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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턱 막히는 그 날의 기억 (장윤미)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8:10
조회
225

장윤미/ 국민대 학생



지워야 하는데 아직 지우지 못 하는 문자가 있다. 오늘 문득 문자를 뒤지다 지워지지 않은 그 문자를 발견했다. <쌍차정책부장부인자택아파트에서자살> 그 문자를 받던 순간의 답답함이 떠올라 마음이 콱 메었다.

7월 20일이었다. 그 날 하루는 이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 가지 집회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오전부터 말 그대로 듣보잡인 사람이 인권위원장 취임식을 하겠다고 국가인권위원회로 오고 있었고 순천향병원에서는 용산 사태 추모대회가 있었다. 인권은 모른다는 법학 교수의 말은 정치가 무슨 장난이냐는 생각에 사람들을 어이없게 했다. 또 용산 사태가 반 년째였다. 반년이 되어 잊지 말자는 것보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준비한 집회였다. 사람이 죽은 지 반년이 지났고 검찰에서는 수사기록을 공개하지도 않고 있다. 그래도 ‘공권력’과 충돌해서 ‘국민’이란 사람들이 죽었는데 대통령은 단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은 상태다. 억울해서 이대로는 장례지내지 못 하겠다는 유족들이 시체를 메고 밖으로 나오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래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같은 시각 평택에서는 정리해고 당한 쌍용차 직원들이 싸우고 있었고 그들을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는 공권력은 사정없이 최루탄을 날렸다. 스스로를 ‘죽은 자’로 칭하는 이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자였다. 더 이상 이들이 국민이 아니라면 공권력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진 못 해야 할진데 법의 바깥에 있는 자로 치부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한 공권력으로 탄압을 받고 있다.

나는 인권위원장 취임식 저지를 위해 인권위로 향했다. 건물 앞은 이미 경찰들이 빡빡하게 서서 문을 막고 있었다. 인권위원장 자격검증을 위한 공개질의서를 준비한 활동가들은 입구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 하고 있었다. 겁이 많은 인권위원장은 이미 경찰들을 불러 몇 뼘 되지도 않은 인권위 문을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 사실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휠체어 장애인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로마저 경찰들은 차단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약자의 편에 서는 가장 힘 센 기구가 인권위였는데, 그 인권위가 인권을 침해하는 사건이었다. 인권위 건물을 들어가지 못 하는 활동가들은 분통이 터졌고 다칠 걸 알면서도 방패로 돌진했다.

국가는 국민을 바보로 알고 기업은 모두 제 덕이라고 착각한다. 국가는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기준으로 국민과 국민 아닌 것을 나누고는, 국민 아닌 자들은 만만하게 생각한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국민 아닌 자’로 취급한다면 아예 공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국가에겐 없는데도 말이다. 기업은 어떤가. 경제가 발전한 것은 기업의 덕이고 노동자들을 고용한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직원들을 마구잡이로 해고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일터이고 쉽게 나갈 수 없다며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불법이라며 최루액을 쏘고 물과 전기를 끊으면서까지 끌어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이 너무 절실해진 시대에 그 어떤 때보다 인권이란 말이 많이 들린다. 하지만, 지금 인권이라는 말은 너무 무력하다. 너무나 상식적이기에 인권이 침해된다는 말을 부르짖으면 양심에 찔려할 거라는 건 착각인 셈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양심, 이런 나의 생각이 여전히 이상적인 착각인가. 환상을 깨고 나쁜 것을 직시해야만 이 모든 비상식적인 사태들을 막을 수 있는 걸까.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절실하게 느낀 건 경찰 때문이다. 누군가 경찰의 양심은 따로 있다 했다.

단순히 그들도 또 하나의 희생자들일 뿐인가. 경찰과의 대치 앞에서 이건 진짜 싸움이 아니라고 위로하면서 그들을 가엾게만 생각해야 하는가. 난 그 날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경찰을 미워하되 경찰 개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다. 그들이 경찰이기 전에 경찰 개인이라면 더욱 질타해야 한다. 경찰에게 윗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경찰 양심’이 있다면 경찰 개인에게는 우리 모두 아는 ‘양심’이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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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0일, 취임식을 앞두고 경찰이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입구 경사로를 막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항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난 장애인이 올라가는 경사로를 막고 서는 그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웃으며 영상을 찍는 여경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았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근거가 전혀 납득되지 않아서일까? 아주 잠시라도 저들이 왜 서 있는지 생각은 하는 걸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모든 경찰이 그렇진 않은 거라며 일말의 이해라도 놓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건 내 타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경찰 개인들도 사정없이 미워해야만 한다는 거다. 내 주위에 경찰이 있다면 그는 그저 내 친구라고 위로하고 말 뿐이 아니라 캐묻고 따질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마음먹었다. 왜 선이란 건 일상에서만 유효한 건가. 단지 착한 친구, 착한 아버지인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경찰들과 가까이 마주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을 때쯤, 바지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쌍차정책부장부인자택아파트에서자살>.

나라 돌아가는 꼴이 너무 부당해서 화를 냈지만, 내가 지금 그렇게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피부로 체감하는지가 확실치 않아 인권활동을 하면서도 늘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스스로 감정의 과잉에 속지 않으려고 했는데. 경찰과 대치하는 인권위 현장 앞에서 누군가의 자살했다는 문자를 보는 순간 눈물이 눈동자를 덮었다. 속상하다. 속상하다. 화난다. 화가 난다. 너무도 정직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나는 영화를 찍는답시고 한창 준비 중인 상태였고 그 날 저녁엔 배우들과 리허설을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내 하는 일이 너무 보잘 것 없어지고 내 영화 내용이 뭐가 그리 의미가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무기력해지는 내가 또 싫지만, 어쨌든 난 계속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을.

그래 잊지 않으려고 쓰는 글인 것을. 잊지 않고, 나 그저 사소한 선에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양심’을 지키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