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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이 아닌 장미의 붉은빛으로 (이다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50
조회
316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이스라엘군이 지난 8일부터 팔레스타인 공습에 나섰다. 현재까지 팔레스타인에서는 1,050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이스라엘에서는 53명의 군인이 숨졌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의 지상군이 투입되고, 또 학교와 놀이터 같은 민간시설까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희생자의 수는 더 늘어나는 중이다. 지구촌의 한 구석이 핏빛으로 물드는 순간이다. 우리가 노래해야 할 세상의 붉은빛이 ‘피’가 아닌 ‘장미’이길 기대한다면 그것은 요원한 바람일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하마스가 그 공격의 목표라고 밝혔지만, 결코 이것이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답이 되지는 못한다. 하마스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팔레스타인의 다수당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정당한 권력이 아닌 ‘테러집단’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2013년 발간된 미 국무부의 테러보고서에도 하마스는 ‘국제테러조직’으로 분류된 상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협상이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지난 26일 짧은 정전 이후, 소강국면을 보이던 공방은 28일 재개되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하마스의 땅굴이 모두 파괴될 때까지 우리 군은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겠다”며 장기전 대비를 공언하고 나섰다.

평화의 언어는 좀체 전달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좌절하지도 않는다.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칼을 겨누는 무력대결 대신에, 언어를 주고받는 행위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믿기 때문이다. ‘평화’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샬롬’과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뜻의 아랍어 ‘앗살람 알레이쿰’ 같은 ‘언어’ 말이다.

잠식해오는 무력감을 이겨내기 위해 팔레스타인 저항시인의 작품을 꺼내 읽는다. 고통을 재료로 글을 써내려간 이들이다. 팔레스타인의 시인 압드 안나시르 살리흐는 이스라엘 침략자를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염원하는 시를 쓴 죄로 열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이라는 시를 통해, 감옥이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화해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러나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다. 때로는 시를 읊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낭만적 놀음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공격’을 외치고, 우경화된 이스라엘의 거리는 “아랍인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로 뒤덮이는 중이다. 특히 지난 17일부터 이스라엘이 ‘강철화살탄’을 동원하기 시작하면서는 인명피해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이 무기는 탱크에서 발사된 뒤 수천 개의 화살로 흩뿌려지는 대량살상무기다. 게다가 지난 23일에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의 상수도 시설을 파괴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도 희생자가 나오지만, 이 모든 죽음을 애도하는 목소리는 ‘복수’라는 외침에 지워진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군의 한 병사는 소총의 십자선을 통해 보이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머리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것은 곧 전 세계적 지탄을 받으며 논란이 되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과거에도 SNS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한 병사가 자신의 SNS 계정에 토마토케첩 사진을 올려놓고 “엿 같은 아랍인들. 그들의 피는 맛있다”는 글을 쓴 것이 그 발단이었다.

하지만 이 핏빛 세상에서 장미의 붉은빛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평화를 향한 릴레이 외침이다.

www.refusersolidarity.net에 접속하면 이들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서안과 가자, 그리고 유대인 정착촌에서의 군복무를 거부한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인이 과거 강력한 군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잔인한 대량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젊은이들은 바로 그렇게 ‘명령에 따랐을 뿐인’ 나치 병사의 손에 유대인이 죽어나갔기 때문에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외친다. 물론 이스라엘의 보수 언론과 정치 세력은 이 젊은이들을 ‘조국의 반역자’라 몰아붙이며 공세를 펼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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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ALJAZEERA


 

상관의 명령이 아니라 각자의 양심의 소리를 따르는 이들. 이런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전율이다. 보복에 보복을 거듭하고 살해를 살해로 돌려주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 용감하게 ‘평화’를 외칠 줄 아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눈물겹도록 기쁘다. 군사형무소에 갇혀 지내면서도, 변호사 접견의 권리까지 침해당하면서도 팔레스타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바로 희망의 증거다.

팔레스타인 군사작전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이유로 군사형무소에 갇혔던 다비드 하함 헤르손은 감옥에서의 편지(국내에는 ‘제4 군사 형무소에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군사주의에 저항한다’를 통해 소개되었다)를 통해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바로 탱크를 능가하는 무기”라고 말하면서 “나의 투옥에 대해 생각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뭔가 달라진다”고 호소한다. “팔레스타인은 점령자로서의 우리를 바라고 있지 않다”며 점령지구에서의 군복무를 거부하고 투옥된 우리 야코비의 사례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 23일에는, 50여 명의 이스라엘 예비군이 팔레스타인을 향한 군사행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는 기사가 워싱턴포스트에 실렸다. 이들은 갈등을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절망감을 표시했다.

이건 마치, 그 자신이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 입국을 거부당할 정도로 미국-이스라엘의 유착과 팔레스타인 점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노암 촘스키를 볼 때의 전율과 비슷하다. 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에 대해 쓴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2005년 5월, 촘스키의 입국 신청을 거부했다.

이들로부터 얻은 강렬한 에너지를 원천으로 ‘지금,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필사적으로 절망의 한 구석에서 희망의 물결을 찾는다. 이 몸짓은 절박하면서 무모하기도 하다. 그러나 지치지 않는 희망으로 이스라엘의 지성에 호소하려고 한다. ‘살림’의 논리로 ‘죽음’에 대항하자고. 부디 이 전쟁을 함께 끝내자고. 핏빛 세상이 아니라 장밋빛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한반도와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물리적 거리를 초월해 연대할 방법은 꽤 많다. 우선, 이스라엘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1인 시위에 참여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 접속하여 자신이 1인 시위를 할 수 있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신청을 하면 된다. 꼭 이런 단체를 통하지 않더라도 개인 자격으로도 참여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의 활동가 새라 씨는 “가자 지구 출신으로 10년째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머물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도 있다”며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는 등 핏빛 전쟁을 지탱하는 기업, 은행에 대한 보이콧 서명운동이 있다. (https://secure.avaaz.org/kr/israel_palestine_this_is_how_it_ends_loc/?bZhxjdb&v=42
677) 또, 이스라엘의 군비 확충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힘을 보태는 방법도 있다. (http://www.bdsmovement.net/stoparmingisrael)

덧붙여, 앞서 언급한 www.refusersolidarity.net 사이트에 들어가면 이스라엘의 평화주의자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미리 작성되어 있는 탄원서 양식도 있어서 이들을 위한 탄원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다.

이렇게, 미미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쓴 글대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에 어떤 방식으로건 책임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희망을 갖고 인내하는 것만이 삶을 지속해나가는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결코 이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고통’ 만큼 보편적인 것도 없다. 이 ‘고통’을 통해 ‘연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가능성은 빛난다고 믿는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