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사람이 '영어'보다 아름다워 (임아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3:25
조회
269
임아연/ 한밭대 학생

"영어 좀 늘었겠는데." 단풍이 한창 무르익어갈 10월, 필리핀에 교환학생 자격으로 온지 1년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적어도 첫인사로 이 말은 듣지 않았으면 싶다. 여전히 부끄러운 내 영어 실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가보지 못한 다른 세상을 한참이나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가장 궁금해 할 게 영어라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기 때문에.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필리핀에서의 영어공부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보다 이 나라의 사람들과 사회는 어땠는지, 내 20대에서 이 경험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긴 여행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게 훨씬 흥미로울 것 같다.

나처럼 취업을 눈앞에 둔 대한민국의 많은 청춘들이 대세에 떠밀리듯 외국행 비행기를 탄다.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필리핀을 택하는 많은 이들이 품은 목적은 아마도 영어일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온 친구와 함께 필리핀 여행을 끝내고 공항에서 친구를 배웅하는 중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한국 학생을 봤다. 수화물 무게가 넘쳤는지 그는 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 큰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거의 대부분 무거운 토익 책과 영어(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용 영어) 관련 서적들이었다. 그가 짊어진 취업의 무게, 영어의 무게를 그대로 보는 듯 했다.

관계 맺기 위한, 또 다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애당초 없었다. 필리핀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타갈로그어를 비롯한 필리핀 전통 언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누군가는 필리피노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얼굴 시커먼 애, 냄새나게 생겼어" 따위의 어이없는 댓글도 서슴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가장 큰 깨달음은 '말'이 통한다고 마음조차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창한 영어실력보다 낯선 세상을 향해, 사람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 더욱 절실했다. 토익 900점이 한 사람의 의사소통 능력, 대인관계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부끄러웠다. 거세게 몰아치는 한류열풍으로 이들에게 한국이 '꿈의 나라'처럼 그려질 때, 그러다 가끔씩 "한국 학생들이 영어 공부하러 많이 오죠. 다른 나라에 비해 싸니까."라는 필리피노의 말을 들을 때면 속 빈 강정 마냥 겉만 번지르르 해 보이는 한국이 부끄러웠다. 수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거쳐 가지만, 이들이 갈구하듯 서로 친구가 되려 하기보다 영어를 위한 수단으로서 대상화시키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느껴왔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낯선 내가 딸의 친구, 심지어 7촌 조카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보름씩이나 집에 묵고 간다고 해도 흔쾌히 방을 내어주고, 따뜻한 밥을 지어 줄 만큼 이들은 한국인에게 호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원고를 청탁받고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적잖이 고민했다. 글을 쓰기에 앞서 이곳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고, 앞으로 한국에서 펼쳐질 나의 새로운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야만 했다. 나의 처지,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의 바람, 사회적 요구에 의해 결국 귀결된 것은 취업이었다. 내가 제 아무리 1년 여 시간 동안 필리핀이라는 다른 사회를 보면서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한들, 결국엔 '필리핀 교환학생' 이 한 줄로 이곳에서의 내 삶이 표현될 것이다. 기껏해야 '영어 좀 할 줄 알겠거니' 하는 정도로 나를 파악하게 될 테지. 참으로 우울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