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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심봉사와 춘향이 (권지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14
조회
631
권지은/ 청년 칼럼니스트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우리’라는 건 20대를 뜻하고, 직접적으로는 내 주위 친구들과 지인들을 말한다. 왜 굳이 ‘내 친구들’이라고 집어 표현해야 하냐면, 이 이야기는 사석에서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비밀이다.

얼마 전 관객들의 성원과 눈물로 막을 내린 <인당수 사랑가>라는 뮤지컬을 보았다. 심봉사의 딸이 심청이가 아닌 심춘향이라는 설정을 배경으로 한 현대식 퓨전 사극이다. 극에서 춘향이는 자신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몽룡이와의 사랑을 지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갔다. 그러다 결국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자살이다. 딸을 잃은 심봉사는 오열했다. 하지만 춘향이가 인당수를 선택했던 데에는 춘향이의 연인인 몽룡이 아니라, 변사또에게 시집가도록 요구한 심봉사 자신의 역할이 컸다. 춘향이는 아버지 심봉사를 정말 사랑했고, 심봉사 또한 딸 춘향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나는 이 비극적 결말이 비현실적인 극적 설정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생활 속에서 수많은 심봉사와 춘향이들을 본다. 듣는다. 부모님 이야기다.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무겁다. 한국에서 ‘효’는 최고의 도덕이다. 전통적 의미의 가족관계가 붕괴되었고, 효의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숱한 통탄 속에서도, 그것에 대해 ‘다른 말’을 덧붙인다는 것만큼은 여전히 금기다.

슬프게도 서로 너무 다른 삶을 살았다. 20대와 20대의 부모는 말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유교적 관습과 독재정권 아래에서 자라 권위주의 문화에 익숙하다. 먹을 것이 귀했기 때문에 원초적 가난의 처참함을 기억하고 있다. 가족에게 희생하는 삶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호황기를 보내면서 더 풍요로운 미래를 꿈꾸거나 성취할 수 있었다.

지금의 20대는 이상하리만치 그 반대의 삶이었다. 민주화, 경제성장, 세계화의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부모세대보다 풍요롭고 민주적으로 보냈다. 문화와 교육의 혜택도 양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극심한 경쟁사회가 종용하는 입시스트레스와 취업스트레스를 겪으며 청춘이라는 소중한 시간이 메말라 버렸다. 지금 20대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늘 품고서 산다. 취업에 성공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계속되는 무의미한 경쟁 속에서 이제 스스로를 찾고 싶어 한다. 드디어, 조금씩, 용기를 내기도 해본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가 힘들다. 그들에겐 너무 오래 묵혀둔 감정이다. 그래서 종종 부딪히고, 멀어진다.

S는 기약 없는 공무원시험공부를 그만두고서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직업 바리스타가 되기까지, 누구보다 부모님에게 ‘고백’하는 용기와 그것을 ‘용인’ 받는 고단한 시간이 필요했다. Y는 취업경쟁을 그만두고 자신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거듭됐지만,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와 강요로 자살까지 떠올렸다. 정신적 혼란이 컸다. 직업이나 회사를 옮기려 하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을 접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늘 부모님이다. 그래서 20대의 가장 큰 딜레마가 됐다. “나의 것을 찾고 싶다”, “부모님의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길 바라는, 남들이 인정하는 회사에 취직하길 바라는, 좋은 사람 만나 일찍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 다 자식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부모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런데 심봉사도 그랬다. 춘향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고, 누구보다 춘향이의 행복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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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인당수 사랑가'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하지만 심봉사는 춘향이에 대해서 잘 알.지.못.했.다. 춘향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한 사람인지, 몰랐다. 권력을 가진 변사또에게 시집가는 것은, 춘향이로선 몽룡이를 배반하는 선택일 뿐 아니라, 삶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남들에겐 가치 없어 보일지라도, 몽룡이를 기다리는 일은 춘향이에게 사랑이자, 꿈이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지키는 유일한 삶의 방법이었다는 걸. 아버지 심봉사는 몰랐다.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 때에 행복을 느낀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하지만 사회는 네모난 틀에 우리를 찍어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모양인지’ 알아내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그래서 또 타인에게도 그 사람만이 가진 모양이 있다는 걸 알아주기가 힘들다.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모양을 잘 알아주는 것이 아닐까? 그 모양을 잘 찾고, 부서지지 않게 가꿔서, 행복하길, 기도해주는 것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그 사랑을 나누는 걸 방해하는 것 같다. 몇 가지의 직업과 회사에만 편안한 환경, 사회적 평판, 좋은 돈을 책정해 놓았다. 사람들의 모양은 수만 개인데, 10가지 모양에만 돈을 모아 주었다. 그래서 부모는 자꾸만 자식을 ‘사랑’하기보다 ‘걱정’하게 된다. 10가지 중 하나가 반드시 되어라, 되었으면, 한다.

심봉사는 춘향이를 아내로 삼길 원하는 변사또의 막강한 권력이 춘향이를 괴롭힐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가진 것 없이 고생스레 살아온 딸이 변사또와 결혼해 편안하게 살게 되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신분제사회의 억압이라는 ‘제도적 불행’은 심봉사의 걱정이 덧붙여져 춘향이의 자살이라는 더 큰 불행을 만들었다.

불행이 더 큰 불행을 낳는 구조. 자살공화국. 우리는 우리의 모양대로 살지 못해서 불행하다. 언제까지 불행은 되물림되어야 할까. 우리의 딸들에게도 “너의 모양을 버려야만 잘 살 수 있는 거야”라고 하는 말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야 하고, 그 딸은 그 아들에게 똑같은 말을 전해야 하는 걸까?

다양한 모양을 가져도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삶. 그런 삶이 가능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노력이 정치 속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시작되어야 한다. 대선 결과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서로의 모양’을 응원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싸움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자살공화국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