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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아프니까, 불안하니까 성형한다? (김원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59
조회
380
- 불안과 우울은 누구의 것인가?

김원진/ 청년 칼럼니스트



단언컨대, <렛미인 3>은 문제적인 프로그램이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는 <렛미인 3>는 사연을 받아 직접 성형수술을 해준다. 제작진의 표현에 따르면 ‘억’소리가 날 정도로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이 지속되는 건 그만큼 광고가 붙고 화제가 되기 때문이다. 성형수술하기 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끔찍한 표정을 짓는 현재 ‘나’의 모습은 어떤 극단을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의 외모 때문에 느끼는 불안과 우울의 끝, 여기가 끝이면 좋으련만 미(美)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오늘도 전진한다.

성형에 관한 우리 주변의 일화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고등학교 한 학급에 절반 이상이 성형수술을 한다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성형을 심각하게 고민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성형은 곧 기술발전이 인간에게 선사해준 축복처럼 여겨진다.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이 오히려 힘을 얻는다. <렛미인 3>처럼 미디어는 자존감 회복을 앞세워 성형수술의 순기능을 널리 알린다. 광고는 보다 적나라하고 솔직하다. 병원광고 규제가 풀린 이후 성형외과 광고가 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도시의 시민들은 분 단위로 성형외과 광고를 접할 수 있다. 학교로 향하는 마을버스엔 메일같이 이런 광고 멘트가 나온다.
“성형인 될래? 성형미인 될래?”

우울과 불안이 ‘병’으로 불리게 된 건 근대 이후다. 경쟁의 파고 속에서 24시간을 보내야 하는 도시의 삶, 도시인에게 희소가치를 쟁취하라고 속삭이는 자본주의의 구축은 한 개인의 불안을 극대화한다. 예전엔 주로 자연재해나 외세의 침략 따위가 불안의 원인이었다면 이젠 나의 구직, 외모, 건강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래서 의학의 정신과와 사회과학의 심리학은 개인의 불안과 우울을 치료한다고 앞장선다. 사람이니까 당연히 불안한데 현대사회에선 불안의 정도가 조금 심하니 치유 해주겠다는 식의 담론이다. ‘외모’엔 물리적 치유도 따라붙었다. 성형을 필두로 한 각종 뷰티산업이 대표적이다. 이제 이들의 불안을 치유해주겠다는 속삭임은 더 낯간지러워졌다. 이를테면 이런 방식이다.

성형외과 의사는 잠재적 고객을 겁박한다. “성형인 되기 싫지? 우리 병원 오면 성형미인으로 만들어줄게.” 한국 사회에선 성형괴물이라고 호명되는 대상이 있다. 큰돈을 들여 성형수술을 했는데 티가 많이 나고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을 흔히 성괴(성형괴물)이라고 부른다. 성형미인을 만들어 주겠다는 이 병원은 개인이 느끼는 불안을 군데군데 어루만져준다. 일단 못난 얼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우리가 해결해주겠다는 것이 하나. 성형을 했는데 오히려 예뻐지지 않을 불안까지 제거해주겠다는 것이 두 번째다. 이렇게 고도화된 방식의 세일즈는 인간의 불안은 제거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화폐와 불안은 교환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전제로 한다.

보통의 외과수술과는 달리 사람들은 성형수술 결과가 만족스러울수록 수술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성형수술의 오묘한 지점이다. 성형인/성형미인을 구분하는 성형외과의 전략은 그래서 탁월하다. 불안을 치유해주는 척 하면서 하지만 또 다른 불안을 끄집어내서 극대화하는 것이다. 비싼 값을 받으려면 불안의 종류는 다양할수록, 강도는 셀수록 좋다. 그래야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까. 불안과 우울은 과연 온전히 내 감정인가, 라는 질문을 할 틈조차 없다. 쉴 새 없이 미디어와 뷰티산업이 도처에서 아름다워지라고 종용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안의 정체에 대한 상상력이 불가능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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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N <Let 美人 시즌3> 한 장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이것은 혁신이다”

기업이나 사회조직에나 어울릴법한 ‘혁신’이라는 용어가 이제 인간의 용모에도 적용된다. 외모의 혁신적 변화는 곧 뼈를 깎고 살을 잘라내는 고통을 감수한 변화이기도 하다. 혁신의 주체는 개인이고 아픔을 감내한 주체 역시 개인이다. 어느 때보다 ‘아름다움’으로 중무장한 상품들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빽빽이 메우고 있는 시대에, 개인 역시 시대를 좇아야 한다. 정확히는 좇아야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몸에 갇힌 사람들>의 저자 수지 오바크가 지적하듯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몸은 안전하거나 정상적이지” 않다.

이제 외모는 먹고 사는 문제와도 연관되기 시작했다. 어떤 기준에 미달하는 외모는 노력부족으로 간주된다. 성형외과는 “이것은 혁신이다” 따위의 광고로 외모도 노력만 한다면 혁신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귀엣말을 설파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이다. 자신의 노력부족, 관리부족을 자책한다. 취업이 안 된 것은 ‘내’가 나를 잘 꾸미지 못한 부분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레 불안과 우울의 감정의 부피는 커진다. 이제 ‘개인의 책임’은 하나의 규율이 되었다. 안 그래도 불안한데 책임소재까지 나에게 있으니 더 불안한 것이다.

아름답지 않음은 곧 개인의 나태함이 병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형외과에서 얼굴을 ‘고친다’라는 표현은 아름답지 않은 외모가 ‘병’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성형외과 수술과 시술에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스스로 열심히 벌어 고쳐야 한다. 전적으로 사적영역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인 셈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기 계발 담론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자기계발 혹은 자기혁신의 범주에 외모 역시 포섭된다. 외모마저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지는 세상에선 오히려 불안과 우울감 없이 살아가는 게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
“닮지 마라. 예뻐져라.”

닮음/유사함/공산품은 현대사회의 미덕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형수술을 하더라도 닮으면 안 된다. 아름다워지더라도 남과 달라야 한다. “닮지 마라, 예뻐져라.”라는 광고 카피는 기계에서 찍어낸 곰돌이 모양의 젤리처럼 비슷비슷해지는 ‘성형인’이 아닌, 개성 있는 ‘성형미인’을 만들어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사한 아름다움’에 대한 불안을 제거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는 명백히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감언이설에 가깝다. 약장수의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미의 기준은 무엇이었던가. 오뚝한 코? 쌍꺼풀 진 눈? 움푹 파인 두 눈 사이? 갸름한 브이라인? 살짝 튀어나온 이마? 풍만한 가슴? 글쎄, “닮지 마라. 예뻐져라.”고 광고한 성형외과는 의술이 매우 뛰어나, 위의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따르면서도 개성적인 얼굴을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코를 조금 높이느냐 더 높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적인 느낌은 비슷하다. 어딘가 얼굴이 부자연스러운 연예인을 보면 ‘이상하다’는 반응만큼 ‘다 똑같다’는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의심과 회의의 대가 데카르트는 “아름다움의 근거란 사실상 규정 불가능한 것이어서 아름다움은 판단하는 인간에 의해서 변주된다.”라고 했지만 현실은 데카르트의 생각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획일화되어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 즉 서구적 얼굴형만이 각광받는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 규범처럼 여기는 미적 기준에 충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성공적인 삶의 기준이라는 것이 ‘부자 되세요!’ 혹은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으로 좁혀지는 것과 유사하다. <외모 꾸미기 미학과 페미니즘>의 저자 김주현이 주장하듯 이제 우리의 질문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왜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 되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이름 모를 타자에 의해 세워진 미적 기준을 따라가려다 보니 삶은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오늘날 인간의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을 오롯이 ‘개인의 본능’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다. 수지 오바크의 말마따나 자신감과 선택의 여지를 얻는 것이 언제나 좋은 일이라는 논리 역시 공허해진다. 즉 ‘신체의 불안정화’ 시대에 우리가 살게 된 건 단지 미적 욕망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 의료산업은, 미디어는 불안을 치유해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불안을 조장하려 든다. 사회는 무방비다. 사회는 ‘인생은 스스로 돌보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하나의 기준으로 미를 평가하면서 강요하는 문화적 규범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이 시대의 삶의 지침과 상충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똑같아지지 못하는 사람들, 기준으로 수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안감 속에서 살아간다. 사회는 이들을 자기관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배제하거나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불안과 우울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 인용구로 들어간 굵은 글씨의 중간제목은 실제 성형외과 광고 카피입니다.


김원진씨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언론인권센터 모니터링팀에서 활동 중인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