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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정당성 (오민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05
조회
749
오민석/ 청년 칼럼니스트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시위에 참여했다. 집에 돌아오자 폭력시위, 폭동 이런 단어들이 뉴스에 난무했다. 의문이 들었다. 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왜 시위대의 것만 폭력이 되는 것일까?

폭력이라고 부르는 힘의 위치와 역학관계는 현장에서 늘 변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도 힘의 관계는 금방금방 변한다. 전세역전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한 건 누구의 힘이 정당한가이다. 이 정당성을 근거로 힘의 사용은 훨씬 확장되고 그 힘 자체도 강력해진다. 정당성의 프레임을 확보했는지에 따라서 역사의 판단도 송두리째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항상 이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11월 14일 힘의 사용(폭력)에 대해서 어떤 단어가 붙여졌는지 보자. 경찰의 물리력은 진압 혹은 과잉진압이라는 반면, 시위대의 물리력은 폭력, 불법폭력 혹은 폭동이라는 말까지 붙여지고 있다. 어감과 의미가 훨씬 거친 느낌을 준다.

어떤 프레임이 감지된다. 시위대의 폭력만 폭력이다. 폭력이 과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 프레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민중총궐기 경찰 폭력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 장면을 제대로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사진 출처 - 머니투데이



폭력이 피해를 불러온다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사회구조가 훨씬 폭력적이다. 시위현장에 나온 사람들은 한국의 수많은 소수자들이었다. 알바, 농민, 학생, 성소수자, 빈민... 헬조선에서 끊임없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사회구조의 폭력에 견디지 못해 자기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 중 몇몇이 겨우 거리로 삐져나왔다.

그 절망적인 ‘삐져나옴’이 폭력이 되고 있다. 카메라가 주목하는 것은 온통 그것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근대의 폭력은 국가로 수렴한다. 사회학자 기든스는 “근대란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으로는 감시, 밖으로는 군사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 국가가 등장함을 뜻한다”고 말했다. 제도적 폭력의 정점에 국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에 대한 경계의 방향은 시민이 아니라 국가 공권력이어야 한다. 공권력이 혹시 시민들에게 과도하게 사용되지는 않는지, 시민들의 안전과 생명보호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감시하고 경계해야 한다.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에서 공권력은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데 심각하게 무능했다. 다른 사회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계부채는 100조 원에 달하고 있고, 행정집행은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힘으로 찍어 누른다.

1차 민중총궐기에 가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민중총궐기 관련으로 경찰로부터 출석 요구를 받는 일도 있었다. 내 주위에도 몇 명 있었다. 해고당한 사람들에게 손배소가 걸렸고 강정과 밀양에서는 공동체가 깨졌다. 이런 공권력 사용은 스스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수를 두는 거다. 힘의 행사에 정당성을 확보할 자신이 없고 이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도 없으니 시위대의 요구에 대답하긴 커녕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려고 애쓰고 있다. ‘시위대의 폭력만 폭력으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비겁한 짓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시위를 지적했다.

노동이나 환경 같은 특정 이슈에 대해서 싸우는 것만큼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정당한 것인지 바라보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정당하다고 한들 그 프레임을 확보하지 않으면 여론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우리에게 유리한 프레임, 정당성의 프레임을 먼저 확보하면 다른 이슈에서의 싸움도 한층 수월해진다. 국가 공권력은 여러 프레임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공권력이 정말 스스로 정당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을 정당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번에도 ‘폭력시위’라는 프레임을 가져가서 여론을 이끌었다. 의경보다 의경 뒤에서 폭력 딱지를 붙이는 공권력이 더 무섭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오민석씨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기는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