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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버스(김창남)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1-28 10:54
조회
351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봄과 여름에 걸쳐 5개월간 독일 베를린에서 안식 학기를 보냈다. 5년 전에 이어 두 번째 베를린 체험이다. 베를린의 일상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가운데 하나가 전철과 버스다.


 베를린 전철은 두 종류가 있다. 주로 지하를 다니는 U-Bahn과 좀 더 빨리 지상과 지하를 다니는 S-Bahn이 있다. 베를린의 전철은 매우 심플하다. 지상에서 몇 계단 내려가면 바로 기차를 탈 수 있다. 개찰구도 없고 승무원도 없다. 표를 사는 판매기와 표를 체크하는 기계가 덩그마니 서 있을 뿐인데 이 앞에 서서 표를 사거나 체크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있어도 대부분 잠시 다녀가는 관광객들로 보인다. 관광객들은 필요에 따라 1회용 티켓, 하루 티켓, 48시간 티켓 등 다양한 티켓을 사서 쓸 수 있다. 전철을 많이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기권을 사서 쓴다. 예컨대 79유로 짜리 패스를 사면 한 달 동안 전철, 버스, 트램을 횟수 상관없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일찍 다닐 일이 별로 없는 나는 오전 10시 이후에만 사용할 수 있는 패스를 샀는데 이건 59유로다. 개찰구도 없고 승무원도 없으니 얼마든지 무임승차가 가능하다. 버스의 경우에는 앞문으로 타면서 운전기사에게 표를 보여주는 게 원칙이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건성으로 보거나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게다가 중간문이나 뒷문으로 타는 승객들은 아예 표를 꺼내지도 않는다. 물론 이따금 검표원이 다니면서 버스나 전철 승객의 티켓을 확인하기도 한다. 티켓 없이 무임승차한 게 걸리면 당연히 적지 않은 벌금을 물어내야 한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더라도 검표원을 만날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러니 독일에도 당연히 무임승차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방식을 계속 유지하는 건 그만큼 시민들의 의식을 믿기 때문일 게다. 말하자면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규정을 지킬 것이라는 전제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가만 놔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규정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모든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비용이 적지 않게 들어간다. 만일 한국 전철을 이런 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표를 안 사서 결국 전철 사업이 망할까? 글쎄, 그럴 것 같지 않다. 아마 한동안은 조금 문제가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런 방식이 정착할 것이라 생각한다. 국가가, 혹은 시스템이 시민을 신뢰하면 시민의 의식과 행동도 그에 맞게 변하지 않을까? 국가가, 혹은 시스템이 시민을 신뢰하면 결국 시민도 국가와 그 시스템을 신뢰하게 되지 않을까?



사진 출처 - 필자


 베를린에서 버스를 타다보면 몇 가지 한국과 다른 점을 발견한다. 우선 버스 모양이 다양하다. 두 칸을 연결해 엄청 긴 버스도 있고 2층 버스도 많다. 내부의 구조도 버스마다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버스에는 반드시 중간 쯤에 의자가 놓여있지 않은 꽤 널찍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처음엔 왜 이렇게 비어놓았을까 싶었는데 궁금증이 해소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 공간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 보행기를 끌고 다니는 노인,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모들을 위해 확보된 공간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탈 때 버스 운전기사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는 이 장애인을 안전하게 태우고 내리는 일이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면 우선 버스 전체가 인도 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운전기사는 출입문 안쪽 바닥에 접혀진 채로 있는 보조 판을 젖혀 인도 쪽으로 펼치고 휠체어가 버스로 올라올 수 있게 돕는다. 휠체어 탄 장애인이 안전하게 탑승한 게 확인되면 그때 다른 승객들이 탈 수 있게 앞문을 연다. 다른 승객들은 휠체어 탄 장애인이 안전하게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릴 때도 다르지 않다. 운전기사는 우선 장애인이 편하게 내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내가 목격한 모든 경우에서 버스 기사가 장애인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투덜거리거나 볼 멘 소리를 하는 승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탑승, 혹은 하차시키는 운전기사의 조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휠체어나 유모차가 접근할 수 없는 한국의 버스들이 떠올랐다. 우리 버스도 저런 식으로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장애인 승하차로 생기는 잠깐의 지체와 불편을 참지 못해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건 아마 앞의 티켓 시스템보다 실행되기 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