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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의 이념 (한은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34
조회
308

한은석/ 청년칼럼니스트



그 동안 한국에서 수많은 말들이, 이념들이 명멸해갔지만 오랜 시간 동안 힘을 잃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이념이 있다. 나는 진정성의 이념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이 실패하고, 비판과 철학이 실패했지만 진정성의 이념은 진심으로, 때로는 사람으로, 때로는 마음으로 말만 조금씩 바뀌어가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한국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성지로 진정성의 이념을 꼽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최후의 보루는 사회과학이 실패하고, 비판과 철학이 실패한 오늘날에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릴 만큼에 명사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가장 원초적인 공간에서도 최후의 피난처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대중적인 이념이다.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 혁명가, 정치적으로 실패한 대통령, 명성에 눈이 멀어 실험 결과를 조작한 사기 과학자, 단 2석의 국회의원직을 위해서 어제의 동료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회운동가, 동료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뒤 발뺌하는 뻔뻔한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진정성은 변절과 뻔뻔함의 낙인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해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진정성은 이념을 넘어선 진리라 할 만하다. 스탈린주의 교과서도, 대통령의 권력도 신도시 아파트와 자녀들의 학벌 문제를 넘지 못했는데 이를 진리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시대의 이념 중에 이념이라 할 만한 이 진정성은 또 한 번, 그 거룩한 대행자를 시대에 불러냈다. 물론 앞선 경우에 비하면 조촐한 규모이며, 사회 공학적 합리성의 기준으로 보아도 우스꽝스럽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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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거룩한 대행자의 행보가 아니라, 이 시대에 대행자를 요청한 우리 사회의 진정성의 이념이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이 짧은 글에서 진정성의 이념이 어떤 구조와 운동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내는 것은 어렵겠지만,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는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진정성의 이념이 가지는 특징으로 인식과 판단에 있어서의 자의성을 꼽을 수 있다. 누가 보아도, 허술하고 타당하지 않은 자의적인 인식과 판단이라 할지라도 진정성은 이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 진정성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거짓과 사기로 몰렸을 허황된 판단이겠지만 진정성의 이념은 거짓과 사기가 아니라 진실과 진리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또한 진정성의 이념은 위선의 특징을 가진다. 인식의 자의성 때문에 형성된 내용은 충분하지 못하다. 이 불충분함을, 인식 현실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움켜쥐지 못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진정성은 자신의 필요를 입증할 선과 악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 선과 악의 구분 역시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악의 모습 역시 선의 필요를 위해서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선은 선 고유의 속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위선이다.

진정성의 이념이 강력할수록, 인식이 자의적일수록 현실을 더 강하게 움켜쥐기 위해서 위선성은 더욱 강해진다. 상대는 악이고, 나는 선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타자와의 대화가 아니라, 타자를 악으로 여기고 진정성이 있는 선을 따르는 것이다. 진정성의 이념을 따를 때, 제 아무리 복잡한 세계와 섬세한 타자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이분법적으로, 선과 악, 우리 편과 적으로 나눌 수 있다.

자의성과 위선성을 통해서 진정성은 절대적 지위를 누린다. 진정성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진정성은 인식의 체계를 닫아서, 강고하게 만든다. 다른 것과 모르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진정성은 역량과 목표를 넘어서서 존재하며, 모든 이상 징후들을 차단한다. 역량의 실패와 숨겨진 목표는 진정성의 부정이 아니라 진정성의 강화로 귀결된다. 이런 점에서 진정성은 영원하다.

진정성의 이념이 움켜쥔 대상들은 분석될 수도, 논박될 수 없으며, 단지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된다. 마음의 논리에 있어서 중간은 없다.

그러나 진정성의 이념이 개입하기에는 현실의 사회는 매우 복합적이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이념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들 이념들은 앞의 위선성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세속적인 이념들이다. 정상국가, 수십조 원의 국익과 경제적 효과, 선진조국, 정세 등, 이런 이념들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붙잡아 진정성의 이념을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이런 이념의 언표들은 겉보기에 추상적이라 할지라도, 현실을 계량하는 공리주의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진정성의 절대적 이념 아래에서 줄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준들은 위선적이고, 자의적이다. 물론 진정성의 이념을 받아들인 이상, 필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느낌들이기 때문에, 이들 이념들은 효율성의 외장만을 갖추고 효율성의 느낌만을 제공한다.

정리해보자. 진정성의 이념은 자신의 운동 과정에서 위선성, 자의성, 계량성의 특징을 드러낸다. 진정성의 이념이 움직이는 주요한 무대들을 생각할 때, 감성의 열정적인 움직임을 진정성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나타나는 효과이거나 정치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 때문이지 진정성의 이념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진정성의 이념은 과학의 이념과 대립된다. 인식하라는 스피노자의 유물론과 대립되며, 반증 불가능한 것은, 오류가 없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는 포퍼의 과학 철학과도 대립된다. 또한 위선성을 따라, 타자를 악마화하여 의사소통 불가능한 괴물로 만들고 대안적 노력의 시도 자체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이념과도 대립된다.

그러나 한 편으로, 진정성의 이념은 존재의 이유를,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존재에의 경험을 제공한다. 물론 질문의 해답은 잘 조율되고 약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일상 속에서 존재에의 경험에 다가가게 해주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진정성의 이념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랫동안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 존재에의 경험이 가지는 강력함 때문일 것이다.

진정성의 이념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3000자 남짓한 이 짧은 글에서 다룰 수 없다. 이 글은 단지 인식하고자 하는 시도일 뿐이다. 또한 진정성의 이념은 그 특유의 존재-경험이 대체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극복이나 비판을 말할 수 없다. 진정성의 이념을 어떻게 대할지는 거의 전적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문제다.

부족한 글을 봐주시느라 고생하신 김도원 기자님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신 인권연대에게 감사를 드린다.

한은석씨는 사회 내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