순을 성찰하고 개선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특수학급이든, 특수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홈스쿨이든 상관이 없다. 장애인 학생이 장애에 대해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가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교육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어떤 교육 기관이든 교육 환경이든 장애인 학생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개별 서비스와 교육, 통합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떤 교육이든 어떤 기관이든 그것이 ‘통합’에 기여하고 ‘사회화’와 ‘다양성’에 충실하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국가와 학교는 장애인 학생에게 최선의 교육 환경을 제공하려고 최선을 다했는가?
 
 장애인 부모 당신들이 시선이 싫어서 놀림이 싫어서 특수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학생 당사자들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고 선택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을 주고 있는가? 적어도 비장애인 학생들은 학교가 맘에 안 들면 전학을 가거나 유학을 가거나 자퇴라도 할 수 있다. 국가가 장애인 학생의 교육권을 위해 고등학교까지 마음대로 자퇴조차 할 수 없도록 했다면 적어도 특수학급이 특수학교 만큼의 서비스를 받고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정책 투자를 해야 한다. 특수학급에서 특수학교로 전학이 자유로운 만큼 그 반대도 그 만큼 자유로워야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특수학급의 교사가 장애인 학생을 특수학교로 배제하는 일, 너무 자주 일어나지 않는가?



사진 출처 - 필자


“헌법을 던져라”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는 부모의 마음은 이해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차별과 상처를 내면화하고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존감이 무너져 가는 장애인 당사자들도 여기에 있다. 시선이 박히고 놀림을 받더라도 그냥 동네 비장애인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고 싶은 장애인 학생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특수학교가 있는데 왜 우리학교 오냐’라는 말을 ‘교사’로부터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중도에 어떤 이유로 장애가 생긴 학생은 적응할 시간도 없이 특수학교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부모들은 무릎을 꿇기보다는 웃으면서 헌법을 그 토론회 자리에서 당당하게 던져야 했다. 특수학교든 특수학급이든 뭐든 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국가의 의무이자 우리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전문가들과 특수교사들은 그들의 전문성이나 실력이 사회 변화나 인구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음을 성찰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그들의 당사자 주의, 자기의사 결정권, 정체성을 위해 교육계와 투쟁하지 못했다.   


 특수학교냐 특수학급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학교와 교육이 진행되는 곳은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습득하고 사회화 하는 곳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차별과 배제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얼마나 서로 존중하고 공존하는가 불편함을 익숙하게 견디는가가 관건이다.


 문제는 그 학급이 어떤 학급인가,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가일 것이며, 우리가 장애에 대하여 자긍심을 주며 선택권을 보장하는 학부모가 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며, 특수교사가 진정으로 통합교육의 가치와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전문가인가 아닌가 그것이 중요할 것이다. 국어 사전은 통합을, 1. 여러 요소들이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일. 2.인격의 구성 요소가 조화로운 구조를 이루는 일. 이라 정의 내리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장애인과 함께 특수학교에서 특수학급에서 이 정의를 어느만큼 실현했는가? 그리고 학교를 정할 때 부모들은 전문가들은 장애인 학생에게 의견을 묻고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하고 있는가?


   「교육의 목적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에 있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데 있다.」
 (삐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