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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다르다고 탄압하지 말라! (이광열)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1:34
조회
219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지난 12월 16일, 대법원은 박정희 정권이 1975년에 발동한 ‘긴급조치 1호’의 ‘허위 사실 유포’ 부분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한편 헌법재판소도 12월 28일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와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구속시킨 ‘인터넷 시대 긴급조치법’인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두 판례를 통해 우리는 이명박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뒤늦게나마 국가권력의 한 축인 사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일부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사상·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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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8일 헌법재판소(소장 이강국)는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해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사람에게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 심판에서 재판관 7(위헌) 대 2(합헌)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던 ‘미네르바’ 박대성씨(오른쪽)
사진 출처 - 한겨레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의견의 발표를 억누르게 할 때 나타나는 특유한 해악은 그것이 전 인류의 행복을 빼앗는 점에 있다.”고 했다.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보장은 밀이 제시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다. 그런데도, 국가 권력자들이 집요하게 이를 탄압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다. 그럼으로써 기득권 세력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서민들의 생존권을 빼앗아, 엄청난 경제적 이익과 함께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까지도 누리게 된다.

지난 11월 28일,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SK 재벌가 2세 최철원이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화물연대 조합원을 야구방망이로 폭행하고 매 값으로 2천만 원을 던져 준, 충격적인 만행이 폭로되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엄중하게 처벌받을 수 있는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간 크게도 그런 범죄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까? 노동자나 서민들이 사소하게 법을 어기면 엄히 처벌하는 검찰과 사법부가 ‘가진 자’들이 저지르는 심각한 범죄 행위에는 ‘국가 경제 공헌’ 운운하며 불기소, 솜방망이 처벌, 특별사면을 남발한데 큰 원인이 있다.

구속노동자후원회가 조사·집계한 바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 아래서 정당한 노조 활동, 파업·집회 같은 집단행동으로 구속된 노동자는 385명에 이른다(외국인 보호소에 장기 수감된 이주노동자들은 정확히 수치를 파악할 수 없어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들을 포함하면 수치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촛불항쟁’이 전국으로 퍼지던 2008년도에 140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고, 용산참사, 쌍용차 점거 파업이 일어난 2009년도엔 214명, 노동자 투쟁이 다소 잠잠했던 2010년에는 31명이 구속되었다. 얼핏 수치만 견주어 보면 김대중, 노무현 때보다 노동 탄압이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촛불항쟁’, ‘용산참사’, ‘쌍용차 점거 파업’에서 볼 수 있듯이 이명박 정권은 대중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어떤 정권보다도 잔인하고 집요하게 노동자·민중 투쟁을 탄압했다. 불법 민간 사찰과 도·감청이 기승을 부리면서 2003년 이후 줄어들던 ‘공안’(국가보안법. 형법상 내란·외환죄 등) 및 ‘공안 관련’ 사건(집시법, 노동관계법 들) 기소율이 이 정부 들어 50퍼센트를 넘어섰고, 전체 양심수도 계속 늘고 있다(<경향신문> 2010년 10월 13일자)

하지만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도 한진중공업, 기륭전자, 동희오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전주 버스 노동자 파업 등 2010년 한 해 동안 곳곳에서 불완전 고용과 정리 해고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절박한 투쟁이 터져 나오면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값진 승리를 일구어 냈다. 이명박 정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투쟁을 억누르기 위해 검찰과 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싹쓸이 연행하고 구속하려 했지만, 노동자 투쟁에 대한 지지와 더불어 갈수록 번져가고 있는 대중들의 ‘반MB 정서’ 때문에 법원이 나서서 이를 말리는 형국까지 됐다.

혁명가 트로츠키도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법조문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세력들의 투쟁’에 의해 좌우된다.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보장받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보편적 인권’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100년이 넘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여전히 짓밟히고 있고, 민주주의는 노동과 자본의 세력 관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극심한 탄압을 받는 건 따지고 보면 지배자들과 사상과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추운 날 노동자들은 무엇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면서 파업이나 시위, 심지어 아찔한 철탑위에서 동상에 걸려가며 처절하게 농성을 벌이고 있는 걸까?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진 자’들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접받기 위해서다.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지만 안정적인 일자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처지에서는 법 앞의 평등, 권리의 평등은 고사하고 평생 노예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성, 현대차 같은 기업체 사장들과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하는 정부 기관들은 그 때마다 얼굴을 부라리며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의사표현을 ‘불법’으로 몰아간다. 대중에게 ‘경제 살리기’,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해묵은 이데올로기를 우려먹이며 ‘귀족 노동자’와 ‘서민 노동자’로 편 가르고, 마지막에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노동자들에게 ‘범법자’, ‘폭력 전과자’라는 낙인을 찍어 감옥에 보낸다. 구속노동자는 첨단 과학기술 문명을 자랑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야만의 그늘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신묘년 새해, 노동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배자들의 인권 탄압에 맞서 함께 분노하고 투쟁하면서, 야만의 그늘을 걷어내고 진정한 민주주의 세상을 꽃 피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