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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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 무분별한 사이다 뚜껑 따기, 김빠진 사이다는 누가 마시나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인 ‘팩트폭력’의 정의는 사실을 기반으로 상대방의 정곡을 찔러서 반박 불가의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다. 혼란스러운 사회속에서 온라인 게시판과 댓글란, 그리고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팩트폭력’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혹은 상대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여지없이 폭로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거침없이 팩트폭력이 담긴 발언을 하는 것은 답답한 사회 문제에 속 시원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사이다’로 묘사된다. 이 현상은 일관, 거짓과 은폐 앞에서 사실을 속 시원하게 드러내는 당연하고도 정당한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이 팩트폭력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SNS에서 오가는 언어에 논리와 도덕적 성찰이 사라지고 있다. 예컨대 ‘팩트’라면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비윤리적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꺼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를 넘은 발언에 팩트라는 말을 얹어 직관적으로 던진다. 이 중 대다수의 경우가 ‘팩트를 이용한 논리적 제압’과 ‘차마 해선 안 될 말’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 경계가 애매해지는 것은 ‘사실’이 자신이 하는 발언의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이기 때문에 말해야 하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존엄을 조롱하거나, 약점을 함부로 폭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사회 윤리로서 지켜야하는 선이다. 이 선을 넘는다면 아무리 정당화 하려고 하더라도, 팩트폭력의 본질은 결국 언어폭력이다. 팩트폭력으로 개인을 비판할 때에 사용되는 ‘팩트’들은 피해자의 개인정보, 가정사와 지인 등 사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의 성형 사실, 이혼한 개인의 가정사. 당사자가 그 사실이 공공연히 적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기본적인 사실은 고려되지 않는다. 한참 만에 돌아온 연예인에 대한 기사 댓글에, 공백기동안 어디 어디를 성형했는가를 분석한 댓글이 수만의 공감을 얻었다. 얼굴 사진에 군데군데 붉게 체크를 하고, 과거의 사진과 정확히 비교한 그 댓글은 ‘반박불가’의 팩트폭력으로 인정받았다. 그동안 사회적, 윤리적 약속으로 정해둔 보이지 않는 선을, 사람들은 ‘팩트폭력’이라는 말을 타고 넘어간다. ‘팩트’라는 말 하나로, 그래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팩트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는 사람은 그 명제가 ‘사실’로 제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방어조차 쉽지 않다. ‘어쨌든 이게 사실이잖아’라는 말은 꽤나 가혹하고도 무섭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대다수의 ‘팩트’가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팩트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팩트는 실은 사실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그 상황과 개인을 대하는 발화자의 가치판단일 뿐인 경우가 많다. 하나의 현상에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판단이 옳다고 다툰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통계가 나와 있는 수치조차 쓰이는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쟁점이 갈리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크게 이는 문제일수록 가치 다툼은 더 심해진다. 서로의 가치관이 팩트라고 다투다가 어느 순간에는 주장이 만연해지고, 무엇이 팩트인지는 희미해진 채 논쟁만이 남는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이슈들이 이렇게 지나갔다. 누군가에게 정답으로 제시하고 휘두를 만큼의 완벽한 팩트는 과연 있는가. 비윤리적 불협화음을 조장하는 소통방식이 사회에서 이기는 화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많은 경우의 팩트폭력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무분별한 사이다 뚜껑 따기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사이다는 뚜껑을 연 즉시 톡 쏘는 청량함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다. 그렇다면 김빠진 사이다는 누가 마시나? 팩트폭력은 사실 우리가 그동안 소통할 때에 지키기로 약속한 ‘질서’를 파기하는 행위다. 모두가 지키기로 합의했던 질서가 사라지면, 피해를 입는 것은 가해자를 제외한 나머지의 사람들만은 아니다. 무질서 속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고정적이지 않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따놓은, 김이 다 빠져버린 그 사이다를 마시는 것은 결국 당신의 몫이다. 당신이 가볍게 휘두른 말, 그리고 그 말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언어폭력이 일상적인 사회. 사회속의 모든 행위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결국, 팩트폭력의 피해는 당신 또한 입게 될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그게 ‘팩트’니까 괜찮을까?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3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74 | 추천: 1
박꽃/ 청년 칼럼니스트 영화 <레미제라블>(2012)에서 주인공 판틴(앤 해서웨이)을 가장 괴롭힌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이들이 그녀가 일하는 공장의 작업반장을 떠올릴 것이다. 지독한 입냄새를 풍기며 판틴을 매일같이 성희롱하다가, 그녀에게 숨겨둔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런 요망한 년, 당장 여길 떠나!”라고 외치는 그 사람 말이다. 진짜 그럴까? 어느 정도 그렇기는 하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녀가 생계를 위협받고 결국 매춘까지 하게 된 건 일자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작업반장은 판틴을 희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를 마음대로 해고 할 권리까지 가지고 있지는 않다. 신사적인 태도로 “여기는 서커스장이 아니니 조용히 해결하시오”라는 한 마디를 뱉고 홀연히 제 볼일을 보러 사라진 사장, 장발장(휴 잭맨)의 허락 없이는 말이다. 판틴을 궁지로 몰아넣은 데에는 사장, 작업반장, 노동자로 이어지는 서열 구조가 있다. 작업반장은 사장의 경영철학을 따르는 임금노동자 즉 부역자이며, 서열 구조를 설계한 진짜 범인은 사장 장발장이다. <레미제라블>(2012)의 판틴(앤 해서웨이) 사진 출처 - 무비스트 서열 구조의 가장 아래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구조가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간단하다.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이 클수록 더 그렇다. 대형 보험사의 설계사로 일하는 나의 엄마는 그래서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사장보다, 같은 사무공간에서 군림하는 팀장을 더 싫어한다. 매일같이 자기 하루에 침투해 실적 압박을 주고, 내키는 대로 퇴근 시간을 늦춰버리는 그 사람 말이다. 당사자에게는 피부로 느껴지는 자기 현실이 가장 힘이 세게 마련이다. 그러나 당사자 아닌 제3자는 상황을 보다 구조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의 사실을 보고 상황 전부를 오독하게 된다. 박유하 씨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그런 문제를 안고 있다. 박유하 씨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남긴 몇 가지 기록을 근거로 들며 그녀들이 일본군보다 조선인 업주를 더 싫어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일부 사실일 수 있다. 매일같이 자신의 일과를 감시하고, 성 노동을 강요하며, 임신하면 낙태를 시키는 조선인 업주를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증명하는 것은 조선인 업주 역시 일본 제국주의라는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위안부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눈길>(2015)의 위안부 소녀 김향기, 김새론 사진 출처 - 무비스트 3월 1일 개봉을 앞둔 영화 <눈길>은 그런 오독 없이 일본군 성 노예의 참상을 전한다. 일본 제국주의, 일본군, 조선인 업주, 위안부로 이어지는 서열 구조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정제된 화법으로 피해자를 보듬는다. 특히 영화는 일부 일본군도 구조의 피해자로 묘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 받은 위안부의 역사를 오독하지 않는다. 최근 명예훼손 소송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박 하 씨에게 이 영화 관람을 권한다. 박꽃씨는 현재 무비스트 취재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3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86 | 추천: 0
강은진/ 청년 칼럼니스트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한 여자 연예인이 찍었던 화보의 컨셉이 논란이 됐다. 매춘여성, 가난한 집의 어린 딸, 지적장애여성 등 사회적 최약자층과, 무구한 소녀의 이미지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이유이다. 화보에 대한 비난에 더해 십대소녀와 성인여성들은 어린 나이에 성희롱, 성폭력을 당한 경험들을 소셜미디어에 털어놓았다. 과거나 현재나 많은 소녀들이 검은손과 눈길에 당해야만 했다. 그녀들이 저항하고 맞서기 힘든 힘을 휘두르는 자들의 논리는 “예뻐서 예뻐해 주겠다는데, 뭐 잘못됐어?”였다. 이런 뻔뻔함으로 그들은 모욕과 수치를 그녀들에게 줬다. 나 또한 십대 때, 대낮의 길 한복판에서 성희롱을 당한 기억이 있다. 소녀들을 향한 성폭력은 문제 있거나 유별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여성이라면 혹은 약자였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당해본 경험이다. 나는 현재 성매매 피해를 입은 여성을 돕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진행하는 일 중 청소녀성매매예방 프로그램이 있는데, 말이 ‘예방’이지 현실은 잔인하다. 우리나라의 청소녀 성매매 최초 피해 연령은 평균 16세로, 가장 큰 계기는 “가출 후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또래 포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청소년 성매매의 70%는 채팅과 친구의 소개로 이뤄진다. 이 배경에는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방송과 스마트폰 어플을 통한 조건만남, 고소득 아르바이트를 가장한 사기처럼 돈만을 좇는 어른들이 만든 문화와 범죄가 있다. 정말 그녀들 스스로 원해서 가출을 한 걸까? 한창 보호받아야 될 소녀들을 가정 밖으로 쫓아낸 것은 누구일까? 길 잃은 그녀들을 “예쁘다.”라는 사탕발림으로 꼬드겨 몸과 성을 돈을 주고 사는 이는 누구인가? 그녀들보다 힘이 있고 돈이 있다는 이유로 유린하고 버리는 그들은 누구인가? 어린 그녀들을 나무라기에 우리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들이 많지 않은가? 과연 소녀들을 손가락질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록산 게이는 “우리는 강간에 관련된 것들을 지나치게 수용하는 문화에 살고 있다”라고 했다. 앞선 화보 문제도 그렇고, 소녀스런 의상을 입고 섹시하게 몸을 흔드는 여자 아이돌, 오디션 프로에서 성적인 가사가 담긴 노래를 부르는 어린 소녀, 판타지로 포장해 미성년자와 아저씨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등, 미디어에 쉽게 노출되는 것들만으로도 셀 수 없다. 우린 너무 무디다. 여성, 그것도 어리고 저항할 힘이 없는 어린 소녀를 향한 성적판타지를 묵인하고 있다. 판타지란 말도 옳지 않다. 판타지란 마법사나 요정, 몬스터처럼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칭해야 한다.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다. 미디어에 묘사된 모습들을 모르고 동경하는 소녀들이 있고, 그녀들을 향한 부적절한 욕구가 있다. 청소년성매매는 결국 몸과 마음이 찢겨 갈 곳 없이 전전하는 소녀들이 늘어나는 사건이자 범죄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혹자는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성인 여성들뿐 아니라 소녀에 장애여성까지 그 피해층이 줄기는 커녕 갈수록 늘어만 가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현재 세계적 인신매매 규모는 2700만 명에 이른다. 무기, 마약 매매와 더불어 3대 국제범죄 산업이다. 그 중 소녀가 75%, 또 그 중 58%가 성착취의 대상이다. 인신매매의 1차적 원인은 성매매 남성들의 착취이다. 성매매가 마치 성폭력을 줄여주는 필요악처럼 말하는 이도 있지만 한국은 성매매 규모도, 성폭력 범죄도 최상위에 속한다.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적인 욕구를 수용할만한 것,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포장하는 언론이나 우리 사회를, 그것에 무딘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소녀들의 행실만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위기의 상황으로 그녀들을 내몰고, 헤어나올 수 없게 돈과 폭력으로 세뇌하는 사회 현실을 바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여린 새싹 같은 소녀들이 봄을 피울 수 있도록 품어줄, 따뜻하고 넓은 들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강은진씨는 책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국문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7년 2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15 | 추천: 1
김정웅/ 청년 칼럼니스트 “... 어느 스터디에 갔더니 장수생이 자기가 공부 좀 많이 했으니까 알려주겠다는 식으로 선배라도 된 마냥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예요. 그 사람 보니까 장수생 진짜 싫더라고. 장수생이 장수생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전문직 자격증 시험, 7·9급 공무원시험, 고등고시, 대기업·공기업 공채시험, 의전원·치전원·약전원·로스쿨 입학시험에 수능 시험까지.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경쟁이 극에 달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넘치는 인력에 비해 만족스런 삶을 영위하게 해줄 수 있는 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는 우수한 재능과 필사의 노력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뒤따라준 소수의 인재만이 극한의 경쟁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다. 이 경쟁에서 승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재수, 삼수의 수험생활을 거쳐 소위 말하는 ‘장수생’이 된다. 일전에 필자가 준비했던 어느 시험도, 이 땅의 시험들이 대체로 그렇듯 응시생에 비해 턱없이 좁은 문으로 인해 장수생이 차고 넘쳐나는 시험이었다. 시험공부를 위해 참여하던 한 스터디에서 비교적 나이가 어렸던 한 수험생은 장수생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사실 그녀가 뒤에 덧붙인 “장수생이 장수생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라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가 잘못된 행동을 한 건 순전히 개인의 인격과 성품, 타인을 대하는 태도 등에 모자람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녀의 말은 시험을 오랜 기간 통과하지 못하는 그의 ‘능력의 부족’까지 함께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말은 남에게 무익한 설교와 훈계를 일삼는 이에 대한 비판이었을 테고, 뒤의 “장수생이 장수생 된 데는...”이라고 덧붙인 것은 불쾌한 감정으로 인해 나온 다소 과격한 언행이었을 테다. 인격의 부족과 능력의 부족을 혼동한 것도 불쾌감으로 인한 감정의 동요 탓이라고 하면 완전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함께 듣던 스터디원도 “그래, 장수생들이 좀 그렇다니깐”이라고 맞장구를 치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그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모인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장수생들에 대해 위와 비슷하게 과격한 견해를 내비치는 글이 게재되는 것을 보며, 이런 식의 혼동이 생각보다 흔히 일어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인력에 비해 자리가 부족한 이 나라에서는 소수의 인재만이 경쟁을 뚫고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재수, 삼수를 거쳐 소위 말하는 ‘장수생’이 된다." 사진 출처 - 이투데이 이런 일도 있었다. 얼마 전부터 한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친구의 말이다. “우리 부장은 일도 하나도 안 하는데 잘난 척 엄청 심하고 애들 잡기만 해. 솔직히 우리 부장이 여기서 나가면 어디 가서도 그 월급 못 받아. 그러니까 회사에 매달려서 월급 도둑질 하는 거야” 사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푸념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흔한 푸념 속에도 개인의 인격적 완성도의 결여와 능력의 부재는 혼동되고 있었다. 사실 필자는 그가 실제로 흔히 말하는 ‘월급 루팡’이라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에서 한 달이라도 더 버티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별도의 비판 사유가 될 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무능한 부장’(그분의 무능력에 대한 증언이 사실이라면)이란 분은 어떤 마음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 어려운 나이. 현업에서 일하는 마지막 공간이 될지 모를 직장에서 한 해, 한 달이라도 더 버텨보려고 애쓰는 그가 시작하는 하루하루는 어떤 기분일까... 그 무엇보다도, 미래의 나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이 무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단언하기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무능력함에 대한 비판이 금지된다면, 오판과 실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 지도자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얼마만큼의 무능이, 혹은 어느 위치의 사람의 무능력함까지가 비판의 대상인지를 규정하는 일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능에 대한 비판 중 일부는,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딘가 모르게 서글프다. 김정웅씨는 사회와 정치의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7년 2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66 | 추천: -1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병신년이 끝나간다. 올해 내내 내 손에 들려있던 다이어리를 읽어보니 ‘나름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누구는 엄마 전화 한통에 가고 싶은 대학 문이 열리고 누군가는 코너링만 잘 해도 편한 꿀보직을 보장받지만, 나에게 올해는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는 한 해였다.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기 보다는 어떻게 될지 몰라 계속 수정해야하는 계획들이었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작년 이맘때 유행했던 노래 ‘백세인생’의 가사다. 아직 누가 데려올 나이는 아니건만, 이십 몇세 젊은 나는 뭣이 바쁘지도 모른 채 쫓겨 왔다. 한 해를 시작하는 자세가 희망으로만 가득 차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XX, 요즘 어떻게 지내?” “잘 못 지내지 뭐…” “아, 저번에 ㅇㅇ회사 최종에서 떨어졌다고 했지?” “응, 이제 그냥 공무원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지 고민하는 거 같더라고.” “XX가 몇 살이지? 내년이면 28(스물여덟)인가? 좀 많긴 하네… 한 살만 어렸어도 일 년 더 준비하라고 말할 텐데.” 잠자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속이 답답해졌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스물 중반을 넘어 확실한 후반기로 접어들었다. 아직도 나를 포함한 내 주변에는 사회 속 자기자리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사실 백수인) 친구들이 많다. 아직 무언가를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한 우리는 정말 뒤쳐진 걸까. 자주 방문하는 취업준비생 온라인 카페에도 이런 글들은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29세 여자입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너무 이상적인 도전일까요? 현실적인 조언 부탁드려요.’ 나라면 당신의 도전을 응원한다고,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북돋아주고 싶다. 하지만 댓글의 ‘현실적인’ 조언들은 그렇지만은 않다. 응원하는 댓글만큼 요즘 취업이 쉽지 않으니 회사 그만두지 마시고 병행하라, 그만두시면 후회할 것 같으니 지금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찾아보시라는 반응도 많다. 흔히들 말하는 ‘청춘’의 무모함을 즐기기에 20대 후반은 너무 늦어버린 걸까. 사진 출처 - Pixabay 그 나이에 기대되는 일정한 행동을 사회학에서는 ‘생애주기’라고 부른다. 10대에는 학교를 다니고 20대에는 졸업 후 취직을 하고, 30대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애들을 키우는 것이다. 이 주기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주위에서는 불안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걷는 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니까. 물론 생애주기는 사회를 반영해 변화한다. 평균 혼인 연령이 점차 올라가 30대 초반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회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 사이에 문화적 잣대가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노미가 발생한다. 요즘 20대는 이 아노미를 지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늦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이 느껴질 땐, 잠시 시대 탓을 하는 거다. ‘나는 시기를 잘못 타고 난 것이다’라고.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하는 자괴감은 한사람만으로 족하다. 생애주기를 벗어나 살면 또 어떤가. 육십 세도 젊고 칠십 세에도 할 일이 많다는 데 20대면 아직 병아리다. 노래처럼 백 살까지 산다면 아직 인생의 3분의 1도 안 살았는데, 벌써 어떻게 살지 다 정해뒀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라 생각한다. 불안해도, 자신의 주기를 만들면서 살면 되는 거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멋대로 내 젊음을 폄하하는 말에 수긍하고 싶지 않다. 나는,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7년 2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48 | 추천: 1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교보문고를 돌아다니다 ‘소논문 작성법’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대학원생인 나는 이거다! 하는 마음에 잽싸게 집어 들었다. 그러나 집어든 책은 대학원생을 위한 책도, 대학생을 위한 책도 아니었다. 고등학생, 특히 학생부종합전형을 준비하는 입시전략도서였다. 책에는 선행연구 조사부터 논문 양식, 간단한 조사방법론 등 고등학생이 15-20페이지의 완성된 논문을 쓰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담겨 있었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최근 지속적으로 선발비율이 확대되어 크게 주목받고 있는 대입 수시 전형이다. 내신, 자기소개서, 학생기록부, 면접을 모두 반영하는데, 특징적인 것은 기존의 학생부교과전형과는 달리 학생기록부의 교과, 비교과 활동을 모두 반영한다. 다시 말해, 내신 성적뿐 아니라 자기소개서와 그 속에 담겨있는 스토리를 보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학생부종합전형은 금수저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과거 입학사정관제처럼 일반 학생은 준비하기 어려운 화려한 스펙잔치로 이어지지 않겠냐는 우려였다. 최근까지 사실이기도 했다. 고등학생을 위한 소논문 작성법 도서를 비롯해 과외 및 대필까지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2016년 서울대학교 학생부종합전형 안내자료 사진 출처 - 구글 그러나 학생부종합전형은 입학사정관제와는 분명히 다르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는 교외 활동을 일체 기록할 수 없다. 특히 사교육 개입 요인이 큰 교외 올림피아드 및 경시대회, 어학연수 등을 기록할 경우 불합격처리 된다. 기록할 수 있는 활동은 진로와 관련한 교내 대회, 동아리, 독서기록, 교내 연구 등 교내에서 이루어진 사항뿐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대표적 문제점으로 꼽히는 교사의 임의적 기재, 학생의 학생부 조작, 소논문 대필 가능성도 점차 축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에서는 작년 11월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개선 방안’을 통해 학생부 관리 기재 절차를 강화하고, 소논문을 교내 연구로 제한하는 등 사교육 개입을 배제하도록 지속적으로 수정·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시와 수능은 일면 공정한 대입의 상징으로서 지금껏 선호되어 왔지만, 되돌아보면 이러한 입시구조가 교과 위주의 단순 주입식 교육과 사교육 과열, 수능 만능주의를 낳은 측면이 있다. 수능과 이를 위한 주입식 교육은 진로에 대한 고민과 자아 성찰을 시간 낭비나 현실도피로 받아들이게 했다. 수능은 “공부를 왜 해야 하죠?” 라는 학생들의 질문에 “좋은 대학에 가야 네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지”라고 답한다.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여러 활동을 하면서 고민해 볼게요”라는 말에는 “네가 여러 활동을 할 시간에 친구들은 수능성적을 올리고 있을 거야”라는 핀잔으로 답한다. 때문에 단순 주입식 교육에 매진해온 나와 같은 세대들은 대학 입학 후 대부분 ‘제2의 사춘기’를 맞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진로가 존재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는 중요한 질문을 우습게도 대학 전공을 이미 결정해버린 이후에 시작하는 것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이 확대되면 많은 학생들은 이러한 고민을 훨씬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유사한 기조로 최근 도입되고 있는 자유학기제, 창의적 체험활동과 결합되면 단순히 학교가 교과과정을 이수하는 기관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경험하고 진로를 탐구하는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까지 해본다. 소논문 작성법이라는 고등학생용 입시도서를 읽으며, 난 안쓰러움과 함께 부러운 감정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이 소논문이 성적 맞춰 대학가고, 대학 맞춰 직장을 결정하고, 직장 맞춰 사는 삶이 아닌,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의 결정의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능점수에 따라 혜택 받는 것이 공평하다는 신념(학벌주의)이 아닌,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많은 문제점들이 있고, 계속해서 보완해나가야 하지만 관심 있게 지켜봐 주자.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에 학생부종합전형은 “그럼 학교에서 같이 찾아보자”라고 대답해주지 않을까.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7년 1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04 | 추천: 1
박꽃/ 청년 칼럼니스트 나는 목욕탕을 좋아한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동네 목욕탕을 찾아가 따뜻한 탕에 목 끝까지 몸을 담그고 노곤한 한숨 소리를 낸다. 과학적인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 앉아 있으면 어깨에 두덕두덕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평소 워낙 좋아하는 차가운 커피까지 한 잔 사서 쭉쭉 빨아먹으며 눈을 껌뻑껌뻑 거리고 앉아있으면, 정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목욕탕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몇 시간씩 버틸 수 있는 곳이다. 습관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다음과 네이버의 뉴스들, 페이스북 담벼락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 또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오고 가는 사사로운 정보로부터 모두 자유로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장소다. 이쯤 되면 아마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그 많은 소식들이 너한테 가서 억지로 척, 하고 달라 붙기라도 했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피난이라도 가는 거냐고. 사진 출처 - Pixabay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내가 접하는 뉴스들은 모두 내가 관심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알고자 한 사안들이다. 나는 대체로는 세상일을 알기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할애하기를 좋아하는 사회적인 인간이라서 여러 가지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뉴스를 ‘구독’한다. 그럼에도 유독 2016년은 그런 인간으로 사는 일이 마음에 큰 부담을 지워주는 한 해였다. 뉴스를 보는 일이 개인에게 심적 부담을 안긴다면, 대개 그 뉴스가 그 사람의 하루를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바꿔놓고야 말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2016년에 벌어졌던 어떤 사건 때문에 한여름의 뙤약볕에 맞서며 강남역 10번 출구 옆에 오래도록 서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며 광화문 광장 근처에 한참동안 머물렀다. 이전에는 결코 그런 일로 그런 때에 그 장소를 찾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두 사건이 아니었다면 보통 나는 그 시간에 필요한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목욕탕 같은 곳에서 말이다. 행동하는 개인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물론 온당하고, 또 멋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이렇게나 자주 통렬한 마음을 품고 어떤 방식으로든 행동을 해야만 하는 나라라면 그곳에 사는 국민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할 것 같다.그 국민이 학생이라면 늘 주어진 공부나 실습을 할 테고,나 같은 생업 노동자라면 매일같이 할당된 노동을 할 테니까. 그러고 나면 대개의 남는 시간에는 다시 돌아올 다음 주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만의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2016년은 많은 개인들이 자신만의 휴식 시간을 과감히 포기하고 사건의 현장으로 걸어 나간 해였다. 2017년에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개인의 시간을 헌납해야 하는 곳에 살지 않았으면 한다. 무더운 여름날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신 늦은 시간까지 시원한 맥주 몇 잔을 마시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나라, 그렇게 시간이 흘러 추운 겨울이 오면 방구석에 틀어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귤이나 까먹으며 TV를 보다가 온 저녁 시간을 다 보내도 괜찮을, 그런 나라이길 바란다. 박꽃씨는 현재 무비스트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1월 1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28 | 추천: 0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웹툰 <무한동력>의 명대사로 꼽히는 이 말은,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용기를 주는 메시지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런데 최근 강연에서 만난 주호민 작가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8년이 지난 지금, 그는 ‘밥’을 선택하겠노라고 말한다. 밥을 먹어야 꿈도 꿀 수 있지 않겠냐는 거다. <짬>이라는 만화를 연재할 당시만 해도 땡전 한 푼 수입 없이 일하면서도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워 만화를 그려왔던 그다. 그가 ‘꿈보다 밥’이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세상이 너무 변해서’다. 경기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생활고로 인한 자살뉴스는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다, 일명 ‘먹고사니즘’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고 한다. 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 이후 경제염려증과 함께, 경쟁과 성장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호로 자리해왔다. ‘먹고사니즘’은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톱니바퀴의 톱니로 살아가게 한다. 안정성이 보장되는 공무원이 어느새 최고의 꿈이 되어버린 중고생, 바늘구멍보다 좁다는 취업문을 뚫기 위해 1분을 아끼려고 컵라면으로 밥을 때우는 청년층, 희망퇴직과 권고사직을 피하기 위해 책상을 잡고 버티는 기성세대, 또 ‘절대적 빈곤’상태에 놓여있는 노년층까지.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 톱니들에게는 ‘생계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을 수가 없다. 꿈을 좇는 ‘낭만’이 있었던 8년 전, 주호민 작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거다. ‘못 이룬 꿈보다는 당장 못 먹는 밥이 피부에 와 닿는다’는 지금의 그의 말을 미루어보면, ‘먹고사니즘’을 무작정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비판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사실 ‘먹고사니즘’은 개인의 생존만을 1순위로 생각하는 탓에 정작 공동체가 먹고 사는 문제는 도외시한다는 치명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먹고사니즘’의 연관검색어는 곧 ‘각자도생’, ‘적자생존’이기 때문이다. 이 ‘먹고사니즘’이 집단적으로 발현되면 그 효과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먹고사니즘’을 신봉하는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에는 침묵하는가 하면, 자신의 밥그릇에 불이익이 될 것을 염려해 사회문제에 의문을 갖거나 비판을 가하는 행위 자체를 삼간다. “내 일이 아니면 상관없어.” 잘게 쪼개져 분자화된 개인들은 밥을 먹고 필요한 것을 사는 본능적 행위에 몰두한 나머지, 이 원초적 본능에 중독된 나머지 사회적 아젠다에는 관심을 쏟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먹고사니즘’으로 인한 밥벌이의 애환은 개별적 감정일 뿐, 내 일이 아니라면 노동과 복지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에는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치 자체를 적대시하는 태도나 분위기가 어느 새부터 우리 사회에 만연해졌다. 먹고사는 문제를 챙기는 것은, 따지고 보면 개인 윤리의 문제이기 전에 체제가 낳은 괴물이다. 하지만 ‘생존’과 ‘안정’이라는 가치를 주입시키는 이 ‘먹고사니즘’ 신화는 올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균열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먹고살기 위해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수많은 개인적 주체들이 정치적 행위자로서 변태(變態)하게 된 것은, 이번 사태에서 시민들이 느낀 ‘자괴감’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 하반기 봇물처럼 터진 국정농단 사태는 이 사회가 노오력과 안간힘이 전혀 통하지 않는, 철저히 기득권층 위주로 돌아가는 전근대적 계급사회였다는 것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사회, 그럼에도 치열하게 살라며 ‘먹고사니즘’을 권하는 사회…. 헬‘조선’의 백성 개개인의 ‘먹고사니즘’ 꿈을 꺾어버린 작금의 사태는 한 나라의 왕과 간신, 그리고 수많은 부역자들이 법률을 유린하고 나랏돈을 횡령한 결과였다. 이는 곧 백성들이 체제의 순응자가 아닌, 체제를 허물 수 있는 정치적 참여 주체로 이행되는 과정이었다. 하루하루 밥벌이의 고됨을 견디어 왔던 2016년 대한민국의 민주 시민들은 이제 ‘먹고사니즘’을 내던지고 횃불보다 더 오래 가는 ‘LED 촛불’을 들고 거리로,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함께 살자’고. 사진 출처 - ytn ‘먹고사니즘’의 반대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먹고사니즘’과 ‘함께사니즘’은 서로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먹고사니즘’ 시대에서는 밥그릇이 곧 책임이다. 가장의 책임, 노동자의 책임, 취준생의 책임, 수험생의 책임…. 하지만 대부분 개별적 책임에 머물러있는 탓에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이기적 유전자가 작동하곤 했다. 두 달여간 이어진 촛불집회는 이 개개인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금껏 900만 명에 달하는 전국의 시민들은 촛불과 함께 갖가지의 책임을 들고 나왔다. ‘1번 당’과 ‘그 분’의 열성지지자인 60대는 자식세대에게 미안함을 토로했고, 20대 청년은 ‘먹고사니즘’에 눈이 멀어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자괴감과 미안함,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시민들의 목소리는 ‘이게 나라냐’라는 고함으로 울려퍼졌다. 결국, ‘함께사니즘’은 ‘먹고사니즘’의 반대말이 아니라 확장형이었다. 며칠 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한 잔하며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XX야, 진실을 밝히고 이 나라가 조금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떳떳한 엄마가 되었을 때, 그 때 널 그리워하고 슬퍼할게. 미안해….” 2014년 4월 16일,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세월호 희생자의 어머니는 지금 나라를 규탄하는 촛불들이 뒤덮기 훨씬 전부터 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었다. 삶의 주체였던 평범한 사람들은 죽임에 맞서며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 마찬가지다. 이들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듯, 정치적 주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혹은 몇 십 년 후 누군가에게 떳떳해지기 위한 책임감이 광장으로 나오도록 그들의 발을 이끌었다. 광화문의 촛불은 이제 파란 지붕 아래 ‘그 분’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만 타오르는 것이 아니다. ‘성과연봉제 폐지하라’, ‘노동개악 저지하라’, ‘세월호를 인양하라’, ‘사드배치 반대’ 구호는 피해자들의 것만이 아니다. 지금 광장에서는 모두가 ‘먹고사는’ 숭고한 문제를 불러내고 있다. 역사(史)는 사람(人)과 입(口)이 합쳐진 문자와 같다. 사람이 입으로 하는 것 중 먹고 살기 위한 가장 본능적 행위는 역시 밥을 먹는 것이다. 즉 역사는, 사람이 밥을 제대로 먹기 위해 투쟁해온 과정이다. 2016년의 겨울, 우리는 이미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어느새 연말이 다가왔다. ‘함께사니즘’의 온기는 한동안 식지 않을 전망이다. 앞으로도 광화문 광장에는 동그란 밥알 같은 촛불들이 붉은 불빛을 내며 알알이 박혀있을 것이다. 이제, 그 촛불들의 따뜻한 온기로 ‘함께 먹는 밥’을 지을 차례다.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7년 1월 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26 | 추천: 1
강은진/ 청년 칼럼니스트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에는 ‘아젤라스트’(agelaste)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는 “웃지 않은 사람, 유머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신조어다. 깊은 의미에서 아젤라스트는 우리 개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세계를 위협하는 적이다. 그들은 웃을 줄 모르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와 똑같다는 확신을 가진다. 더해서 통속적인 생각과 ‘키치’(본래 ‘저속하고 유치함’을 뜻하나 쿤데라는 여기에 더해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꾸미려드는 조악함’을 추가함)가 특징이다. 이는 우리 국민이 현재 싸우고 있는 정부의 모습이 아닌가? 세월호 사건 이후, 고통의 값을 돈으로 환산해 유족들에게 선심 쓰듯 미소를 짓는 정부는 진정 웃음을 모르는 아젤라스트들이었다. 지금과 같이 촛불의 열기가 전국을 뒤흔들고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돌아볼 줄도 모르고, 자신들의 뜻이 옳다고 고집한다. 국회의 탄핵 결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언젠가 끝나리라” 여기며 뻔뻔스레 버티고 있다. 대국민 담화는 또 어떠한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지층에게나 통할 눈물의 사과는 '키치'의 극치였다. 정부뿐 아니라, 이 사건에 얽힌 부패한 재벌, 검찰, 언론, 관료집단은 명령과 규율뿐인 복종의 세계 속에 머무르며 진실을 가리고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 플로베르는 “현대의 멍청함은 완전한 무지가 아닌, 판에 박힌 언행의 반복”이라 했다. 이 얼마나 멍청한 시스템인지. 이번 사건으로 최근 제일 많이 듣고 스스로도 물었던 질문은 “무엇에 가장 상처받았고 분노하는가?”였다. 아무리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현대사회라지만 나름대로의 개인적 신념이 있어 정의를 믿고 국가를 사랑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럴 것이다. 이를 지켜줄 의무가 있는 정부는 사상누각에 불과했고, 심지어 우리 모두의 믿음을 배반하고 조롱했다는 점에 화가 많이 치밀었다. 더 원초적인 분노는 “무언가를 마음 놓고 즐길 여유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최근 시국선언으로 유명했던 한 초등학생이 “한창 게임 레벨업 해야 할 때, 친구들과 노는 얘기, 즐거운 얘기가 아닌, 나라 걱정을 하게 해줘서 참 감사하네요”라고 말한 것처럼 주말마다 벌어지는 아젤라스트와의 전투와 나라 걱정에 지칠 때도 많다. 사진 출처 - 뉴스1 사진 출처 - YGSU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에 참가하는 우리 국민들의 모습은 정말로 큰 위로가 된다. 심각하게 구호를 외치고 소리를 지르지만, 지치지 않기 위해 웃음을 나누려는 노력도 있다. ‘그만두유’처럼 시국을 반영하여 만든 패러디 상품과 개사한 대중가요가 인기를 끌고, 각종 재치 있는 깃발과 퍼포먼스처럼 긴장과 고단함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정부와 부패 집단들은 시민의 인권을 뭉개고 기계적인 꼭두각시들을 만들고자 했겠지만, 국민은 증명했다. 우리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인 개인에 대한 존중과 독창적 사고를 그들에게서 잃지 않았고, 지켜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원동력으로 싸우고 있다. 본래 아젤라스트들은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과 큰 마찰을 빚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 국민들이 집회에서 보여준 앞서 말한 풍자와 퍼포먼스를 비롯하여, 꽃차벽이나 1분 소등, 수많은 촛불들을 보면 이미 예술의 영역이다. 쿤데라는 “예술은 항상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의 실존과 그 정신을 담고 있다”고 했다. 진정으로 즐기고 웃을 줄 모르는 아젤라스트와의 싸움에서 결과는 뻔하다. 항상 승자는 웃는 자이며, 가장 오래 아름답게 웃을 것이다. 강은진씨는 책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국문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2월 2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03 | 추천: -1
김정웅/ 청년 칼럼니스트 올해 하반기 드러난 부끄러운 이 나라의 민낯은 차마 일일이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민중 혁명과 민주화, 평화적 정권교체까지 이뤄낸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는 국민들이 고생스럽게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 나 역시 이 20대 청년으로서 가까운 친구들과 시국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와중에 한 친구가 던진 다소 되새겨볼만한 질문 하나에 며칠을 고민했다. “그 시위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애들도 있던데... 걔네도 이 사태에 대해 알고 나오는 걸까?” 필자는 이것이 의미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런 생각을 하는 시민들이 그 친구 이외에도 상당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 원숙하지 못한 초·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오는 것은 단순히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사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존중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꼭 지켜야할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니까. 사진 출처 - 비디오머그 하지만 필자는 조심스럽게 그만한 학생이면 시위 나오기 충분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내고 싶다. 4.19 혁명 당시 한성여중 2학년이던 진영숙 학생은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채 혁명에 참여했고, 결국 날아온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또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은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말라’며 시위에 나섰고, 이후 수없이 많은 고등학생들이 혁명에 참여해, 결국 하야를 이끌어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때의 초·중·고등학생이라고해서 지금과 다르게 월등히 우수한 학생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 역시 지금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해한 범위 안에서 지금의 정권이 불의하다고 판단해 혁명에 뛰어든 것이며, 그렇게 정권 퇴진에 기여한 것이다. 역사는 이들에 대해 ‘휩쓸려 나온 아이들’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우리 현행 헌법 11조에는 ‘모든 국민은 평등하며 … 누구든지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하여 정치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21조에는 ‘모든 국민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학력에 관계없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자신의 판단 하에 집회 결사를 통해 정치에 참여할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받는다. 주말마다 서울 한가운데서 촛불을 밝히러 오는 전국의 초·중·고등학생들을 응원한다. 김정웅씨는 사회와 정치의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2월 1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8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