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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만의 진실, 유서대필 사건 - 전종휘/ 한겨레 기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5:22
조회
420


전종휘/ 한겨레 기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날, 1991년 4월 26일.
당시 학내 영자신문사 수습기자였던 내게 그날 저녁 신문사 선배가 황급히 다가오더니 어디를 함께 가자고 했다. “어딜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게 선배는 “대학생이 시위하다 경찰한테 맞아 죽었다”며 내 손을 이끌었다.

신촌 역에 정차한 지하철 차량의 문이 열리자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밀고 들어왔다.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에 시위가 하루도 끊이지 않을 때였다. 사과탄, 지랄탄은 민주화 시위의 동반자였다. 전투경찰의 눈을 피해 담을 넘어 연세대로 들어갔다.

시위하다 경찰에 쫓기던 중 담을 넘다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고 숨을 거둔 이는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생 강경대였다. 그는 나와 같은 91학번이었다. 세브란스 영안실 앞은 마스크를 쓰고 쇠파이프로 무장한 전대협 사수대가 지키고 있었다. 학생 기자의 출입도 통제됐다. 그 직후 일이긴 하지만, 투옥 중이던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숨지자 경찰이 병원 영안실 벽에 구멍을 내고 시신을 탈취해갈 정도로 국가폭력이 극에 이르던 게 당시 시국이었다. 국가는 있되 국민은 없고, 명분 없는 폭력이 정의를 목 조르고 있었다.

이 때를 안팎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유서를 남기거나 구호를 외치며 스스로의 몸에 시너 혹은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댕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분신 정국은 음산함 그 자체였다. 전국의 대학가마다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듯했다.

불의한 시대를 참고 견디기에는 젊음이 너무 뜨거웠던 게다. 후일 죽음으로 운동의 뜻을 이루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론도 제기됐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몫은 스러져간 이들이 소망했던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5월 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전민련 김기설 사회부장의 분신 자살 사건도 그 때는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유서대필 사건’으로 몰아갔다. 같은 단체 동료 강기훈씨가 분신 정국을 조장함으로써 정권에 타격을 주기 위해 김씨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되레 죽음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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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김기설 씨의 유서이고 아래는 김기설 씨의 '전대협 노트'의 필족이다.
빨간색 선과 화살표가 동일한 필적임을 알려준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민주 세력은 “조작”이라며 반발했지만, 주도권은 “대필이 맞다”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손에 쥔 공안당국의 것이었다. 100여 전 드레퓌스 사건 때 에밀 졸라는 진실은 진군하게 마련이며 땅에 묻히더라도 언젠가는 폭발해 세상을 휩쓸 것이라고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진실은 땅에서 그냥 썪어버릴 것만 같았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마침내 16년 만에 그 진실을 끄집어냈다. 대필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처를 취하는 게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또 재심 등 상응한 조처를 취하라고 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국가는 어떤 방법으로든 강씨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지나간 세월 동안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한 개인이 겪었을 마음의 상처에 새 살이 돋을 순 없겠지만, 진심어린 사죄 없이 화해는 없다. 화해는,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작업이 있은 뒤에 오는 막차와도 같은 것이다.

사건 당시 부장검사였던 강신욱씨는 지난해 6월 퇴임하면서 이런 좋은 말을 남겼다. “검사도 법률가인 만큼 최선을 다 해도 의심스러울 때는 기소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16년 전 최선을 다했는데도 의심스런 부분이 없어서 강기훈씨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했을까? 오로지 법률가적 양심과 식견만이 사건 판단의 전부였을까?

설령 그렇더라도 오류가 드러난 지금에 와서 그의 양심은 0.1도 만큼의 온도 상승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건, 자신의 심장에서 고동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금의 정치 현실을 냉엄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는 사실 반신불수의 상태에 있다. 강제조사권도 없다. 사건 관계인을 불러서 안나오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게 전부다. 일반의 상식과는 달리, 조사 1국을 두고 독립투사들이 만주 벌판 말달리던 시절의 얘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진실을 파헤치고 화해를 주선하겠다는 건 또 뭔가.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렇게 된 건 17대 국회 초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법’이 국회를 통과하던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의 집요한 발목잡기 때문이다. 강경대를 때려죽이고 강기훈을 기소한 노태우 정권이 바로 민주정의당이었고, 그 당이 3당 야합하면서 민주자유당으로, 다시 신한국당으로, 지금의 한나라당으로 옷을 바꿔 입어 왔고, 그 한나라당은 과거사 정리에 여전히 딴지를 걸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특히 정치사회적으로 약자이자 피해자이면서도, 기억하지 않고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 역사는 한낱 도돌이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