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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하지 마라 (이윤소)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01
조회
296

이윤소/ 청년 칼럼니스트



지난 9월 7일 김승환, 김조광수 커플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인 동성 결혼식을 올려 큰 화제가 됐다. 이 결혼식의 제목은 ‘김조광수 김승환의 당연한 결혼식, 어느 멋진 날’이다. 이성 간의 결합에 있어서 결혼은 어찌 보면 진부하리만치 당연한 개념이다. 그러나 동성 간의 결혼이 ‘그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데에는 아직 사회적 인식이 도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류 권력이 그들을 ‘당연하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조건은 각자가 지닌 권력의 크기에 달려있다. 권력을 지닌 주류는 스스로를 사회적 인식의 주체로 여기며, 비주류를 대상화된 객체 즉 ‘타(他)자’로 여긴다. 예를 들어 한국에 사는 ‘성인, 남성, 부유한 사람, 서울 사람, 이성애자, 비장애인’은 나라는 존재를 힘들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스스로를 권력을 지닌 주류로 생각하며, 사회에서도 이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소년, 여성, 가난한 사람, 중소도시 사람, 동성애자, 장애인’의 삶은 그렇지가 않다. ‘당연하지 않은’ 이들의 삶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증명하고 설명하기를 요구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존재가 아닌 사람들을 주류 사회에 ‘편입해 주면서’ 특정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왜냐하면 주류는 비주류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만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류가 낯선 존재에게 ‘익숙한 개념’을 부여해 종전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권력을 지닌 주류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을 말할 때 명칭에서부터 차이를 둔다. 예를 들어 ‘여검사, 여의사, 여성 국회의원’처럼 ‘사회적인 권력’을 지닌 여성을 묘사하면서 앞에 ‘여’라는 글자를 붙인다. 어느 누구도 ‘남검사, 남의사, 남성 국회의원’이라고 ‘남성’임을 강조하면서 전문직 남성들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또한 권력적 지위를 차지한 여성에게는 그 지위에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역할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한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는 기업의 CEO에게 강인함, 카리스마, 추진력 등을 기대한다. 그러나 여성 CEO의 경우 ‘어머니 같은 포용력, 섬세함, 부드러운 리더십’등의 수사를 붙여 포장하며 일반적인 역할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주류 권력의 입장에서 ‘권력을 지닌 여성’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낯설기 때문에 그 개념을 본인들에게 익숙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여성의 모성성’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해 해석하는 것이다.

소수자가 사회적으로 타자화 되는 문제는 장애인 이슈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빈번히 나타난다. 언론에서는 ‘우리도 잘 할 수 있어요.’, ‘장애인 ㅇㅇ씨의 함박웃음’ 등의 제목을 통해 ‘선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장애인 이슈를 다룬다. 또한 ‘장애인의 성’, ‘장애인의 범죄’ 등 보편적 인간 군상이 모두 지닌 모습(그러나 사회적으로 부정하게 여기는 것)과 관련된 내용은 이야기에서 철저히 배제한다. 따라서 대중의 인식 속에서 장애인은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아니라 ‘미담’ 속에서만 존재하는 ‘박제화 된 존재’로 고착된다. 몇 년 전 ‘장애인을 장애우로 바꿔 부르자’고 말했던 캠페인이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장애인’과 ‘장애우’의 차이는 그들의 주체성을 존중하느냐, 아니면 그들을 타자화, 대상화 하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즉, 사회적으로 타자화 되는 과정에서 장애인은 ‘제 권리를 주장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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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레인보우팩토리


 

동성 결혼 이슈를 다루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성 결혼을 찬성하는 진영의 일부는 동성 간의 결혼을 말할 때 종종 ‘성스러운 사랑, 진정한 사랑, 아름다운 것’등의 수식어를 사용하곤 한다. 동성 간의 결합을 주류 사회로 ‘편입해 주기 위해서’ ‘아름다움, 진정성, 선한 것’이라는 가공된 이미지로 그들을 포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오히려 동성 간의 결혼을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 아니라 특이하고 특별한 일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어 그 결혼의 당위성을 흐려버리기도 한다.

보부아르는 저서 ‘제 2의 성’에서 타자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과 인식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주체인 남성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타자가 되었다. 타자란 "내가 내 스스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모든 부정적인 자질을 갖는다.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남성이나 남성다움은 규범으로 세워지고 여성이나 여성다움은 부정적인 것, 비규범적인 것, 즉 타자로 간주된다. 남성은 여성을 사회적 타자로 만들기 위해 여성다움, 즉 여자가 아내, 어머니, 연인, 첩, 매춘부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다.’1)

보부아르는 ‘타자화’를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설명했지만 ‘타자화’라는 개념은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모든 사회적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사회는 권력적 소수자를 절대적인 존재인 주체에 기대서만 성립하는 상대적인 존재로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는 이른바 ‘타자’들에게 ‘모성, 선함, 진정성, 아름다움’ 등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이미지를 덧씌워 그들의 존재를 포장한다. 즉 주류 권력은 사회에 편입해 준다는 명분으로 소수자의 사회적 역할을 극히 일부분으로 한정해 소수자의 당연한 권리 행사를 방해한다.

무엇이 당연한 존재인지, 무엇이 당연하지 않은 존재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미 주류 권력에게 넘어가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권력으로부터 권력적 소수자와 다수자를 가르는 기준을 판단할 권리를 쟁취해야만 한다. 당연성 기준을 쟁취하는 투쟁은 단지 정치적, 사상적인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을 규정하는 사회 시스템과의 다툼 또한 동반해야 이뤄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연성 기준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불균등은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이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서도 기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언제까지나 다수이며 주류일 수 없다. 현실 속에서 겪는 부침과 사회적 기준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모두 소수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소수자를 배려한다’는 시혜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소수자성을 발견해야 한다. 이어 타인의 존립을 비본질적인 것, 부수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사회 권력에 저항해야 마땅하다.

1) 고정갑희,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5.22, 휴머니스트

이윤소씨는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