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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은평구 구산동 보통 사람들이, 나를 버티게 합니다(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11-07 19:09
조회
117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얼마 전 사무실 아파트 우편함에 은평구청 장애인복지과로부터 온 과태료처분 통지서가 있었다. 바로 사무실 아파트 내의 장애인전용주차구역 위반 신고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출처: 전북일보


알고 보니 차 안 장애인전용주차표지가 떨어져서 생활신고앱으로 고발한 것이었다.


시간을 보니 늦은 심야 시간이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 여기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은 충분해서 나 때문에 주차 못한 사람도 없었을 텐데 굳이 주차 자격을 확인하고 사진까지 찍는 품을 들여 신고를 실천한 것이었다. 아파트 주민만 주차장 출입이 가능하니 같은 아파트 주민이었을 것이다.  주차 표지를 새로 발급 받으려고 구산동 주민센터를 갔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 직전이었는데 담당자께서는 직원들과 함께 가는 식사 시간도 뒤로 미루고 노란 주자표지를 발급해 주셨다. 점검을 받으러 아파트 정비소를 찾았을 때는 주섬주섬 목발을 짚고 내리려는 나를, 그냥 차에 타고 있으라며 민망하게도 즐비하게 앞질러온 비싼 차를 대기하게 한 채로 내 차를 먼저 봐주셨다. 그리고 손수 사무실 앞으로 자동차를 배달해 주셨다.


그렇게 사무실로 올라오는데 바로 아래층에 사시는 할머니를 뵈었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서 평소에 걱정되었던 것을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혹시 가끔 쿵쿵 층간 소음이 있지는 않나요” 그러자 아래층 할머니가 바로 응답하셨다. “아우, 좀 쿵쿵거리면 어때요, 사는 게 좀 시끄러우면 어때요,” 이러시면서 내가 사과할 여유도 주지 않고 그냥 가버리셨다.


9월 21일 은평구는 서울 지자체 최초로 민방위 대피시설 표지판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부착하는 ‘행사’를 진행했다고 보도자료로 널리 알렸다. 민방위 지침 등의 규정에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집행하지 않았던 것을 은평구청이 적극 실천하고 이를 확대하겠다고 밝힌 것은 분명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출처: KBS


그러나 이런 것이 단순히 ‘행사’나 ‘보도자료’나 ‘기념사진’으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런 소식은 그 누구보다 은평구에 사는 장애인 당사자 한명 한명에게 명확하게 전달되고 인지되어야 할 재난 정보다. 우리는 화재사고에 대피하지 못해 홀로 돌아가셔야만 했던 시각 장애인 주민을 기억해야한다.


점자표지를 설치했다는 기념사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각 장애인을 찾아 함께 대피하는 이웃 주민들, 곧 장애인과 만나고 같이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민감한 실천이다. 민방위 대피시설에 점자표지를 설치했다고 홍보했으면 장애인 당사자가 재난 시에 그곳까지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와 방법도 당사자에게 인지되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민방위 관련법에서 여러 이유로 훈련과 소집 등에서 장애인을 제외하고 있는 것은 그 구조적,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참 서글프고 차별적인 이야기이다. 국가에 의한 재난 방위이든 민간에 의한 재난 방위이든 장애인을 우선 고려하라는 것은 상식이고 지침이나 시행령 등에도 명시한 것이지만 그것이 구조와 방위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훈련되거나 시행되지는 않는다.


9.11 미국 테러 때 시각장애인이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비장애인 기십 명을 구조한 것을 기억해 보라. 허나 우리나라는 장애인 당사자가 알아서 스스로를 구조하거나 방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구조와 방위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민방위 훈련에서조차 법적으로 탈락되어 있고 재난정보 접근성 개선이 구청의 기념사업으로만 포장되는 것은 반갑지만 동시에 슬픈 것이다. 물론 구청이 앞장서서 이런 일을 널리 알리는 것은 장애인의 재난 정보 접근성의 중요도를 알리고 대중들이 실천하는 자극은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주민으로의 장애인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당연한 일을 구청이 이제야 이렇게 선전하는 것은 때때로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도리어 밤늦게까지 장애인 주차 위반을 감시하고 신고한 같은 아파트 주민이 더 감동적일 정도다.


장애인 대피에 관심이 있는 구청이라면 은평구에서 장애인들이 이런 대피 훈련을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는지, 구의 수영교실이나 체육시설 등에서 장애인들이 얼마든지 생존수영 수업을 비장애인들과 함께 받을 수 있는지도 널리 찾아 보도자료를 뿌리고 그 태권도장 앞에서 수영교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지진과 같은 기후 위기 재해가 남의 일 같지 않고, 포화가 터지는 전쟁 등이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은 시대에, 나는 늘 제일 먼저 가깝게 탈출하라고 주차위반을 신고하고 내 차량에 법적 지위를 알려주고 자동차를 손봐준 이웃 주민들을 각종 언론에 알리고 더욱더 칭찬해 드리고 싶다. 그게 인권의 시작이자 끝이 아닐까?     


그리고 뒤늦게 민방위대피소 점자표지를 설치한 것은 자랑하고 기념해야 할 일이 아니다.  지역 주민에게 유감을 표하고 먼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은평문화예술회관은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할 공공시설이 아니던가? 대피소는 모든 구민들이 이미 함께 대피해야 할 시설 아니던가?


설마 모든 구민에 장애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