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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선명해져도 된다 (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8-16 18:00
조회
518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문재인 정부 첫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박수현 국회의장 비서실장은 충남지사 선거 출마를 위해 대변인을 그만두고 나서 <한겨레TV> ‘더정치인터뷰’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의욕이 넘쳐서 문 대통령께 말했다. ‘좋은 기사, 칭찬하는 기사는 관저에서 읽고 오시고 첫 대면 보고받으실 때 가장 비판적인 기사만 보고받으실 것이다’라고. 실제로 8개월 20일 동안 그렇게 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단 한 번도 표정으로나 싫은 모습을 보이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쓴소리 위주로 보고하는 대변인과 그걸 묵묵히 듣는 대인배 대통령의 흐뭇한 풍경이지만, 지금 돌아 보면 어떤 예후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각종 개혁 정책이 지지부진하거나 뒷걸음질 치는 국정의 현주소가 대통령 참모들의 보좌 태도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들도 이 나라의 국민들이며, 대통령은 반대파의 목소리도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지금은 2천년 전 맹자가 살던 시대가 아니다. 무엇보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고, 백성은 단일하지 않다. 반대파의 반대는 그냥 반대가 아니라 계급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본질적인 반대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더구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법부와의 거래도 서슴지 않고, 여론 조작이나 통계 조작도 마다하지 않는 파렴치한 철면피 세력의 반대라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야 한다. 민주주의 기본 원칙마저 무시하는 깡패 집단에게 상식이 통한다고 생각하거나, 인과 덕으로 통치하면 결국 감화될 것이라고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계급적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표출되는 영역은 다름 아닌 경제 및 노동 분야다. 대자본과 수구세력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조선일보>가 정권만 놓쳤다 하면 (노무현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비판적 경제 기사를 쏟아내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때 아닌 양극화 논란을 부추긴 것도, 세금폭탄론을 만들어 조세저항을 조장한 것도 조선일보였다. 특히, 양극화를 해소할 각종 복지정책에 훼방을 놓은 건 정작 자기들인데, 양극화를 심화시켰다고 정부를 비판한 것도 괴벨스의 후예, 조선일보 다웠다.(당시 보도만 보면 마치 당장 경제가 망할 것 같았는데, 물가인상을 반영한 실질경제성장률-집권기간 평균-을 보면, 노무현 정부 4.5%, 이명박 정부 3.2%, 박근혜 정부 3.0%로 노무현 정부가 가장 높다. 70년대식 삽질로 일관하던 이명박 정부와, 말뿐인 창조경제론으로 답답함을 더해가던 박근혜 정부 때 조선일보는 정부 정책 띄우기 바빴다.)



사진 출처 - 한국은행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이 신문은 ‘좌편향’ 정책 때문에 당장 경제가 망할 것처럼 꽹과리를 쳐댄다. ‘김동연 패싱론’이라는 신조어를 동원해 청와대와 경제 관료를 이간질하며 개혁파를 견제한 데 이어,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핵발전 축소 등 거의 모든 정책에 딴지를 놓고 있다. 예의 철면피 전법도 여전하다. 왜곡과 견강부회는 일상이다.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거나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트릭을 사용하기도 한다.(범주가 다른 통계를 비교해 현 정부의 경제 실적을 비판하기도 한다. http://news.mt.co.kr/mtview.php?no=2018073013425682404 저널리즘 교과서에 실릴 만한 왜곡 보도의 사례로 다름 아닌 <조선일보> 사설이다.)


 이런 식으로 매일 계속되는 공세에(일간지의 힘은 매일 나오는 데 있다) 노출되다보면 조금씩 마음이 약해진다. 지지율이 흔들릴 때면 더 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개혁의 동력은 약해지고, 거기 실망한 지지자들이 떨어져나가 지지율이 더 떨어진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 궤적이 그렇고, 그게 조선일보가 노리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그랬듯이, 우경화는 필패의 길이다. 지지율이 어느 정도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에서 떨어지는 건 경계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개혁 정책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철학이 불분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가 대중들보다 지나치게 앞서가는 걸 경계하면서도 “반발짝만 앞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문재인 정부는 반발짝 앞서나가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남북관계는 예외다) 대통령 특유의 신중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 말한 참모들의 보좌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따라오지 못할 때 설득할 생각은 아예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만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종합부동산세와 금융소득종합과세 강화 방안을 ‘권고’했는데(이마저도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하루만에 청와대가 나서 ‘권고는 권고일 뿐’,  “과세는 정부의 몫”이라며 깎아내린 게 대표적인 사례다. 반대가 조금이라도 예상되면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런 식이라면 이 정부 아래서 할 수 있는 경제 개혁은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국민연금을 그룹 승계에 동원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 이재용을 대통령이 서둘러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동연 부총리가 이재용을 만나고, 삼성이 별 의미 없는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식으로 시나리오가 짜이는 걸 보면, 경제 정책에 관한 한 누가 대통령 귀를 잡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경제 관료들의 상상력이 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문제다. 지금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재벌에 구걸하기나 SOC 투자 확대 같은 구태의연한 정책이 아니라, 국가재정으로 육아도우미를 고용해 가정에 파견하는 (고용과 복지, 저출산 등 세 가지 효과가 있는) 육아바우처 제도 같은 게 아닐까.


 집권 2년차 들어 관료 출신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노무현 정부 데자뷔다. 관료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청와대 인사의 푸념 또한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장하성 정책실장이 손발이 묶인 채 포위된 느낌이 드는 건 나 뿐인가. 경제 관료들은 모든 데이터를 꿰고 있고, 역사의 디테일 또한 거의 완벽히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토론으로 제압하기 어렵다. 그럴수록 대안을 낼 수 있는 그룹의 발탁을 늘리고 정책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일부 특권층의 대변지 <조선일보>류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 이들의 영향력은 노무현 정부 때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촛불 이후 시대정신은 여전히 왼쪽에 있다. 좀 더 선명해져도 된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