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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검사들의 노블레스 계급투쟁(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9-16 17:24
조회
3269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의사들의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집단행동을 보면서 울화가 치민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쌓아 올린 학력주의라는 바벨탑의 꼭대기에서 자칭 ‘전교 1등’들이 벌인 광란의 질주는 병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돌아보게 했다. 더 높이 올라가 더 많이 먹겠다는 저들의 탐욕이 아무런 수치심 없이 전국에 생방송 되는 현실이 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보면서 검사들을 떠올린 것도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사짜’라서만이 아니다. 학력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이유로 부와 권력의 독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만함과 자신들이 이 나라의 시스템을 결정하는 주체인 것처럼 사고하는 비민주적 성향이 닮아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의사와 검사(판사) 등 이른바 ‘사짜’들의 부와 권력을 보장해 왔다. 최근의 의란(醫亂)과 검란(檢亂)은 정부가 그 공고한 기득권에 균열을 내려 하자 벌어진 도발이다. 나는 두 노블레스 집단의 이기주의로 대표되는 ‘부자들의 계급투쟁’이 우리 민주주의와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라는 방패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 진료거부가 밥그릇 싸움이라는 점은 대체로 쉬이 인정하지만, 윤석열 검찰의 검찰개혁 저지 투쟁이 밥그릇 싸움이었다는 데는 토를 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의사들의 경제투쟁과 달리 검사들의 경제투쟁은 정치투쟁(권력감시)의 외피를 쓰고 은밀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검찰의 경제투쟁이란 수사권과 기소권을 양손에 쥐고 있어야만 여의봉처럼 효과가 극대화하는 전관예우 시스템의 영속화이며, 그것을 분리하려는 검찰개혁 시도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다. 의사들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진료권을 버렸다면 검사들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수사권을 남용했다.) 사안이 크든 작든 권력감시라는 명분이 있는 한 검찰은 일종의 ‘까방권’을 천부인권처럼 보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검찰의 조국 일가 수사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무리한 수사였으며 사실상 실패한 수사였음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검찰을 향한 비난이 크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개혁을 하려면 티끌 같은 잘못도 있어선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됐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주어져 있던 부와 권력을 나누는 개혁은 백 년이 지나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라는 비판은 반개혁 수구세력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이자 방패가 되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정치적 순수주의에 빠진 원리주의자들


 문제는 진보 인사들 사이에서조차 인식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에 대한 판단이 세상의 전부가 돼버린 진중권이나 서민 같은 사람은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가 버렸다. 최근엔 또 다른 차원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 정태인은 최근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검찰개혁? 중요하다. 그러나 불평등 위기보다 중요한가? 3년 넘게 종부세 안 올린 게 촛불 정부인가? 언론 개혁? 중요하다. 조중동은 악성 바이러스, 맞다. 그러나 기후위기보다 중요한가? 3년 넘게 4대강 보도 그냥 두는 게 촛불 정부인가?”


 불평등과 기후위기가 검찰개혁이나 언론개혁보다 더 중요한, 상위의 과제라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사실 이 정부는 언론개혁을 말한 적이 없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차원이 전혀 다른 주제를 견주는 방식의 비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부는 불평등이나 기후위기 문제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이에 대해 유능하지 않다는 정태인의 주장에는 나도 동의한다. (실은 유무능을 따지기 전에 쁘띠부르주아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계급적 한계를 지적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찰개혁 필요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검찰개혁은 2016~2017년 촛불항쟁 과정에서 차기 정부 개혁과제 1순위로 꼽혔던 사안이다. 그만큼 우리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했던 실체적 위험이었다. 더구나 수구세력은 검찰개혁 저지를 위해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조국 사태’에 이은 최근의 추미애 장관 흔들기는 그 일환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피디 성향의 평등파들 사이에서 정태인류의 인식이 자랑스레 전시되는 현상은 자못 우려스럽다. 나는 그들이 검찰이란 집단의 파괴력과 상징성을 무시하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정치적 순수주의에 빠져 환상을 좇는 원리주의자들의 옹알이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수구세력의 사법적 날개가 된 검찰


 수구세력이 검찰개혁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검찰이 수구세력의 주요 진지이자 요새이기 때문이다.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공권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물리력(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형집행권)을 독점하는 검찰을 수구세력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활용해 왔고, 그 과정에서 둘 간의 정치적 연대가 형성됐다. 여기에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재벌권력이 가세하면서 수구세력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됐다. 요컨대, 반검찰개혁 전선은 수구세력 계급투쟁의 최전선이다.


 검찰에 있을 때 정의의 사도처럼 행세하던 최재경 같은 이들이 자연스레 재벌의 앞잡이가 되는 상황은 검찰이 수구세력의 사법적 날개가 된 현실을 웅변한다. 비단 최재경만이 아니다. 황교안 같은 공안통들은 권위주의 정권에 복무하면서 정치적으로 활로를 찾았지만, 이종왕 같은 특수통들은 퇴직 후 재벌의 손발이 되어 돈을 버는 쪽을 택했다.


 평소 검찰 독립을 목 놓아 부르짖는 열혈 검찰주의자들 가운데 퇴직 후 재벌의 앞잡이가 된 선배 검사를 비판하는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검찰에 있을 때는 권력을, 퇴직하고서는 부를 누리는 것이 자신들의 당연한 출세 코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단추는 잘못 꿰었지만 이제라도


 검찰개혁을 포함한 사법개혁의 최종 목표는 ‘돈으로 법을 사는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시민이 기소에 참여하는 기소대배심,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재판의 전면 도입을 통해 검사와 판사들의 재량을 줄이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핵심 고리는 이름도 아름다운 ‘전관예우’를 혁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검찰을 길들여 자신의 칼로 사용하는 쪽을 택했고, 그 칼에 제 손을 베었다. 이른바 추미애 라인으로 검찰을 장악한 것은 당장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으나, 하책 중의 하책이다. 나는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의로운 검사라서 추미애 장관과 문재인 정부 편에 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수처가 설립되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제2의 대검 중수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반복적으로 경고해 왔다. 과연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수사와 기소 분리를 포함한 2단계 검찰개혁을 수행할 수 있을까. 문재인의 검찰 개혁이 여기서 멈춘다면, 노무현의 만시지탄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돌리는 사탄의 맷돌


 다시 서론으로 돌아가 보자.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대체 누가 저들을 이토록 뻔뻔한 공감력 제로의 괴물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졌다. 때마침 전교조가 받아든 대법원의 파기 환송 판결은 이 땅에도 한때 참교육을 향한 열망이 있었으며, 경쟁 일변도의 숨 막히는 승자독식이 아닌 다양성과 협동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있었음을 상기하게 했다. 너무나 오랜 고통 끝에 뒤늦게 찾아온 정의 앞에 전교조 선생님들은 기쁨보다 망연자실한 감정이 더 크지 않았을까, 나는 홀로 안타까웠다. 그리고 전교조를 빨간색으로 색칠하고 악마화하는데 앞장섰던 <조선일보>를 떠올렸다. 그 시각에도 조선일보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옹호하고 정부를 규탄하느라 시커먼 지면을 궤변과 거짓으로 채우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맹비난하던 입으로 의사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그 일관된 비일관성만은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전교조와 386세대는 조선일보와의 싸움에서 졌다. 패배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기득권의 일부가 되었고, 2030세대는 386보다 더 철저하게 성과주의에 빠져있다. 학력주의가 지배하는 이성의 폐허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돌리는 사탄의 맷돌을 멈출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나는 진영논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그 편에 서겠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