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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 (안상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3:55
조회
356

안상현/ 청년 칼럼니스트


그때는 틀렸다: 나는 내 표와 싸우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교사 두 명이 각 반에 명함을 놓고 다녔는데 명함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오전 수업 때 뿌려진 명함은 오후 수업 땐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다른 교사들에 의해 수거됐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두 교사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소속이라는 이야기가 돌았고 징계를 당했다. 해당 교사들이 미쳤다고 폄하하는 담임선생님을 보며 교사들 간에도 큰 견해차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전교조가 무엇인지, 왜 저런 명함을 뿌리고 다니는지 궁금해졌다. 아마 그때였을 거다. 현실 속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처음 느낀 건.


그만큼 학교는 ‘정치 제한구역’이었다. 초·중·고 12년간 정치적 중립을 미덕이라 여기는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입장과 표현에 대해 무의식적 거부감을 길러왔다. 당시 명함 사건에 대한 친구들 반응 역시 사회부적응 교사들의 일탈로 여기는데 그쳤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사회적 갈등보단 사회적 합의를 가르치는데 치중했고, 졸업 후 우리가 마주할 세계는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곳처럼 느껴졌다. 현실은 순응의 대상이었지 저항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갈등과 딜레마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는 채로 성인이 되었다.


대학에서도 정치를 배울 순 없었다. 교수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들 수준에 반어적 감탄을 하거나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바빴고 전공 너머의 것들은 알려주지 않았다. 운동권 선배들의 구호는 점잖은 교육만 받은 나에게 지나치게 과격했고 세련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입시에서 벗어난 고등학생에 불과했고 내게 정치란 단순히 선거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투표를 할 때도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한 이름이나 TV나 인터넷을 통해 스쳐본 이미지에 표를 던졌다. 심지어 선거 날, 아는 후보가 없다는 핑계로 놀러간 친구도 있었다. 예능을 좋아하던 우리에게 정치는 재미도 감동도 없는 뉴스에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정치를 배운 건 오히려 거리에서였다. 2008년 촛불시위에 나서는 친구들을 보며 우리가 이 사회에 얼마나 속해있는지 그리고 이 사회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처음으로 느꼈다. 사람들은 일어나 소리치고 부딪쳤으며 갈등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 뜨거운 공기가 흐르는 그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정치적 감수성이 깨어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내가 뽑은 대통령과 싸우고 있었다는 걸.


50599_121984_1019.jpg 홍상수 감독의 17번째 장편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지금은 맞을 줄 알았지만 나의 답은 여전히 틀려 있다.
사진 출처 - 미디어스


지금도 틀리다: 나는 달라졌지만 내 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적 감수성이 깨어난 후 바라본 세계는 지금까지와 너무 달랐다. 내가 없이도 잘 흘러간다고 느꼈던 사회는 사실 나와는 다른 수많은 내가 만들어낸 사회였다. 던지는 표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를 절감한 순간부터 좀 더 많은 게 알고 싶어졌고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선택지는 좁았다.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 영남과 호남 등 늘 선택지는 2개였다. 고심해 던진 표가 ‘죽은 표(死票)’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2번의 대선과 2번의 총선밖에 못 겪었지만 그중 단 한 번도 뿌듯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19대 총선 때는 기호 17번으로 등장한 청년당에 투표했다. 하지만 낮은 지지율로 원내진출에 실패했고 당은 해산됐다. 청년이 직접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의기를 높게 봤지만 현실정치의 벽이 더 높은 게 문제였다. 거대양당이 독점하고 있는 한국정치판에서 청년당 같은 군소정당이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최다득표자만 당선하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 때문에 군소정당에게 보내는 표는 모두 사표(死票)가 돼버렸다.


단순히 낮은 지지율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 거대 지역정당과 군소정당이 가지는 표 가치는 불평등했다. 2008년과 2012년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받은 표에 비해 5~20% 많은 의석수를 차지한 반면 군소정당은 2008년과 2012년 모두 득표율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의석을 얻었다. 기성양당은 과다대표 되는 반면 군소정당은 과소대표 되고 있다. 처음 정치의 모든 것이라 여겼던 선거제도는 정말 정치의 모든 것이 돼 가고 있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무지개였지만 이를 대변한다는 정치는 빨강과 파랑뿐이었다.


양자택일의 강요된 선택을 할 때 마다 정치에 대한 감수성은 다시 마모돼 간다. 투표로는 제대로 된 의사를 전할 수 없었다. 당장 청년실업을 해결하겠다는 노동개혁만 하더라도 청년을 대변할만한 정치적 채널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 영역에서 청년은 증인이나 피고일 뿐 원고가 될 수 없었다. 그저 여론조사의 대상이다. 정당 정치에서 지분을 갖지 못한 우리들의 목소리는 징징거림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 환경, 페미니즘, 다문화, 동성애 등 사회에 대변되고 논의해야할 사회적 이해관계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반영할 정치적 채널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보완책으로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제 확대가 주장되지만 실현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논의는 진척이 없고 여당인 새누리당은 되레 농·어촌지역 대표성을 명분으로 지역구 의석을 지켜야 한다며 비례대표 의석수를 줄이길 원한다. 이대로 간다면 퇴보나 현상유지다. 내년 총선에도 아마 강요된 선택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죽음의 표를 던질 것이다. 분명 나는 달라졌건만 내 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의 답은 여전히 틀려 있다.


안상현씨는 다문화 사회에 관심을 갖고 문제점을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0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