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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자기’야, 우리 헤어져 (김원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32
조회
413

김원진/ 청년 칼럼니스트



‘자기’야 안녕?

어느덧 캠퍼스엔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 왔어. 신문에선 봄이라며 춘화(春花) 전시회를 소개해주더라고. 언제부턴가 부쩍 늘어난 교환학생들은 잔디밭에서 서로 진한 애정표현하기 바쁘네. 어떤 씩씩한 친구는,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던 여성에게 다가가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데 번호 좀 주실 수 있으세요?”라는 되도 않는 멘트를 날리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시험 끝나고 우리도 봄놀이나 즐겨볼까? 아, 아니다. 실은 그전에 나 할 말이 있어. 이 말 하려고 오늘 펜을 든 거야. 오늘은 꼭 해야겠어.

‘자기’야, 우리 헤어져.

헤어지잔 말을 왜 뜬금 맞게 꺼내는 거냐고? 아냐. 실은 나 오랜 전부터 고민해왔어. 우리 ‘자기’에 대해서 얼마나 곰곰이 생각했는데. 이렇게도 살펴보고 저렇게도 살펴보고. 나름 입체적으로 고민해왔어. 과연 ‘자기’와 ‘나’ 사이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자기’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아왔는지. 우리 둘 사이 관계에서 과연 ‘난’ 행복한지. 혹은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지. ‘나’는 과연 ‘자기’에게 어떤 의미이고 존재인지.

‘자기’는 늘상 바빴어. 항상 뭔가 했지. 특히 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선 초조함과 조급함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어. 말은 자율적이고 계획적으로 뭔가를 한다고 하지만, 옆에서 볼 땐 그와는 정반대였어. 강제된 자율성에 의해 무언가에 속박돼 보였지. ‘자기’의 인생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소개서만 수 십 장씩 썼어. ‘자기’는 조금 느슨해진다 싶으면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같은 책도 들여다봤지.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했던 거겠지. 옆에서 그런 ‘자기’를 보면 ‘나’도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어. 우리가 마주하고 대화할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었고.

그렇게 ‘자기’와 조금씩 멀어지고, ‘나’는 외로워질 때면 추억을 곱씹었지. ‘자기’가 자기의 영어 이름을 알려줬을 때, 기억나? 나는 ‘픽’하고 웃었지. ‘자기’는 자신을 ‘셀프’(Self)라고 소개했어. 우리말로 번역하면 ‘스스로’ 정도가 되겠지? ‘자기’는 ‘자기’의 부지런함이 이름 때문이라며 오래전 학습지 광고에서 나왔던 노래를 불러댔지.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근데 좀 이상했어. 그 학습지 광고에서 들었던 ‘스스로’의 의미는 자발적 의지를 뜻하는 것 같은데, ‘자기’가 스스로 하는 것들은 분명 의미가 달랐어. 무책임한 선생님들이 건네는 말투처럼 말이야. “네가 스스로 알아서 해.” 타인이 부여하는 자유, 자율성은 오히려 누군가를 옥죌 수 있는 거지. 왜 ‘셀프’서비스도 그렇잖아. 반찬이 푸짐해 셀프서비스를 하는 식당도 있지만 대개는 ‘알아서’ 갖다 먹으라는 거지. 말이 좋아 ‘셀프’일 뿐, 강제 받은 자유인 셈이지. 우리가 함께한 많은 시간동안 ‘자기’는, 셀프서비스라는 푯말 때문에 마지못해 정수기에서 물 떠오는 손님 같았어.

답답한 마음으로 책을 폈어. ‘자기’가 보는 계발서 말고, ‘자기’를 심도 있게 분석한 책들 말이야. 혹시나 답을 구할까 싶어서, 아니면 혜안이라도 얻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어. 역시 똑똑한 사람들은 다르더라. 역사를 살펴보면서 맥을 짚고 명확한 개념을 제시해주더라고. 문제는 ‘자기’에 대한 분석은 하나하나 공감이 가는데 해결책이나 대안이라고 제시한 것들은 도무지 공감이 안 간다는 거야. 허망했지 나는. 하나 예를 들어볼까?

울리히 벡이라고 독일에서 잘 나가는 사회학자가 있어. 현대사회를 ‘위험 사회’(Risk Society)라고 규정하면서 원자력 문제나 각종 환경 문제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설명했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지. 그는 또 현대사회의 개인화 현상에 대해서도 진단을 내려. 아마 ‘자기’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짚어내는 게 아닌가 싶어.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젠 개인화 시대라는 거야. 여기서 개인화는 두 가지 상반되는 의미를 가져. 기회이기도 하지만 위기이기도 하다는 거지. 전통적인 개인에 대한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해방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자유와 기회를 얻었다는 게 울리히 벡의 설명이야.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얻은 만큼 삶의 안정성을 상실하고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삶을 기획하고 방향을 정해야만 하는 일종의 강제된 삶을 부여받는다는 거야. 개인은 자율성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위험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진 셈이지. 나는 벡이 말하는 현대사회의 개인이 바로 전형적인 ‘자기’라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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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탕을 손에 든 여학생이 남학생과 함께 한 대학교 캠퍼스를 걷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다만 나름 해결책이라고 제시한 게 너무 안일하다고만 느껴졌어. 우리 ‘자기’한테 별로 도움이 안 될 거 같았어. 각 개인이 나서라는 거야.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행동을 하래. 한마디로 시민의식을 갖고 행동하라는 거지. 너무 뻔하지?

썰이 좀 길었어. 미안. 이제 나름의 해결책을 얘기해 주려고. 새겨듣진 마. 선택은 ‘자기’에게 달려있는 거니까. ‘나’는 ‘자기’에게 ‘나’(I)가 되길 바라. ‘자기’말고 ‘나’ 말이야 ‘나’. 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도 있었잖아. 어떤 학자는 이 프로그램을 가수라는 ‘나’의 정체성을 되찾는 프로그램이라고 해석하더라고. 이후에 생긴 수많은 <나는 ~다> 패러디 역시 주체적인 ‘나’를 되찾는 일환이라고 보는 거지.

‘자기’야, 무엇보다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질 필요 없어.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 마. 슈퍼맨이 아니잖아 ‘자기’는. ‘자기’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진하게 그은 밑줄을 떠올려봐. 우린 타인과 같이 살아가는 존재잖아. 때때로 타인에게 기대거나 ‘나’의 어깨를 내어주는 게 더 자율적인 ‘나’일지도 모르지. ‘자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자기’(Self)야, 우리 헤어지고 ‘나’와 다시 만나자.

 

김원진씨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언론인권센터 모니터링팀에서 활동 중인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