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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이라는 말(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1-21 15:13
조회
585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인생체험이 담겨있다. 그래서 ‘말이란 삶의 각주’라거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표현이 생겼다. 사실이 있어야 사실에 대한 해석이 나올 수 있듯이, 말에 앞서 삶이 있다. 그러므로 말의 힘은 ‘말의 강도(强度)’보다는 ‘삶의 정도(正道)’에 좌우된다. 바르게살기와 무관한 ‘세게 말하기’는 막말을 낳기 십상이다. 조리 없이 마구 말하는 사람은 원칙 없이 마구잡이로 산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까 문제는 막말이 아니라 막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후안무치한 것은 삶이지 말이 아니다.


 이치에 맞는 말을 하려면, 도리에 맞게 살아온 삶이 먼저 있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도 필요하다. 삶의 경험을 말로 옮기려면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겪자마자 그것을 조리 있게 정리해서 말하기란 어렵다. 경험을 되새기는 반추(혹은 성찰)라는 사유 활동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저절로 일어나지도 않는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가 되고, 보물을 세상에 내놓으려면 생각에 공을 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사유 절차를 생략하고도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되는 대로 내뱉는 말은 보배가 아니라 막말이 되기 쉽다.


 우리네 마음의 공명통을 울리거나 미혹(迷惑)을 일깨워주는 말은 옳게 살아온 삶에 기초한 성찰적 사유의 산물이다. 살아온 삶에 대한 정직하고 치열한 성찰이 뒷받침되었을 때만 심금을 울리는 말, 정신을 차리게 하는 말을 할 수 있다. <광장>과 <화두>의 작가  최인훈은 치열한 자기 성찰적 글쓰기를 통해 그런 보배로운 말을, 그것도 한국어로(!) 많이 남긴 대표적 인물이다. 운 좋게(아니 복되게) 가까이서 그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시절의 인연에 연연해서 사심을 담아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한국 근대정신사 최고의 봉우리”(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로 상찬되고 있다. 사사로운 게 있다면, ‘역사 서당’ 출신이기 때문에 최인훈을 작가보다는 역사철학자로 보려는 욕망이 문인 마을에 거하는 분들보다 크다는 것 정도다.(물론, 나는 최인훈이 “전후 최대의 작가”라는 김현과 김윤식의 평가에 동의한다.)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최인훈의 치열한 자기 성찰적 글쓰기와 관련하여 흔히 부정적 뉘앙스로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작 ‘관념적’이라는 말의 힘을 알지 못하는 소치다. 관념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지적 제스처나 오로지 작위적으로 꾸며낸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현실경험을 이모저모 깊이 생각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의식의 힘을 뜻한다.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호모사피엔스(슬기인간)라는 말의 뜻을 떠올린다면,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가장 확실한 존재증명이다.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최인훈, 「하늘의 뜻 인간의 뜻」)가 관념인 것이다.


 문학 창작과 비평을 포함해서 일체의 지식과 사상은 관념의 움직임이 빚어낸 사고실험(thinking experiment)의 산물이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하가 처음 사용한 용어인 ‘사고실험’은 단순히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상황을 변화시키며 상상하고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우리는 현실에서는 중력을 없앨 수 없지만 사고 속에서는 중력을 없앨 수 있다. 이렇게 중력이 없는 상황을 가상하고 그런 상태에서 지적 실험=상상을 하는 것이 사고실험이다. 아인슈타인은 현대의 우주비행사들이 실제 우주공간에서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기 한참 전에, 바로 이런 식의 사고실험을 통해서 아주 적은 질량이라도 에너지로 변화하면 빛의 속도의 제곱을 질량에 곱한 천문학적인 값이 생긴다는 유명한 E=MC²이란 식을 만들어냈다. 그의 상대성이론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만들어진 우주적인 과학이론이라는 우스개가 나온 것도 그것이 종이와 연필 그리고 생각이라는 재료로만 이루어지는 사고실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실험을 관념적이라고 치부하거나 폄하할 수 없다면, 최인훈의 ‘사고실험’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최인훈 스스로 “사고실험”으로 썼다는 소설 <가면고>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고실험이란 “전통적인 윤리 질서와 정치적 합리성을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한 의식이 정신의 실험실에서 그것들을 탐구해 보는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삶에 요구되는 윤리적 덕목과 ‘시민으로서의 인간’의 생활에 적합한 합리적 정치제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탐구하려면, 궁리(실험)하는 과정에서 의식이 주어가 되어서 “의식을 가장 높은 효율로 조작”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의식 바깥에 있는 역사적 현실도 그것이 자연이 아닌 이상 모두 “인간 의식과의 상관물”일 수밖에 없다. 즉 외부의 현실이라는 것이 산천초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와 사회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현실”일 수밖에 없다.


 사실 누구라도 자기 인생 문제를 가장 철저하게 해결하려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관념적’이 될 수밖에 없다. 최인훈의 말로 정리하자면, ‘관념적’이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도 정확하려 할 때, 인간에게만 가능한 고유한 능력인 사고를 통해, 직접 견문으로 경험하지 않은, 앞서 생존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판단을 거듭하여,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눈앞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결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응답하는 행동”이다. “인간이 자기 당대의 경험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객관적 사실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념적이다. 요컨대 관념적이란 인간이 로봇처럼 기계적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타인들이 업적까지도 자기 것으로 지닐 수 있는 의식의 힘”이다.(「⌈광장⌋의 이명준, 좌절과 고뇌의 회고」)


 인간에게는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도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무엇에 관해 진지하게 공을 들여 생각하면 알 수도 있지만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걷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가치에 반하는 삶을 살아온 자들이 ‘너희는 너무 관념적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이야말로 생각 없이 막 살아온 삶에서 나온 막말이라는 것은 모른다. 힘세고 배부르다고 짐승이 아닌 것은 아닌데.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