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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세대’가 드러낸 교육 불평등(임아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9-09 14:38
조회
293

임아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엄마, 연계형 가고 싶은데.”


 9월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첫째 아이가 학교에 간 횟수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학교 수업은 가정에서 하는 원격수업으로 대체됐고 친구들과의 교류는 요원하다. 모든 아이들이 집에 갇혀 있어 ‘코로나 세대’라는 말도 나왔다. 아이는 자주 말한다. ‘연계형 돌봄 교실’에 가고 싶다고.


 지난 7~8월 맞벌이인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집에 둘 수 없었다. 첫째는 돌봄 교실에, 둘째는 어린이집 긴급보육 시스템에 의지했다. 8월부터 수도권에 코로나 재확산세가 심상치 않아지자 기관에서 코로나가 확산되면 어떡하나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둘 다 회사를 가야하니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학교에 가고 싶어했다. ‘연계형’ 돌봄교실에 가면 같이 ‘블레이드(팽이)’를 접어 돌릴 수 있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연계형’에 가고 싶다는 아이에게 차마 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이는 ‘친구들과의 놀이’를 그리워했으니까.


 지난 7월 일주일에 하루씩 학교에 갔을 때 아이에게 물었었다. “오늘 친구들하고는 잘 지냈어?” 아이는 손사래 쳤다. “엄마, 친구들하고 말하면 안돼. 선생님이 코로나 위험하다고 쉬는 시간에 노는 것도 조심하라 하셨어.” 급식을 먹을 때도 말할 수 없는 학교. 그러나 돌아보면 그조차도 ‘교류’였다. 어느 주말 외삼촌이 놀러오기로 했다가 정부종합청사에 확진자가 나오면서 약속을 취소했다. 정부청사에는 내가 담당하는 금융위원회 기자실이 있었고 확진자와 동선이 겹치지 않았지만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이는 기다렸던 외삼촌과의 만남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소리 내어 울었다. “코로나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라고 말하며. 약간 격하게 우는 아이를 보며 아이들의 ‘상심’은 어른들의 답답함과 차원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4주간 집에 갇혀 있는 ‘코로나 세대’를 키우며 작은 아이들의 배움에 대해 생각한다.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를 배워갈 나이에 ‘만남’이 단절된 아이들 세대의 배움에 대해서. 그런 와중에 일부 과학고에서는 계속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한 국회의원의 문제제기를 들었다.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적어 밀집된 환경이 아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었다.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 팬데믹은 아이들의 배움 앞에서도 평등하지 않다.


 코로나 확산 이후 1년 정도가 지나면 아이들의 ‘학습 격차’가 통계로도 증명되기 시작할 것이다. 맞벌이 부부지만 퇴근 후에 매일 아이 학습 진도를 체크하고 아이가 다 하지 못한 숙제를 도와줄 수 있는 우리 집은 그나마 낫다. 생계 걱정 때문에 돌봄을 신경 쓸 수 없는 한부모 가정이라면, 젊은 부부들만큼 아이들 학습을 도와줄 수 없는 조부모 가정이라면 어떨까. 두 아이를 낳고 돌봄의 위기를 여러 번 넘었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한 존재를 온전히 돌본다는 것은 부모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마을에서 키워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코로나로 드러난 우리의 돌봄·교육 환경은 어떤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사회인가.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코로나 초기에도 학원들은 문을 열었다. 미취학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대형 영어학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전화해 항의했다. “바이러스 확산 위험 때문에 학교가 닫았는데 학원에서 밀집된 환경으로 지역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영세한 학원도 아니고 답답했다. 학원 선생님은 대답했다. “열어달라는 학부모님들의 요청이 많아서요.” 바이러스가 퍼질까 걱정하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들은 열심히 사교육을 받았다. 왜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영어 사교육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제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이 아니라 불평등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역설적으로 ‘물리적 공간인 학교’가 사라져버린 지금 우리는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교육의 불평등을 더욱 실감하고 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코로나 학습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임아영 위원은 현재 경향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