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시원한 바람, 누군가에게는 칼바람이겠지요. -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6:14
조회
264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올 여름은 참 길었습니다. 몇 십 년만의 폭염을 쏟아 부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름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갈 듯 갈 듯 하면서도 좀처럼 발길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찾아와야 할 9월에도 창문을 열지 않으면 잠을 이루기가 곤욕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은 한반도의 기후가 정말로 바뀌긴 바뀌었나보다 라며 새삼스레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아! 물론 그렇더라도 사무실에서 에어컨을 켜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요.

그렇게 끈질기던 여름이 드디어 주춤합니다. 지난 주말 갑자기 찾아온 찬바람에 주섬주섬 긴팔들을 챙겨 입느라 부산했습니다. 미처 긴팔을 챙겨 입고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연신 코를 훌쩍거리기도 했지요. 이러다 또 더워지는 건 아닐까 하는 것도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말을 넘겼지만 날은 더욱 선선해지고 있으니까요. 전 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데, 오늘부터는 기숙사에 난방도 가동했습니다. 불과 지난주까지 덥다고 난리들이었는데 이제는 방이 춥다고 난리들이니 참 사람이 간사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습니다. 아침이면 선선한 날씨에 그간 느끼지 못했던 상쾌함도 느껴지고, 10월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걸맞은 날씨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하늘은 또 얼마나 푸르러졌는지요. 아마 서울 하늘도 못지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오후엔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시원해진 바람과 함께 벤치에 앉아 담배 맛을 즐겼답니다. 눈이 시리게 새파란 하늘로 담배연기를 올려 보내다가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문득 스물 예닐곱 시절이 생각나더군요.(아! 물론 제가 나이를 많이 먹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도 이맘 때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을과 바람과 하늘이 이끄는 대로 서점에 들어갔지요. 가을이라는데 뭐 손에 잡히는 책이 없을까 해서였습니다. 뒤적뒤적 책을 괴롭히다가 시집 한권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리곤 그 시집을 한참 읽다가는 무작정 청량리역으로 가서 춘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춘천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갈 곳을 정하지도 않았으니 그냥 무작정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릴 듯합니다. 제가 춘천을 가도록 했던 그 시집은 바로 정호승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인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였습니다. 지금은 그 시의 내용도 그 시집에 담긴 시들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절 가을의 손님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제목을 가진 시집이었는지요.

그래서, 그렇게 춘천을 가서 무얼 했느냐구요? 남춘천역에서 내려 커피 한 잔 마시고는 돌아왔습니다. 뭐 딱히 할 일이 있어야지요.
가을바람이 가을바람이기를

그렇게 한참동안 가을 날씨를 만끽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런 저를 맞은편에 걸린 현수막 하나가 빤히 내려다봅니다. “가을바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참 좋겠다”하는 심정으로 말이지요. 그 현수막에는 “OUT! 비정규직, OUT! 2MB”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현수막을 마주보고 서 있는데 제가 참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가을의 여유를 느끼는 사치를 누려서가 아닙니다. 하늘을 보며 감상에 젖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느끼는 이 시원한 바람이 누군가에게는 칼바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IE000960045_STD.jpg
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를 준비하던 지난 9월 9일 저녁 7시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촛불문화제'에서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노동과 세계(이기태)


초여름에 시작해 아직까지 목숨을 건 단식을 계속하고 있는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과 조합원들에게도 이 바람이 같은 의미이진 않겠지요. 김소연 분회장의 옆에 놓여있는 관보다 훨씬 을씨년스러운 고통일겁니다. 기어이 서울역 조명탑으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KTX·새마을 승무원들에게 이 바람은 뼛속까지 스미는 아림이겠지요. 끝이 보이지 않은 싸움에 가을을 넘어 겨울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는 코스콤, 이랜드, 하이텍알시디 노동자들, 그리고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수많은 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 그들에게 이 바람은 그저 또 다른 고통을 인내해야 함을 예감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한 주 전까지만 해도 때 아닌 더위를 괴로워하다가 금세 춥다고 난리인 것이 사람인데, 한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도 가슴은 늘 시베리아의 찬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더구나 온기라고는 제대로 느낄 수도 없는 곳에 몸을 뉘어야 하는 사정일진데요.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리겠지요. 이 상쾌함이 그들을 에이겠지요.

그뿐이겠습니까. 거리에서 겨울을 나야 하는 이들, 연탄 한 장이 아쉬운 빈곤 가구들, 연일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정부에 기가 차 상대적 박탈감만 늘어난 우리의 이웃들. 그들 모두에게 이 바람은 그저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시원한 바람만은 아니겠지요. 물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자 서글펐습니다. 자연이 주는 고마운 선물조차 그 이면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되새겨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생각에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가을바람은 그저 가을바람일 뿐인데, 왜 그것은 또 고통이어야 하는 것인지요. 더구나 그 현수막에 나란히 적혀있던 ‘2MB’라는 문구! 그 어느 때 보다도 잘 어울리는 두 문구입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자본과 그 자본을 위한 정권.

그래요. OUT되어야지요. 기필코 OUT되어야지요. 그래서 내년에는 이리도 좋은 가을바람을 그저 가을바람으로만 느낄 수 있어야지요. 칼바람은 이제 그들에게나 어울리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