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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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내신등급제로 시끌벅적합니다. 고등학생들이 시험 때문에 자살을 하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급기야 일군의 고등학생들이 시내 한 복판에서 추모 촛불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부모는 교육부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지금의 입시제도는 학생들에게 입시부담을 1/12로 경감시킨 게 아니라 입시부담을 12배로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았다’며 교육부를 맹성토 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교육부 수장에 어떤 사람이 오건, 제도를 어떻게 고치건 지금의 입시문제가 온전히 해결되기란 어려운 일임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 부처 중에서 없어도 되는 부처로 손꼽히는 데가 ‘교육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학벌사회를 조장하는 사회시스템의 문제임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에 사회가 바뀌지 않는 다음에야 제도를 어찌 고치건 입시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고질적인 문제로 우리 앞에 태산처럼 다가설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살건 못 살건 거의 모든 가정에서 사교육비를 엄청 쏟아 붓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라는 것처럼 기득권 및 시스템을 유지 온존시키는 가장 강력한 매개는 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녀들의 사교육비 지출을 위해 맞벌이는 물론이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짤리지 않고 해야 하며, 허리띠 바짝 졸라매 자녀에 대한 교육투자를 해야 합니다. 저축이니 내 집 마련이니 하는 것들은 후순위로 밀려야 하지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나 선생을 통해 주입된 일류대 만능의 이데올로기에 그냥 젖어들어 그 황금기를 온통 공부에 찌들어 지냅니다.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거나 다양한 독서를 통해 세상의 이치에 대한 생각을 해볼 겨를이나 폭넓은 교양을 쌓을 여유도 갖지 못하고 그저 취직의 관문인 대학에 잘 들어가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인이 되기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 어떤 때보다 진취적이고 패기와 용기로, 끊임없는 도전의식과 의문부호로 똘똘 뭉쳐있어야 할 나이에 너무 일찍 박제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상태로 자란 아이들에게서 한 사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성숙시킬 만한 상상력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등골이 휘어져라 교육비를 퍼붓고 맹자 어머니 저리가라 할 정도로 10년 이상 온 신경을 곤두세워 자식 교육문제에 골몰해 보아도 서울에 있는 명문대는커녕 전국에 있는 유수의 4년제 대학에 보내는 것조차 하늘의 별따기인 실정입니다.   결국 사회에서 출세가 보장된다고 일컬어지는 몇몇 주요 ‘관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은 강남 분당권을 비롯한, 이미 어느 정도 선택된 가정의 아이들이 주축을 이루고 강북권 등의 아이들은 졸업해도 취업 여부는 전혀 보장이 안 되는 ‘기타대’들에 가게 되거나 아예 대학 진학의 꿈도 못 이루게 되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반이 넘는 아이들은 이미 교육과정에서 철저히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구요. 부의 대물림이 교육이라는 수단으로 이제 고착화된 것 같습니다.       확률 상 뻔히 보이는 결과인데도 로또대박의 꿈을 움켜쥐고자 하는 부나비처럼 많은 사람이 이런 흐름에 그저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꼭 이렇게 밖에는 할 수 없는 걸까요? 물론 아이에게 성적 때문에 상처받게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사교육 현장으로 내몰게 되거나 또는 아이들이 스스로 학원에 등록해 공부하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그 길 밖에는 없는 건지요. 과외나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절대빈곤 하에 놓인 아이들은 물론이려니와 웬만큼의 투자로는 어림도 없을 일인데도 올인을 하다시피 하여 아이들의 미래를 꿈꾸는 서민들에게 교육을 통한 계급의 변화가 과연 용이한 일일까요. 차라리 그 꿈을 다른 각도로 가지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고 당장, 또는 내일의 행복을 담지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아이의 미래가 반드시 지금의 학업에만 달려있지 않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비현실적인 발상 같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믿음’을 갖고 도도히 흐르는 흐름에서 벗어나 잠깐 둑 위로 올라앉아 보다 넓은, 자유로운 길을 개척할 여지는 없을까요? 학창시절에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게 한다면 더욱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랄 터이고 그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무슨 일이든 도전해 볼만 하지 않을까요? 아 물론 학벌이 필요치 않은 분야에서이겠지만요. 학벌 없이도 사회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또 일정하게 나름의 영역에서 성취해 내는 사람이 늘어나야 학벌사회가 서서히 무너지고 결국 고질적인 입시문제도 서서히 해결되어 나가리라 생각됩니다.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부터 실천해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75 | 추천: 1
이만큼 민주화 되었다는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민주화의 현 주소가 여기까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위법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 유가족 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입을 모아서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법을 제정하라고 수십 년 동안 목을 놓아 외쳐왔다.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합의를 자축하며 이번 임시국회 회기인 5월 3일에 과거청산법을 처리하였고, 시민단체 등은 과거사청산법을 차라리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고, 과거청산을 바래왔던 수많은 국민들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는 사이 입법안은 아름다운 합의와 타협, 상생이라는 꼬리표를 자랑스럽게 달고 악법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4년 7월 3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대통령보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통령의 강력한 포괄적인 과거청산 의지 표명, 같은 해 12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과거청산 입법안에 대한 행정자치위원회의 공청회까지만 하여도 이제 비로소 해방 이후 단 한번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제 식민지 강점하의 친일 행위, 6∙25 한국동란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 이승만 독재부터 지속된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자행된 온갖 인권 유린과 국가 폭력의 해묵은 숙제를 풀고 화해를 위한 조치를 밟아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논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그런 바람은 부질없는 것이었고, 국민이 개혁을 위하여 뽑아준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여망을 짓밟고 “과거청산법”이 아닌 “역사왜곡∙은폐법”을, “국민화해법”이 아닌 “국민정쟁법”, “민주인사탄압법”, “신국가보안법”을 한나라당과 손잡고 만들었고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니 기가 막히고, 망연자실할 뿐이다. 통과된 법안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적대시하는 세력들에 의한 폭력과 인권유린, 테러, 학살, 의문사’ 등을 조사 범위로 정하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일개 조항에 불과하지만, 들여다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독소 조항이고, 악의가 꿈틀대고 있다. 과거 어두운 독재정권 치하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민주화 운동 내지 통일운동을 하였던 모든 진보 세력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덫에 걸려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자로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이 땅에 이만한 정도의 민주화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민주화 운동 세력들을 다시 재조사하겠다는 것은 바로 민주인사를 탄압하겠다는 것과 동의어이며, 고문 등으로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국가 폭력의 진실규명에도 물 타기를 시도하겠다는 의지이며, 종국에는 조·중·동 등의 보수 신문과 손을 잡고,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켜, 해방 전후의 좌우 대립과 같은 국면을 조성하여 과거청산 자체를 무력화 시키려는 세력들의 음흉한 칼날이 숨어 있는 무서운 조항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부산동의대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1975년 4월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리자 가족들이 법원 앞길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가 현실화 할 경우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법의 취지는 전혀 달성하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극심한 국론 분열과 대립만을 초래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청산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과거청산의 주체로 나서 칼을 휘두르는 꼴이니 어떻게 이법을 악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이 법은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서 예컨대, KAL기 폭파사건, 인혁당 사건,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건 등등은 아예 조사조차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으니 과거의 진실을 은폐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정작 조사해야 할 사건은 조사할 수도 없고, 이미 수없이 법을 악용하여 무차별적으로 처벌받아온 민주 인사는 조사를 하겠다는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아닌 법이 아닌가. 더욱이 위원회의 구성을 여당과 야당이 나눠 먹기식으로 구성하고 있으니 각자의 정파를 대변하는 자들이 과거청산 기구의 주체로 들어와 정쟁만을 일삼을 것이고, 그 경우 진실 규명은 딴전이 되고, 독립성과 공정성, 중립성을 잃은 인사들에 의한 진실규명의 결과 또한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시민단체와 국민들도 받아들이지 않아 끊임없는 분쟁만 초래할 것이다. 1975년 4월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리자 가족들이 법원 앞길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과거청산의 대상이 될 대다수의 사건들은 조작, 고문 등의 의혹이 수없이 제기되어왔고, 작게는 십여 년 멀게는 백 년 전의 사건까지 포함되어 충분한 조사 권한이 확보되어도 진실규명이 어려운 사건들인데도 아무런 조사 권한도 없는 껍데기 권한으로 어떻게 진실을 규명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나의 이런 우려가 결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랬지만 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이 같은 우려가 곧 현실화 될 것으로 확신한다. 과거청산법의 악법 독소조항이 위력을 발휘하는 비극적인 현실이 된다면 이 법을 제정한자들 역시 과거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고, 법률 또한 청산이 될 것이다. 피 묻은 역사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 반성하라. 이제 껍데기는 제발 물러가라.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18 | 추천: 2
새학기가 시작되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특수학급의 학생들이 입학을 하게 된다. 학생들은 담임교사와 함께 하루를 보내던 초등학교 때와 달리 학급에서 독립적으로 생활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학교에 입학할 때 지체부자유가 심한 학생은 특수학교로 지원을 하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발달장애(영화에서 소개된 말아톤의 주인공이 가진 장애), 경증의 자폐증, 정신지체, 학습장애(정서장애) 등의 경증의 장애를 가진 학생은 일반학교에 입학을 해서 통합교육을 받고 있다.     통합교육이란 장애를 가진 학생과 비장애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고 배움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편견 없이 상호 협조하여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자 하는 교육환경을 의미한다. 외국의 대부분의 장애 아동들도 이같은 통합교육의 틀 속에서 장애를 최소화하기 위한 특수교육을 병행하고 있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통합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통합교육의 가장 큰 미덕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장애아동이 장애아동과 함께 어린시절부터 함께 학습하고 생활할 기회가 제공될 경우 장애아동과 비장애 아동 모두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에게 매우 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배형진씨  ⓒ 한겨레신문   하지만 학교에서의 현실은 이와 다르게 통합교육의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중학교에는 학교의 학급수에 따라 한두 개 반 정도의 특수학급(개별학습이라고도 함)과 한두 명의 특수교사들이 교육을 한다. 장애학생들은 일반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국어, 수학, 영어시간에는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장애학생들의 원만한 학교생활을 위해서는 비장애학생들의 충분한 이해와 배려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입시교육이 강조되는 학교교육에서 일반학생들 또한 성적과 입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이로 인해 학생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생활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다. 좁은 교실에서 40여 명의 학생들이 생활을 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조그마한 피해가 오더라도 참지 못한다. 이 경우 신체적인 장애(두통, 복통, 갑작스러운 경련 등)가 나타나고, 심하면 상대방에게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장애학생에 대해서도 이해와 배려보다는 장애학생들도 자신들과 동등하게 대할 것을 교사들에게 요구하는가 하면, 심지어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장애학생들에게 화풀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장애학생들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발달장애와 약간의 자폐증상을 가진 문식과 철수가 일반학생에게 매일 붙들려 가서 돈을 빼앗기고, 하교 길에 앵벌이를 강요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심지어 이들은 문식이와 철수의 옷을 벗겨 포르노사이트의 행위를 흉내내도록 하면서 그 장면을 즐기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철수가 학교 가기를 거부하면서 어렵게 어머니에게 사실을 이야기 했고, 같은 증상의 장애인인 철수어머니는 학교에 와서 이 사실을 알렸다.(종종 장애 학생 부모 또한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문식과 철수를 괴롭힌 가해학생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일용 노동일을 하는 아버지와 둘이서 살면서 방과 후에는 늘 PC방을 드나들던 학생이었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내용으로 문식이와 철수를 늘 괴롭히면서 교사들과 학급의 학생들에게는 돌봐 주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미처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을 보살피고 올바르고 지도해야 하는 것이 교사들의 역할이지만, 학급학생 스스로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주며 생활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고 효과적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생들은 장애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색해 한다. 도움을 주는 방법을 모르기도 하지만, 인터넷매체의 영향으로 혼자만의 놀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들이 아름답게 어울리는 모습을 기대하기에는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42 | 추천: 2
고등학교 때, 나는 정기적으로 서랍 검사를 당했다. 아버지가 주도하고 어머니가 거들었다. 덕분에 창간호 때부터 모아둔 몇 달 치 한겨레신문과 각종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히기도 했다.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겨레신문을 ‘소장’하겠다는 욕구를 버리고, 가판에서 사서 읽은 뒤 학교 교실에서 여러 친구들과 돌려 읽었다. (그 시절, 대구에서 고등학생들끼리 한겨레신문을 돌려 보는 것은 ‘지하 유인물’을 읽는 경험과 비슷한 것이었다) 돈을 내고 사서 읽은 책은 다른 친구 집에 (녀석에겐 검열관을 자처할 아버지가 없었다) 맡겨 뒀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딱 하나 있었다. 시 습작 노트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 끄적거린 잡문 묶음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기억과 감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해도, 그걸 들여다볼 ‘특권’을 허락할 순 없었다. 거의 일주일마다 그 노트를 숨길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머리가 아픈 건 사실 두 번째 문제고, 이걸 누군가 읽어봤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참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시 습작은 대학교 졸업 학기를 끝으로 결말을 내렸고, 신문사 입사 이후엔 단 한번도 이 노트에 ‘신작’을 보태지 않았지만, 이 잡문 묶음은 지금도 내 보물 1호다. 그것은 일기를 대체했던 ‘월기’이자,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청(소)년 시절을 더듬을 유일한 자취다. 초등학교의 일기 검사가 초등학생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국가인권위의 판단을 둘러싼 논란을 보고, 나는 참 의아했다. 일기의 교육적 효과 운운하는 사람들은 어린시절, 거의 예외 없이 겪었을 일기의 ‘폐해’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렸음에 틀림없다. 의무에 불과한 일기 쓰기 때문에 한 달 전 날씨까지 기억해 내야 했던 일은, 어떤 이유를  더해도 그저 불필요하고 허접한 노동력 낭비다. 그런 일기는 글쓰기 능력 배양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과의 대화’다. 이는 단단하게 내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을 전제로 한다. (검사라 불리는) ‘검열’을 의식한 성찰이란, 아예 성립불가능한 말이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나 자신과 어떻게 대화하는 지를 이해한다는 의미다. 교사 또는 부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 시선에 맞춰 나를 포장하는 기술을 익힌 사람은 결코 ‘글’을 쓸 수 없다. 학교 숙제로서의 일기를 열심히 쓴 학생 가운데 훗날 본격적인 문필가가 된 경우가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한 통계적 수치를 제시할 순 없지만, ‘경험적’으로 보자면 일기와 글쓰기는 결코 ‘길항’의 관계가 아니다. 검열에 익숙해진 세계관으로 ‘창조’를 도모할 수는 없다. 혹시 탈선이나 비행의 ‘조짐’을 일기를 통해 파악하려는 욕구가 ‘교육적 효과’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우선 어른들이 걱정하는 종류의 탈선과 비행을 (이런 단어 자체가 얼마나 ‘어른 중심적’인 말인가) 꼬박꼬박 일기장에 적을 만큼, 순진한 학생은 많지 않다. (학교 과제로서의) 일기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충실하거나, (내밀한 개인기록으로서의) 일기를 쓸 정도로 자기와의 대화에 목마른 학생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일탈’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교육적 수단을 고려하자면, 그저 일기를 쓰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구분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일기 쓰기를 '적극 권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신과의 대화를 통한 성찰에 도움이 된다는 ’교육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 한겨레신문  사실 일탈의 조짐을 발견해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철저하게 ‘범죄수사’의 관점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바라보는 행위다. 이런 방식이라면 차라리 거짓말 탐지기를 신체검사 때마다 학교에 들여와 정기적인 ‘바른 생활 점검’을 시도할 일이다. 그런 지경이 되면, 일기 쓰기는 이제 글쓰기와 성찰을 빙자한 국어, 도덕 교육이 아니라, 검열관 앞에서 적어 내려가는 ‘자술서’라는 본질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정상화를 조금이라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결국 이런 교육적 효과에 대한 기대는 결국 다른 교육 수단을 통해 도모되는 게 옳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글쓰기 능력을 길러주려면, 책읽기와 독후감 등 ‘공식화’된 작문 수업의 활성화가 더 바람직하다. 청소년기의 일탈행동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손쉬운 자술서 검열 대신 어렵고 힘들지만 가장 효과적인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게 좋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기름을 다 빼고 난 다음에서야, 일기는 제 자리를 찾는다. 자신과의 대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기록. 그 안에 둥지를 틀고 나의 ‘자존’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인권운동의 출발이 스스로의 인권을 자각하는 일에 있다면, 인권교육의 강화는 ‘누구의 검열도 의식하지 않는 성찰적 대화로서의 일기 쓰기’를 권장하는 일에 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내 서랍을 뒤지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 스스로 시를 쓰기 시작하셨다. 얼마 전에는 지방의 한 문학잡지에 ‘등단’까지 하셨다.  ‘운동권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자신과 대화하는 ‘성찰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신 듯 하다. 여기에 혹시 아들의 은밀한 기록을 들쳐본 경험이 긍정적 영향을 줬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들어 부쩍 ‘비밀’이 많아진 7살짜리 딸에게 내 ‘잡문 묶음’을 보여줄까 말까 고민 중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너만의 세상을 일궈가라는 격려와 독려가 될 수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세상에서, 인권은 그 본래적 가치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다. 시 쓰는 할아버지는 시 쓰는 손녀의 습작노트를 뒤져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시 쓰는 일을 서로 대견하고 존경스럽게 여길 뿐이다. 일기 쓰기는 그렇게 자존을 향한 성찰,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인권의식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보내야 마땅하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07 | 추천: 2
여의도 성모병원의 718, 719호실은 특별한 사람들이 입원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광산노동자들이 진폐증을 치료받는 자리입니다. 전국적으로 5, 6만 여명의 진폐환자들이 있고, 입원 환자만 3천 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은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관심사에서 본의 아니게 밀려났습니다.     산재보험의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의료수가가 낮고 장기간에 걸친 입원 치료가 필요하기에 병원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의료인력의 확충이 어려운 난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의도성모병원은 1963년부터 40여 년 동안 묵묵히 이런 환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6개의 진폐요양기관이 있지만, 여의도 성모병원이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서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병원입니다. 현재 진폐환자들의 연령이 고령(70세 이상)인 데다가 진폐는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이기에 시간이 흐르면 그 끝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환자와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어쩌면 찌푸리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그러기에 여의도 성모병원의 진폐병동 유지는 병원의 수익성 유무를 넘어선 진정한 사회봉사요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삶에 위로가 되셨던 그리스도의 ‘약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참모습입니다. 지금은 사양산업이지만, 60-80년대에 우리는 땅속 깊은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광부들의 노고 덕분에 따스함을 입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줄 알면서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많은 이들 덕분에 우리는 생활의 윤택함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힘든 불치병을 얻은 5, 6만 여명의 환자들은 인간생활의 윤택함을 누리지 못하고 병고와 싸우고 있습니다. 문제는 진폐가 환자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병의 치료를 위해 가정의 전 재산이 쓰여졌고, 따로 간병인을 쓸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아내가 환자인 남편 곁에서 24시간 간호하고 있기에 경제적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여분도 없는 막다른 가정도 상당수 있습니다. 비록 배운 것이 많지 않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식구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온 몸을 굴속에 던져 열심히 땀방울을 흘렸건만, 남은 것은 병든 몸뚱이요 너무도 오랜 시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정신적, 경제적 고달픔을 안겨주고 있으니,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도 끈질기게 붙어 있는 생명 줄이 환자들에게는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더욱이 시간의 흐름과 효율적인 기계문명의 발전 속에서 이들의 피맺힌 절규와 아픔도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탄광막장체험을 하고 있는 사진  천주교회는 병원사목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사목위원회를 통해 80년대부터 이들을 위한 사목을 시작하였습니다. 진폐환자들과 진폐로 숨진 이들의 가족을 위해 보상금을 마련해 주었고, 현재는 담당 신부와 상담전문 수녀의 파견과 자원봉사자들을 양성하여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으며, 광산노조 및 그 가족들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환자들의 보다 질적인 치료와 인권보호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과 경기지역에 산재해 있는 재가진폐환자가정을 방문하여 그분들이 처한 다양한 어려운 현실 안에서 당면한 구체적인 도움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외로움에 지치고 육체적인 고달픔에 지친 환자와 보호자들의 대화상대가 되어주며, 경제적 궁핍이 심한 가정에는 매월 일정액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에 필요한 재정 확보를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후원회원을 모집하여 함께 봉사하고자 하는 선의의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로서 첫째는 지속적으로 상담 자원봉사자들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자원봉사활동으로 말미암아 환자들이 탄광에서의 체험과 폐광이후의 삶의 과정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서로의 아픔을 알아주고 이해하며 위로의 장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환자들에게 힘을 주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둘째는 선의의 의료진을 확보하여 재가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재가진폐환자란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진폐환자로서 진폐로 인해 장해등급은 받았으나 진폐법이 인정하고 있는 요건에 해당되지 않아서 입원이 안 되는 환자입니다. 그래서 휴업급여와 요양치료에서도 제외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위한 자원의료봉사자들의 확보와 가정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가족과 함께 환자의 간병을 도와 줄 자원 간병인 봉사자들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셋째는 진폐환자의 치료와 요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병원들이 수익성의 저하를 이유로 진폐병동을 폐쇄하는 일이 없도록 정부기관에 보다 적극적인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것과 이들이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넷째는 경제적 지원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궁핍이라는 이중의 삶의 무게를 힘겹게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더불어 사는 사회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많은 후원자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는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있는 영신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직자,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합니다.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진폐환자를 간호하고 계시는 세실리아 수녀님  매년 ‘노동자의 날’을 맞이하면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어려움과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지만, 안타까운 것은 몇몇 단체의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가난한 진폐환자들을 위해 애쓰고 있는 여의도성모병원 관계자와 의사분들, 여러 요양원에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많은 이들의 노고를 보며 감사함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도 같은 일이지만, 그 노고에 누구도 찬사를 보내는 이 없지만, 환자와 가족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수많은 작은 노동자들의 수고를 잊지 말고, 이 약한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새로운 산업의 분위기 속에서 다시는 이런 산업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업관계자의 의식전환이 이루어지고 노동자들의 희망도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60 | 추천: 4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높기로 이름이 나 있다. 그래서 이만큼(?)의 경제성장도 이루었고 각국의 어린이들이 겨루는 학력에서도 늘 수위를 다툰다고 들었다. 물론 늘 들어왔던 것처럼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만이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신념이 너무 과도하여 많은 교육문제를 낳고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 많은 문제 중 오늘은 평가를 중심으로 문제점에 접근하고자 한다.     교육은 학생을 중심으로 국가(교육인적자원부)와 학교(교사), 가정(학부모)의 관심과 여러 경제적, 정책적 투여(in put)와 가치관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결과물(out put)이라고 볼 때, 평가는 그 결과물을 가지고 논하는 과정일 것이다. 대상을 가지고 나눈다면 학생평가와 교사평가, 학교평가, 교육부평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학교와 교육부 평가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므로(정부에서) 우선 학생평가, 교사평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면... 우선 교사평가! 요즘의 분위기로 보면 교사는 철밥통이고 평가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교사들도 평가를 받는다. 학교장으로부터 근무평가를 비공개로 받고, 그 평가는 오로지 승진을 위한 것에만 활용되고 있으며, 평가 받는 교사 본인에게도 절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승진을 목표로 한 교사들에게는 교장의 권한이라는 것이 무척 실질적 권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다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발생할 부조리는 예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으로도 문제점이 지적된 근평(근무평정)에 대하여는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현재 교육부에서는 또다시 교사평가를 논하고 있다. 또한 그 방법이 구태의연하다. 한번의 공개수업으로 교사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폐해 또한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말이다. 1년동안 한번의 공개수업을 성공적으로 하여 좋은 평가를 받으면 나머지 교육활동에 대하여는 면죄부를 부여 받는 것인가? 아니면 나머지 교육내용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리고 설사 한번의 공개수업이 중요하다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희생될 나머지 시간과 교육내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평가란 시행후 재생산으로 이어져 피드백되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의 정책이나 교육환경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 교사를 평가하는 방식은 상당히 수치적인 발상이고 교육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위한 평가는 반드시 아이들에게 그 결과가 피드백 되는 방향으로 생각되어져야하고 실제 그것이 교육의 질을 높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학생평가! 일상적으로 학생평가는 교과서에 의해 학습한 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시험보고 채점하고, 평균과 등수를 매겨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7차 교육과정에 의한 평가는 우리가 자랄 때 받았던 평가와는 그 방식이 다르다. 우선 교과서의 내용만 보더라도 만들 때는 다양한 내용을 공통으로 만들지만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재량이다. 순서대로 진도를 나갈 필요도, 끝까지 다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가르치는 교사가 내용을 보고 나누고 합하고 재구성하여 자의적으로 지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가도 수행평가를 하는 것이다. 즉 교사가 투여한 내용을 그때그때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학력저하 운운하며 일제고사나 지필고사를 시 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시행되고 있는 형편이다. 학부모들이나 정부 당국은 일단 교육의 목표가 인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화교육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공부시켜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 학력을 바탕으로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줄세우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자연히 그 줄에서 뒤쳐지거나 이탈한 학생은 도태되고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 중심적이고 서열화된 수치의 평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국가경쟁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줄세우기식으로 평가하지 않아도 국가 경쟁력은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타고난 본성과 잠재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줄세우기식의 평가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어려서부터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소속된 단체속에서 일등이었으면하는 바램으로 미리 가르치고 미리 투여한다. 지켜보거나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지필평가를 요구하는 학부모의 바램도 그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필고사를 통해 수치화된 성적을 알아야만 모자라는 부분을 학원에서든 과외를 통해서든 빨리 채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교육 과정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새로운 지식을 접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교육의 과정인데 확인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결과에 대해 학부모들은 참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기르다보면 한없이 기다려야하고, 한걸음 떨어져 지켜보아야하는데, 우리 학부모들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결과물을 빨리 알고 싶은 것이다. 지필고사나 일제고사 방식의 평가는 소수(상위 10%)의 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대부분(90%)의 학생들에게는 좌절감만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은 내 아이는 상위 10%에 들 것으로 생각하고 수치화된 평가를 요구하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전 뉴스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경기가 어려워 살기 힘들었던 지난해에도 학원비 등의 과외비는 10% 정도 상승하여 지출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요즘 서점이나 문구점마다 문제풀이를 위한 문제집이 동이 났다고 한다.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다가 시험이 끝나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지식인가?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다. 단테의 신곡이라는 단순한 줄 잇기식 지식이 아니라 이제 단테를 읽어보고 그 내용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진정한 지식임을... 그리고 교육의 내용은 진정한 지식을 담고 있어야하고, 교육과정은 진정한 지식을 통한 고민과 토론 과정을 거쳐야 하고, 평가는 그 과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하며 반드시 피드백되어야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교육을 결정짓고 관여하는 중요 요소들! 학부모와 교사 그리고 교육부! 이제 조급함을 날려 버리자! 교육은 그렇게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적인 관심과 다양한 투여를 하고 한없이 지켜보고 한없이 기다리자!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87 | 추천: 2
말과 관련된 속담들이 많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말만 잘 하면 어떤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다는 말), 글속에 글 있고 말 속에 말 있다(말과 글은 그 속뜻을 잘 음미해 보아야 한다는 말),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로 온 동네를 다 겪는다(실천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말만으로 해결하려 듦을 이르는 말), 내가 할 말을 사돈이 한다(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남이 대신 해 주어 잘 되었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제가 한 말 때문에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을 항상 조심하라는 뜻),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자기가 먼저 남에게 잘 대해 주어야 남도 자기에게 잘 대해 준다는 말) 등이다.     이런 속담을 통해 말이 가지는 의미를 반추해 본다. 말은 약속이다. 말은 속내의 표현이다.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의 일상생활이요, 사회생활이며, 국가간 외교이다. 말이 갖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말은 행동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불문의 율이 있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이래저래 문제가 심각하다. 아빠가 아무리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한들 아이들로서는 함께 생활하며 뒷바라지는 하는 엄마만큼 아빠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다. 아이들은 바쁜 아빠를 보며 함께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로부터 아빠가 하는 말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곤 한다. 말이 가지는 막강한 규정력을 느끼면 느낄 수록 말의 사용에 있어 특히 심리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고 싶다. 부부싸움의 많은 것이 말에서 시작하여 말에 의해 상처받고 말에 의해 조정된다. 상대방이 툭 던지는 말에 의해 가슴깊은 상처를 안고 지내는 사람들은 상대의 말과 행동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번지며 결국 상대방의 성격까지 걸고 넘어진다. 이 세상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루어가는 가장 중요한 행동이 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쓰임새가 있다. 관료사회에서는 서열이 잡혀있고 아래에서 위에 말하는 분위기가 직접화법보다는 에둘러 유화시켜 나가는 간접화법이 횡행한다. 자기의 솔직한 말을 표현하기 힘든 곳이고 말할 자유가 억제당하는 곳이다. 재판관은 관료체질에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재판을 하다보면 피고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재판관을 상대로 그 재판장의 재판지휘에 심히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못내 법정을 존중한다는, 피고인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입에 발린 그럴싸한 간들거리는 변들을 쏟아낼 때마다 스스로 패기없고 주눅든 모습에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다. 시국사건 재판에서 실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정당성을 강력히 피력하다 재판관의 눈 밖에라도 날까봐 조심조심 우회로를 따라 적당히 정당성을 주장하며 사상이라도 검증될 시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으로 그 좁은 우회로를 간접화법을 따라 스쳐스쳐 겨우 빠져나올 때마다 재판과 재판관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곤 한다. 한총련 학생들에 대한 재판에서 으레 나오는 질문은 미국은 제국주의냐,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냐, 남한 정부는 사대정권이냐는 식의 사상검증식 질문이고 여기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 학생의 양형이 결정되는 형국이다. 미리 간접화법에 대한 주의라도 주지 않으면 속없는 학생은 그 재판이 무엇을 심판하는지 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무 생각없이 예라고 대답하면 참으로 냉혹하고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 기다린다. 피를 말리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직접화법이 살아남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본다. 간접화법은 인간에 대한 예의,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직접화법이 불러올 상대방에 대한 경멸과 조롱, 적대적 감정의 표현,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포용, 설득, 인내심의 부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으면 한다. 그런 자리에 간접화법이 들어서 인간사회를 부단히 인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언중유골이라고 뼈있는 말들이 오가는 정치, 외교의 현장에서 말의 의미를 새겨본다.     언행불일치는 비단 가정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와 외교에 있어 말이 가지는 규정력은 대단하다. 정치와 외교에서 책임있는 지위나 나라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말은 바로 국내외의 중요한 정책을 표현하는 의미를 가진다. 말로써 이루어지는 정치, 외교라해도 될 듯 싶다. 독도와 관련된 대통령의 서신이 파문을 던졌다. 대통령의 말이 외교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는가도 싶더니 의례 그 말의 해석을 둘러싼 언론의 앞서감을 나무라는 또 다른 말이 선보이곤 한다. 그래도 이번에 독도 관련 대통령의 발언은 언행일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 신뢰가 지지율의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친미적 자주, 자주국방의 용어는 웬지 의심스럽다. 언행불일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전지휘권이 외국에 있는 나라에서 자주국방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차적으로 고민해야 할까 반문하고 싶다. 그러나 패권질서가 자리잡은 힘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굴절된 의식은 언행불일치의 현실을 합리화하고 공고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래서인지 이라크 전쟁은 침략전쟁일지는 몰라도 그에 참가하여 파병하는 것이 번듯한 말잔치로 도배질되어도 친미사대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는 쥐죽은 듯 조용한 이슈로 소멸되어간다. 세계의 패권을 쥐락펴락하는 나라의 국무장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전쟁과 평화를 오가며 우리 민족의 숨통을 조였다 폈다 하는 현실이다.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지다보니 많이 무감각해지고 있는 현실이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일국의 국무장관의 입에서 나온 폭정의 전초기지와 주권국가의 말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북한에 대한 표현으로서 주권국가는 그 나라의 국무장관의 입에서는 나온 최초의 발언으로서 그녀의 말대로 심사숙고 끝에 한 말이니 이제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북한을 공격할 의사는 없다고 재삼 약속하므로 빨리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길이라는 얼뜨기 사대꾼들의 번드레한 말이 여론을 도배한다. 우습다.     왜냐면 바로 얼마 전 인준청문회에서 한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은 주권국가라는 말 한마디로 취소나 된 듯 호들갑을 떠니 말이다. 조금만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북을 공격할 의사는 없다라는 말이 가지는 패권적, 호전적 의미를 무섭게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감히 다른 나라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나라가 그 나라 외에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주권국가라는 말 한마디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의 변경 가능성을 거론하며 6자회담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고 지레짐작하여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기 전에 지체없이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 북한에 이롭다 하는 것은 진지한 조언자, 충고자로 비치기 보다는 미국의 새로운 압력에 가세하는 형국이다. 분명 폭정의 전초기지로서는 붕괴의 대상이지만 주권국가로서 인정될 때는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진지하게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만큼 대화에 빨리 나오라고 하나 대화에서 주권국가로서 인정하는 실내용을 갖추고 협상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어 다시는 주권국가가 폭정의 전초기지로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고 선제공격의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어찌되었든간에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독도의 주권을 수호하는 대통령의 직접화법에서 우리는 주권국가의 힘을 느껴보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오는 현실적 외교의 모습에서 참으로 답답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 가슴시리곤 한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간접화법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상전이 존재한다. 미국에 대한 북한의 성명이 벼랑끝에 몰린 죽음을 각오한 자들의 절박한 저항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세계최강대국에 맞서 할 말은 하고 사는 우리들의 반쪽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오늘도 뇌리를 맴돈다. 폭정의 전초기지와 주권국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미국의 직접화법은 북을 적대국가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위해 북한 주민의 해방을 위해 체제를 붕괴하고 선제공격도 감행할 수 있는 그런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권국가라는 발언은 북한을 일정하게 달래는 신중한 고려 속에 나온 간접화법이다. 주권국가라는 발언의 해석을 둘러싸고 이는 미국이 북한과 수교까지 고려한 관계개선의 의지를 보인 것이고 체제붕괴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선언이고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므로 북한이 더 이상 지체없이 6자회담의 대화의 문으로 나와야 할 마지막 기회라고 몰아세워 본들. 과연 그런가. 남해에 들어온 핵잠수함과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대규모로 방어훈련으로 포장되어 진행되는 그런 마당에 주권국가라는 그 말을 신뢰하며 대화에 나설 수 있을까. 더 이상 말과 행동의 괴리에서 벗어나 우월적 여론을 등에 업고 자신의 외교전략, 패권전략을 동원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미국의 고도의 외교전, 심리전이 통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세계가 깨어있다. 북미간의 가는 말과 오는 말이 평화적 공전의 정신 아래 화해롭게 진행되어 불신을 씻기를 바란다. 공정한 협상 분위기 속에 합의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약속이 동시에 제대로 이행되어 한반도와 동북아에도 평화정착의 훈풍이 불어오기를 고대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절박한 전쟁의 위험에서 영원히 벗어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평화적 생존의 희망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09 | 추천: 2
우리는 ‘비정규직’이란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는 언론보도를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다. 그들 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상적인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이런 일자리를 얻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설령 이해하거나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들이 겪게 되는 좌절감을 어떤 것도 보상해 줄 수는 없다. 정부는 비정규직을 시장체제하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이 중국 등 해외로 이전하는 상황에서 이상만을 쫓아 비정규직을 보호할 수는 없다고 한다.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정도 보호하는 것도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즈음 같은 상황에서 기업에게 뭘 더 요구한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거나 뭘 모르는 얘기를 하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외국의 근로자들이 월 10만원의 급여를 받으면서 일하는 것에 비하면 한국의 비정규직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받는다는 식의 계산을 해 보기도 한다. 이런 돈을 들이면서까지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만 해도 애국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부와 언론은 ‘시장(市場)’에 기대어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시장이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리가 시장경제질서를 택하고 있다고 하여 시장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정당화하거나 배척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일까? 시장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은 부당하거나 공허한 주장에 불과한 것일까? 정부나 언론이 간과한 것은 시장경제질서란 민주주의 토대 위에서만 건강하게 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건강한 시민의 참여와 투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일부 기업이나 언론기관들은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선 선거의 결과를 자신의 뜻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그들은 “사업을 잘 하기 위해서” 혹은 “경제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용서해 달라고 한다. 그들은 그 행동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을 지켜야 할 때만 민주주의를 떠올릴 따름이었다. 민주주의가 어떤 희생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애써 외면하였다. 극단적으로 얘기할 때, 민주주의라는 영역에 들어오면, 그들의 권리는 없다.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건강한 시민이다. 그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이나 윤리, 질서를 이해하고, 사회의 현안에 대한 공론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다. 물론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전체와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는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시민은 자신의 힘으로 일하고 그 대가로서 생활한다. 그리고 하루 중 일부는 가족과 지내며 동네나 회사 근처의 술집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정치에 관한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활을 통하여 그들은 사회 전제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시민들이 참여한 선거를 통해서만 그 민주적 정통성을 얻을 수 있다. 시민의 참여 없는 정부, 왜곡된 여론이나 힘에 의하여 형성된 정부는 정통성을 상실한다. 지금의 정부는 공공연히 참여정부라는 얘기를 떠들고 있다. 그런데 ‘참여’란 것은 개별 시민이 기계적으로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업이나 언론기관의 임원들이 정부의 각료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민이 제도 운영에 참여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시민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바라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의 참여가 민주적 정부의 유일한 정통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현실적으로 이러한 시민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종사하는 사업장에서 소외되어 있고, 자신들이 행하는 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비정규직은 설령 자신이 그 일을 좋아 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종사하는 기업의 발전에 기여하였더라도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처지의 비정규직들에게 전체 사회의 공론 형성에 참여하라거나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고민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처사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근로자들 중 절반을 건강한 시민으로 육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 혹은 정부가 비정규직을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 대우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시장(市場)’만을 이유로 비정규직 문제를 논의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이란 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참여하여 운용되는 것인 이상, 그것은 민주주의제도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건강하지 않으면, 그 시장도 건강해 질 수 없다. 그런데 건강한 민주주의란 건강한 시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국민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우받고 그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 때에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성장할 수 있다. 비정규직들이 자신들이 존엄하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앞날은 어두울 뿐이다. 정부는 시장을 핑계로 자신의 임무를 방기해서는 아니된다. 정부는 경제를 정상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반인 민주주의를 유지·발전시켜야 할 의무이다. 민주주의가 없는 시장이라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학교 법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14 | 추천: 2
나는 전교조 세대라고 한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나를 가르치고 나를 일깨워 주고 나를 알게 하여 준 선생님들이 무수히 해직됐다. 전교조가 결성되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 중 일부는 교육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며 대자보를 붙이고, 농성을 하기도 하고, 신문을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처지에 눈물짓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바로잡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절규했다. 그때 난 온순한 양처럼 열심히 공부만 했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복직된 선생님이 돌아와 교단에 섰다. 함께 했던 선생님들은 여전히 복직되지 않은 채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예전처럼 같은 내용의 과목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 온순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말썽부리지 않는 나인데, 돌아오신 그 선생님께 대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그냥 들이댔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이 굴었던 것 같다. 철없이 굴어 마음 아프게 했고, 마음 아프게 해서 지금 마음 아프다. 내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할 무렵 같은 사무실의 선배 변호사로부터 소개받은 사건이 하나 있다. 교원징계재심청구사건이 그것이다. 내용인즉슨, 전교조 선생님들이 사학재단의 비리에 항의하다가 징계파면을 당했고, 그 징계처분이 부당하다고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 다시 판단하여 달라는 청구를 한 것이다. 사학비리라는 것을 처음 접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재심청구를 통해 학교로 돌아온 선생님들과 사학재단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 재단의 분쟁도 이제 곧 5년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징계를 통해 학교에서 내쫒고, 다시 돌아오고, 재단에서 고소해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고, 학부모들이 손해를 배상하라고 소송을 하고, 다시 징계를 하고, 또 고소하고, 재판받고, 같은 동료 선생님이 손해를 배상하라고 소송을 하고, 또 소송을 하고……. 아무리 분해도, 그래도 선생님들인데, 선생님들이 참아야 하고 지저분한 일에 발 담그지 마시라고 조언해온 게 4년째다. 그런데 이제 앞이 보이질 않는다. 언제쯤 끝날 것인지 알 수 없다. 끝날 때까지 선생님들에게 참고만 있으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 와중에 참 많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사립학교다 보니 공립학교에 비해 다른 학교로 전근 갈 일이 별로 없어 선생님들끼리 참 친하단다. 아마도 재단의 비리가 없었다면 선생님들끼리는 참 좋은 동료로 오래 오래 같이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가끔 맘에 들지 않아도 서로 갈등하고, 질시하고, 증오하지는 않았을 거다. 어려서 밥 먹여주고 같이 놀아주던 동료 선생님의 딸아이에게 평소 하던 대로 말하고 행동한 것이 범죄가 되어 인신을 옭아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텐데, 이제는 그렇다.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힘든 일상이 그 선생님들에게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사립학교법을 두고 말들이 많다. 연일 계속 터지는 사학비리와 그로 인한 학사파행을 막기 위해 사립학교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여야 한다는 입장과 정치권력에 의하여 통제되던 사학을 사립의 본질에 맞게 사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쪽으로 개정하여야지 현재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립학교법을 개악하려는 것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원래 학습권과 교육권이라는 것은 종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데서 비롯된 자유와 권리이다. 그리고 종교의 간섭을 어느 정도 넘어선 시점에서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그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종교의 권위에 대항하여 사립학교를 건립하여 교육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찾던 것이 근대 들어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의 국가주의적, 파시즘적 교육을 배제하고 누구든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발하는 교육에 관한 자유와 권리를 찾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는 교육의 자유와 권리 신장에 있어서 사립학교가 갖는 중요성이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립학교법 개정에 관한 논의를 지켜보면서, 연일 불거져 나오는 사학비리 소식을 접하면서,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는 측의 입장을 이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특히 교육의 자유와 권리의 주체가 교육의 자유와 권리를 어떤 방식으로 보장받아야 하고, 그를 위해 어떤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적어도 한번은 고민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들의 주장 안에 학생은 없다. 학생들의 학습권을 어떤 식으로 온전히 보장할 것인지, 그를 위해서 교육의 담당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넘어 애당초 교육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관념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대구의 한 사학재단에서 분쟁이 발생했다는 말을 들었다. 온갖 회유와 협박과 폭력이 난무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답답했다. 누가되었든 적어도 5년은 멍들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5년이지 그 동안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되도록이면 조용히, 되도록이면 온건하게, 되도록이면 당하기만 하면서, 되도록이면 말을 아끼면서 분쟁을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럴 것 같으면 분쟁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니까.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다시 복직하셨던 선생님에게 대들었던 내 모습이 참으로 많이 후회된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 분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치기어린 행동으로 다시 가슴을 후빈 내 모습이 참 후회스럽다. 왜 그 선생님이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었는지 요즘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든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10 | 추천: 1
밤에 서울 하늘을 날아본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네온 십자가를 보았을 것이다. 예전에 일본 신부님 한 분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모습을 보고 한국 교회의 유례없는 성장을 꽤나 부러워하며 기독교가 한국 사회 속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물론 부끄러워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근래에는 신자 한 분이 요즘처럼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적이 없다며 한탄하는데 별다른 대답도 못하고 같이 안타까워하기만 한 적이 있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종교계 내분이나 종교인들의 치부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연이어 접하게 되는 충격적인 소식들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들이 운영하는 스포츠신문의 자금 지원문제에 대한 의혹과 관련하여 투명성을 요구하자 많은 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분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어이없는 발언, 김선일 씨의 죽음을 두고 “그가 기독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한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의 망언, “동남아시아 지진해일은 이교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다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망언 등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것이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부산의 어느 사찰 경영권을 두고 벌이는 불교인들의 이전투구가 그러하고, 제약회사의 리베이트 수십억 원을 횡령한 사건으로 고발당한 지방 한 가톨릭병원의 비리 역시 같은 문제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남다르긴 하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 축복까지 해주었던 저들이 근래에는 연합단체를 만들어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면서 극우세력의 나팔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급기야는 평화를 외쳐야 할 저들이 이 땅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자고 괴성을 지르기까지에 이르렀다.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하여야 할 본분을 저버리고, 불의에 분연히 항거하여 억눌린 이들을 도와야 할 현실을 외면한 채 기득권 수호에 앞장서는 교회들은 곧 무너질 바벨탑임이 분명하다. 그 휘황한 십자가라도 내려두면 좋겠다. 종교 간에 대립과 반목이 여전하고 구원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마치 종교 구성원들의 차지인 양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만 더해가는 것이 현실이지만, 사실은 고등종교 대부분이 이웃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그 본질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갖고 있다. 그들이 이웃과 세상에 대해 관심 갖는 근저에는 각 종교의 영성과 철학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사회운동이나 복지와 구별되는 고유한 자기 원칙과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기독교의 ‘사랑’이고 불교의 ‘자비’일 것이다. 그 사랑과 자비가 무의미한 구호가 아니라 진정 자기 철학의 소중한 한 부분이라면 세속의 노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천으로 증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비인간화의 혼탁한 시대에 종교인들의 책무가 더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7대 종단으로 구성된 ‘한국종교인평화회의’가 발표한 ‘남아시아재난 극복을 위한 범종교적 지원방안 마련을 위한 공동결의’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지진해일 참사’에 대한 각 종단의 해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피해지역의 사회 현실과 종교적 상황을 존중, 종교 및 문화적 갈등을 야기치 않도록 노력하기로 했다”는 결의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자연생태계 보전을 위해 목숨을 건 지율 스님의 단식을 보며,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됐든 새삼 “이 시대에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되었다. 종교와 종교인은 언제 어디서나 성속을 불문하고 희망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미 정리된 진부한 주제이지만 아직도 현실에서는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신학적 주제로서의 교회론과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교회가 보여주는 괴리이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건물이나 공간, 종교예식을 위한 물건들의 존재여부 보다 신앙을 삶의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와 모임이며, 그 신앙내용을 증언하고 재현하는 종말론적이고 대안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종말론적인 긴장이나 대안적인 모습을 발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본질을 망각하고 자기 존재 유지만을 추구하면서 세속화 되어 온 것이 기독교 역사이다. 물론 끊임없이 이를 견제하고 처음 모습의 회복을 주창한 개혁세력들도 있었다. 어찌 기독교뿐일까.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종교의 변화과정은 본질과 현상의 모순을 극복해 보려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론조사 결과 삶이 팍팍해질수록 종교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삶에 지친 민중들이 아직은 종교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다. 종교가 세상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도 필요할 테지만 그것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종교와 종교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과 구별할 수는 없다. 21세기의 새 패러다임인 생명과 평화라는 도도한 큰 길 위에서 모든 종교인들이 초심으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대원 위원은 현재 성공회 서울교구 신부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85 | 추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