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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 혹은 애국 사태(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9-25 15:33
조회
211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 주변의 애국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상 징후가 감지된 것은 추석 연휴 때부터입니다.


 가족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 연휴, 지난해까지만 해도 스스로 노빠라고 말하는 형과 박정희를 신으로 알고 살아오신 어머니는 빨갱이와 매국노 사이를 오가며 사뭇 심각한 사태를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새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야당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삭발하고 검찰의 칼질이 시작되자 뻔 한 언론들이 게거품을 물고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머니와 형은 이번 조국 사태(?)를 놓고 누가 더 진정한 애국자인가를 놓고 한바탕 소란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역시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전략’으로 대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적당히 술에 물 타고 물에 술을 탔다가는 정말 큰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온 가족이 점심을 먹고 상을 물린 다음에도 두 애국자는 별 다른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TV에서 추석 민심 어쩌고 하는 뉴스가 나오고 있는데도 어머니와 형은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습니다. 그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 막 고등학생이 된 막내 조카의 여자 친구 이야기, 암투병 중인 작은아버지 걱정 등등 그야 말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추석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애국심만 빼면 이렇게 평화로운 가족 모임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두 사람의 열렬한 애국심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저는 한편으로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며칠 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일곱 명의,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었으니 다양한 직업만큼이나 다른 생각들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는 저에게 ‘종북’이라고 화를 냈던 친구도 있고 늘 뜨뜻미지근한 제 태도를 타박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월수입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지만 대부분 애국자들입니다. 그래서 번번이 크고 작은 애국 논쟁이 벌어집니다. 술잔이 깨질 정도의 큰 다툼이 일어나 원수처럼 지내다가도 이렇게 또 만나곤 했습니다. 조국 사태는 점점 어디가 어디인지를 모를 만큼 거의 미쳐가는 지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대학총장, 표창장, 사모펀드, 5촌 조카, 반대 시위 또 다른 반대 시위 등등 수많은 애국자들이 여기저기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는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역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는 애국적 견해가 특히 다른 두 친구의 싸움이 걱정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또 술잔이 날아다는 지경에 이를까 불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은 또 빗나가고 있었습니다. 술잔이 여러 번 돌았음에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저 그런 소소한 자기 사는 이야기만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요즘 경기가 너무 좋지 않다거나, 몸이 좋지 않아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친구 걱정, 아이들 자랑 등등이 주된 화제였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술잔이 돌고 잠시 아무 말도 없을 때, 저에게 종북이라고 비난했던 친구가 황교안 씨의 삭발 사진이 있는 기사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드디어 시작되나 싶었는데 그 친구의 표정은 무척 덤덤했습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어휴... 이런 한심한 새끼를...”


 그러자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습니다. 잠시 후, 저에게 뜨뜻미지근하다고 타박해온 친구가 그에 답이라도 하듯이 한마디를 했습니다.


 “조국이 말고는... 사람이 그렇게 없나?”

무슨 선문답 같은 대화를 끝으로 그날 술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어 갔습니다. 우려했던 애국적 싸움이 없었던 것 때문일까요, 갑자기 피곤이 몰려 왔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술자리에 둘러앉은 모두가 너무 피곤해서 입조차 떼기 힘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9월 25일 오전 충남 천안시 대전지검 천안지청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을
응원하는 지지자와 사퇴를 촉구하는 보수단체가 팻말을 들고 각각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혼란하다 혼란해...’


 이쪽 애국자도, 저쪽 애국자도, 이쪽도 저쪽도 아닌 애국자도 정말 피곤하기만 합니다. 그러는 동안 검찰 개혁은 이렇게, 이런 식으로 물 건너가는 것일까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