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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리바이어던의 ‘작은 정부’ 사기극(김태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9-07 16:23
조회
233

김태민/ 회원칼럼니스트


 업무상 재해의 인정기준을 설명하던 노무사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20년 이상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 강의하고 투쟁해온 그는 ‘떨어짐 사고’가 얼마나 후진적인 산재인지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떨어짐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을 조사할 때마다 노동자가 안전고리가 성가시다며 안전고리 착용을 거부했다는 사업주의 뻔한 거짓말을 직면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 거짓말을 경찰과 노동부가 의심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결국 경찰도 노동부도 사업주도 한 목소리로 노동자 개인의 과실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로써 노동자의 죽음에 침전되어 있는 구조적 실체는 전적으로 부인된다.


 얼핏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은 의문 제기를 할 수도 있겠다. 노동자는 이미 죽어 그의 진의를 판별해볼 수 없는 노릇이고 사고 현장에 대한 사실관계 역시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 상황인데 경찰과 노동부의 입장에서는 사업주의 말을 믿고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의 죽음이 구조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산업재해의 구조적 실체를 추적한다는 것은 노동이 노동시장과 생산조직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효과를 산출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자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자본 없는 임노동을 상상할 수 없듯이 생산체제 없는 산업재해는 상상할 수 없다. 산업재해의 인과를 살핀다는 것은 노동이 생산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을 살피는 작업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구조’ 자체를 도외시하는 황당무계한 시도는 그 의도부터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따라서 구조 분석은 앞선 의문 제기와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도대체 어떤 성질의 노동시장과 생산조직에 속해 있기에 작업장의 안전보건조치 미비가 노동자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인가? 노동자의 죽음을 개인화하는 이데올로기는 어떤 생산체제의 원리로 구조화되어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떨어짐 사고’를 살펴본다면 업무 중 추락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신체를 조직하는 구조를 표상할 수 있게 된다.


 ‘떨어짐 사고’는 매해 업무상 사고 사망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매해 높은 비율로 반복되는 사고이기에 예측과 예방이 어려운 산업재해로 오해할 수 있지만, 안전장비만 착용해도 ‘떨어짐 사고’의 치명률은 급격히 감소한다. 안전장비 착용 여부와 떨어짐 사망 사고가 높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상관성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면 노동자들이 애써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도록 노동자의 선택이 유도되는 것이 아닌가?


 안전장비 미착용으로 초래되는 안전상의 불이익과 작업속도 향상으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을 비교해 판단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작업속도와 맞바꾸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락사가 안전장비를 애써 착용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합리적인 판단을 마비시킨 외적 요인을 탐문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모든 합리성과 윤리적 판단이 무효화되고 기계적인 생산 활동만이 허용되는 구조적 요인에 도달하게 된다. 노동자의 신체는 작업속도를 위해서 안전수칙을 묵살하고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라고 명하는 조직의 명령 체계에 포획되어 있다.



Capitalism is failing. People want a job with a decent wage – why is that so hard? | Richard Reeves | The Guardian
사진 출처 - The Guardian


 노동자의 죽음에는 조직이라는 계급적 요인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은 실업을 수치스럽고 공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실업을 상상해야 하는 우리의 노동이 노무 계약을 맺은 뒤에도 끊임없이 자본을 곁눈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노동자의 신체는 노동을 정형적으로 구성하는 생산조직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와 강도 높은 노동 사이를 줄타기하며 일생을 소진한다. 내일 또다시 일터에 나오기 위해 생명력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의무의식과 땀구멍을 조여오는 노동 강도는 이중으로 노동자를 압박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를 대표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서글픈 일이 벌어진다.


 최근 고용노동부 장관은 자신의 신체를 잃어버린 노동자의 처지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주었다. 지난 10일 이정식 장관은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IT기업을 찾았지만 보여주기식 의견수렴을 위해 사측 인사들만 만나고 떠났다. 노동 시간을 논의하는 데 노동자가 배제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노동하는 신체를 통제할 수 없는 노동자의 현실을 적실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을 한국노총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이 노동자를 논의에서 배제하는 것은 노동 아닌 돈이 돈을 낳고 자본이 자본을 낳는다는 오랜 자본주의의 신앙에 기초한 것이 아닐까?


 노동 분야의 덩어리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윤석열 정부에서는 자본의 언명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소진하라! 소진하라! 소진하라! 끊임없이 축적하라는 자본주의의 지상과제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소진시켜 자본 증식에 기여하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 어떠한 수단도 용납된다. 유연근무제와 임금체계 개편으로 노동일과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공공지출을 삭감해 공공서비스와 복지의 규모를 축소할 수도 있다. 노동 귀족론과 같은 정치적 공세는 언제나 예상 가능한 지점이다.


 노동 유연화로 경제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현 정부가 작은 정부를 자임하는 모습이 블랙유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현 정부가 경제적인 장에서 한 발 물러나 기업을 포함한 민간 행위자들을 위해 자유로운 경제 플랫폼만을 제공하는 기술관료장치로 축소된다는 생각과 달리 정부는 기업을 대신해 “자유”, “시장”, “반공산”을 운운하며 자본주의의 기본 공리를 선전한다. 장기지속의 경기침체로 자본이 더 이상 이윤을 추출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국가는 새로운 사회적 규정을 수립하고 착취하기 용이한 형태로 근로시간, 임금, 고용의 형태를 가공한다. 이처럼 소위 “작은 정부”라고 불리는 국가 장치들은 노동자들의 생명이 유용되는 방식에 적극 개입한다.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작은 정부”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결코 작아지지 않는다. 정부가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의 파업에 대응해 공권력을 투입할 것이라고 공갈할 때에도 국가가 작아지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장기 경기침체 속에서 국가와 자본 대신 망가지고 해체되는 것은 오히려 ‘사회의 영역’과 ‘공공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사회성’이 무너질수록 노동자의 신체는 더욱 가혹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 벌써부터 각종 퇴행적인 노동 법안과 생산과정 재편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현실이 이러한데도 ‘자유’와 ‘작은 정부’를 자신들의 모토로 삼는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노동자의 신체와 생명이 경제적 야욕에 예속되는 현상마저 “자유”라고 부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