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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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나신 분들이다. 8.15 전 해에 결혼하셨고 일본의 패망 직후 남한으로 월남하셨다. 유년 시절, 두 분의 정치적 경향을 알기는 어려웠으나 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씨를 찍었던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중학교 무렵 오랜 동아일보 독자로서 70년대의 광고탄압(백지 광고 사태) 때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셨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대학생일 무렵에는 어느날 아버님과의 대화 중에 일제시대(당신이 청년이셨을 때) 일본의 어느 사회주의 사상가(이름은 기억 못하셨지만)의 책을 감명 깊게 읽으셨던 기억을 언급하셨던 적도 있었다. 특별히 정치적 성향이 두드러지신 것도 아니었고 그저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상식에 기초한 평범한 ‘국민’이셨던 두 분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다가 어느 무렵부턴가 가끔씩 집안의 식탁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87년 대선 때는 그저 YS냐 DJ냐로 지지 대상이 갈리는 정도로 알았었다. 92년 대선 때부터는 소박한 서민의 집안에서 정치적 격론이 벌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총선, 지방자치선거, 대선... 선거 때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강도 높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 되었다. 요즘은 아버님께서 연로하셔서 어머님과 예의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어머님께서는 뭘 모르는 자식이라고 답답해하시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양순하신 분들이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그 자신들이 가난한 서민이면서도 한나라당 의원 못지않고 조선, 동아일보 기자 못지않은 투사가 되신다. 고집불통도 이만저만 아니시다. 소위 ‘빨갱이’나 이북 문제, 심지어 DJ에 대해서까지도 거의 진저리를 치거나 뿌리 깊은 증오심을 숨기지 않으신다. 적어도 부모님과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내게는, 무언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았던 어떤 기제가 있어 보인다. 혹독한 군사독재 시절, 대부분이 숨죽여 가며 살 무렵, 이승만과 박정희의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아셨던 두 분이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지금 이 마당에는, 박정희를 두둔하고 그 딸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도대체 이유가 무얼까? 무엇이 나의 부모님에게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 나는 나름의 답을 구해 보았다. 크게는 언론의 몰 역사적이고 무책임한 보도 탓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 분께 분단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기회가 없었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상처가 깊어져만 갔다는 결론이다. 80년 전두환의 등장 이후 ‘땡전뉴스’를 비롯하여 군부독재 집단을 찬양해 마지않았던 언론의 오랜 보도를 접했던 두 분은 정치적 문제에서만큼은 서서히 합리적 이성이 마비되어 가셨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분단구조를 최대한 활용해 선정적으로 대북 적개심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켜 왔던 언론의 폐해는 우리 부모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더해 준 셈이다. 몇 해 전,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베트남에 구수정 특파원을 파견하여 기획특집을 엮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기사를 보면서 나는 꽤 충격을 받았었다. 베트남전 당시의 격전지였던 한 마을을 방문했는데 그 마을의 어떤 할머니(전쟁 때문에 한 눈을 실명하셨고 한 다리도 부상으로 불구가 된)의 말씀이 ‘지난 일은 다 잊었어, 와서 사과하면 다 용서할 수 있어’라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오랜 전쟁으로 국토가 온통 쑥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가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명이 숨져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도 가해자를 아무 조건 없이 다 용서할 수 있는 그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이 좀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그 ‘힘’의 원천이 불교적 심성(베트남은 거의 전 국민이 불교도인 국가)에서 비롯되기도 하겠지만  ‘통일’이 가져다 준 자연스러운 치유의 기능에서 비롯한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실정은 분단된 구조로 계속 살아야 했고 이 상황을 이용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화해와 치유’를 사회적, 국가적 의제로 삼아 보지도 못하고 대결과 반목만을 거듭하면서 살아와야 했다. 사람이 ‘사랑’이나 ‘평화’라는 좋은 생각을 갖고 사는 것과, ‘대결’이나 ‘저주’, ‘증오’ 따위를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론을 비롯한 소위 기득권층들은 사람들에게 ‘저주’와 ‘증오’를 몸에 지니고 살라고 매일 주술을 불어넣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적어도 우리 사회의 대부분 언론은 언론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도 감당할 역량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몇 해 전 남북통일이 될 경우 북한의 토지소유권 문제가 언론에 불거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월남할 때 가지고 온 땅문서를 아직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둥 이런저런 보도가 있었는데 당시 나의 아버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대노하시면서 지금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쩌라고 저런 생각들을 하느냐며 혀를 끌끌 차셨다. 할아버지께서 꽤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셨던, 소위 지주 출신이셨던 아버님의 입에서 예상 외의 말씀이 나왔던 것이다. 그처럼 합리적인 생각을 하시기도 하는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언제나 이 뿌리 깊은 상처로부터 치유될 날이 올 수 있을는지, 얼마나 더 손꼽아 기다려야 할까나.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79 | 추천: 0
이제 방학이 며칠 남지 않았다. 개학을 하면 다시 아이들과의 생기 넘치는 교류(?)가 시작될 것이다. 기대이상 커져있을 아이들의 까무잡잡한 모습이 떠오르며 다가올 만남의 시간이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방학식날의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떠올리며 2학기에는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기대 반 걱정 반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본다. 다른 학교는 지난달 21일이 방학이었으나 본인이 소속된 학교(초등학교임)는 하루 앞당겨 20일에 방학을 시작했다. 이유는 개교기념일이 휴일과 겹쳐서 미리 부여된 휴일 중 하루가 남아 방학을 하루 앞당기게 된 것이다. 하루라는 시간은 사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남들보다 하루 일찍 시작된다는 것에 아이들도 괜스레 들뜬 분위기였고, 교사들은 그만큼의 업무를 서둘러 마쳐야하는 바쁜 시간이었다. 방학에 대한 안내와 성적표 배부, 담임교사가 어린이 하나하나에게 부여하는 특화된 과제 등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가지의 업무로 교실 안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북적대었다. 그러던 중 잠깐 모이라는 부장교사의 지시로 동학년 교사들끼리 모였다. 모인 자리에서의 이야기인즉, 수재민들을 위한 모금을 서울시 전체 교원, 학생들이 하는데 다른 학교는 내일이 방학이어서 오늘 예고하고 내일 모금하면 되는데 우리학교는 오늘이 방학이라 예고는 어려우니 그냥 현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모금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반부터 시작해 마지막반까지 아이들을 줄을 세워 방송실로 내려오도록 해 모금운동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 평창군 진부면 일대 가오교. 끊어진 다리가 복구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2006 생태지평 오마이뉴스  어려움에 처한 수재민을 돕는다는 좋은 취지에는 당연히 공감했다. 그렇지만 방식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였다. 우선, 이것은 그동안 행한 교육의 일관성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학생들이 돈을 가지고 다니게 되면 간혹 발생하는 금품갈취 사건의 표적이 되기도 하고, 불량식품이나 사행성 게임에 사용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평소에 학생들에게 돈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꾸준히 지도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모금을 하겠다는 것은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학생들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어서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모금하는 장면을 학교 방송을 통해 내보내는 것은 모금을 많이 하도록 독촉하는 것이고, 또 모금에 동참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학교의 여건상 어렵다면 비록 교육청의 협조 공문이 있다 하여도 학교장이 자율적 판단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를 들어 교감선생님께 문제제기를 하였고, 더불어 좋은 취지를 살려 방학 중 학생들에게 수재민 돕기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하는 선에서 마치자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우리반은 이런 모금방식은 잘못된 것이라며 방송실에 내려가지 않았고 많은 교사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행하였다는 후문을 들을 수 있었다.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고 열린 교무회의에서 교장선생님의 발언은 다시 한 번 내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앞서 행해진 모금운동은 서울시 교육청에서 보낸 수재민 돕기 협조공문에 의한 것이고, 하루 앞당겨 방학에 들어가는 우리 학교로서는 비록 60여만 원의 성금을 내게 되었지만 모금운동 참여명단에 빠지지 않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1,200여개의 초중등학교의 학생들이 이 공문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물론 수재민을 돕기 위한 운동은 매우 훌륭한 것이고 될 수 있으면 모든 시민들이 함께 동참해야 할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의 기본은 자발성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어거지로 이행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원칙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칫 누군가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웃지 못 할 코미디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날, 거의 모든 학교들이 방학에 들어간 21일 저녁 뉴스 시간에 확인되었다. “수재의연금을 내주신 분들입니다. …… 000 서울시 교육감과 교사, 학생 1억원. (000 교육감의 커다란 사진과 이름, 또 모금액. 그에 반해 아주 작은 글씨의 교사, 학생이라는 글씨) …… 성금을 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아! 어제의 그것은 바로 오늘의 이것을 위한 해프닝이었구나!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404 | 추천: 0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자신의 악습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얘기지요. 그런 반면에 자신의 죽음 앞에서 대부분 진실한 모습을 보입니다. 비밀스런 자신의 부끄러움도 드러내고, 인색한 마음을 버리고 나눔의 아름다움도 실천하고, 타인에게 상처 준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기도 하며, 죄를 고백하고 세상과 화해를 이루어 나갑니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비밀도 다 알려지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악에서 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자존심과 체면, 욕심 때문에 자신의 악습을 잘 고치지 못하는 사람도, 타인의 진실한 모습 앞에서는 행복한 마음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우리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변하면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하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성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옳게 살던 자라도 그 옳은 길을 버리고 악하게 살다가 죽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악하게 산 탓으로 죽는 것이다. 못된 행실을 하다가도 그 못된 행실을 털어버리고 돌아와서 바로 살면 그는 자기 목숨을 건지는 것이다. 두려운 생각으로, 거역하며 저지르던 모든 죄악을 버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죽지 않고 살리라.”(에제키엘 18, 26-28)  수레 가득 싣고 왔던 채소를 장에 내다 팔고 집으로 향하는 할머니들의 모습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 땅에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를 막론하고 인구보다 많은 것이 신앙인들입니다. 절대자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사랑의 실천과 나눔의 정신을 구현하여 공동선을 이루는 것이 거의 모든 종교의 공통된 신념입니다. 그래서 각 신앙인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없애고 세상의 불의와 맞서며, 약한 이들을 돌보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 땅의 정치, 경제,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 중 7-80%이상이 신앙인들이기에 기대가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당리당략,  집단 이기주의, 부정축재,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사람들의 희망을 앗아가고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남을 탓하기 전에 신앙인들이 먼저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나눔의 아름다움은 종교 행사에 참여할 때뿐이고 일상의 삶에서는 개인적인 욕심에만 사로잡혀 사는 어리석은 신앙인들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없고 유치한 신앙인들만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부처님의 가르침도 세상에는 메아리로 사라져 갈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흠집을 잡는 일에는 뒤지지 않은 것이 또한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 땅의 신앙인들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어떤 위치와 지위에서든, 어떤 갈등과 대립에서든, 정치 경제적 활동에서든) 진정 신앙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 앞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진정 공동선에 이바지하고 있습니까? 거듭거듭 되묻고 성찰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당신은 종교의 탈을 쓴 사기꾼입니다. 신앙인 정치인들에게 호소합니다. 민생법안이 더 이상 당리당략을 위한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늘 두려운 줄 알고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정치인은 권력에 눈먼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말끝마다 ‘국민을 위한 일이고, 국민이 원한다고’ 말하지만, 누가 봐도 권력 유지를 위안 안아 무인한 모습뿐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인 당신부터 돌아서서 그러한 불의한 일에 동참하지 말고, 약하고 어려운 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법을 만들고 사회의 공공복지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 주십시오. 신앙인 경제인들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이 누리는 부는 당신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의 결실임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을 믿고 함께 일하는 근로자들에게 분배의 정의를 지키십시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 투자하십시오. 그래서 세상이 당신을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신앙인 부자가 지녀야 할 참된 자세입니다.     사진출처 - 한겨레 노동운동을 이끌어가는 신앙인 지도자들에게 호소합니다. 당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이 땅에 ‘노동귀족’이라는 말이 생기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상처받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신념을 갖고 하는 일에 작은 기업의 노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하십시오. 뜻은 좋았는데 이제 욕심에 눈이 멀어 작은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신앙에 눈이 먼 어리석은 신앙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찾기 전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입니다.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늘 두려운 줄 알고 사람 귀한 줄 알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이 처한 다양한 삶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인 사랑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산다면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힘인 것입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1409 | 추천: 0
“너 잘 할 수 있지?”, “예 할 수 있습니다”. 오사카도립체육관의 매트에서 일어나면서 코치님에게 대답했다.  한일전 아닌가? 나는 반드시 상대 선수를 이겨야 했다.  매트에 쓰러지면서 접질린 왼쪽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일본선수에게 기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 울컥하면서 저 녀석을 반드시 쓰러뜨리겠다는 생각이 솟아났다.  “하지메(시작)”라는 심판의 구호를 듣자마자 기합을 외치면서 맹렬히 상대방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상대 선수의 도복깃을 잡자마자 왼쪽 손목의 통증이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악”하고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경기장에 대기중이던 의사선생님은 왼쪽 손목이 부러졌다는 진단을 내렸고, 경기는 중단되었다.  창피하고 분했다.  기권패였다.  관중석 한 쪽에서는 한복을 입은 조총련 누나들이 인공기를 흔들면서 “작살내라”는 응원구호를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민단에서도 응원을 나왔는데 다소 온건한 응원구호를 외쳤던 것 같다).  1987년 7월의 일이다. 그 때 나와 싸웠던 선수는 체중이 나보다 2배 가량 더 나가는 선수였다.  아무리 친선경기라고 하지만 불공정한 시합이었다.  역시 일본 사람들은 “야비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우리 역시 불공정한 시합을 했던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당시 한국과 일본이 친선유도경기를 하면 대부분 한국이 이겼다.  친선경기는 양쪽에서 20명씩 나와 시합을 하는 방식이 많았는데, 한국은 초등부에서는 17~18승, 중등부에서는 13~14승, 고등부에서는 11~12승 정도의 승리를 거두었다.  올림픽에서는 일본이 메달을 더 많이 따지만 학생들끼리의 친선시합에서는 한국이 이기는, 그것도 초등부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한국이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한국선수들의 기술이 훨씬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체육특기자 위주로 스포츠계가 돌아가는 우리나라에서 어린 선수들은 기본기를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이른바 ‘필살기’를 습득한다.  어린 선수들이 시합에서 “가위치기”(이름 그대로 가위질을 연상하면 된다.  도복깃을 옆으로 잡은 상태에서 한쪽 발은 상대방의 뒷발축을 다른 쪽 발은 상대방의 무릎 위를 거는 기술로서 부상이 자주 발생하므로 현재는 금지되었다)나 “태클”(축구의 태클과는 다르다.  고개를 숙여 상대방의 하복부를 파고 들면서 두 손으로 상대방의 오금을 잡아 당기는 기술이다)을 구사하는 것이다.  반면 일본 초등학교 선수들은 이러한 기술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그냥 서있다가 우리 선수들의 기술에 그대로 당하고 마는 것이다.  사정을 알고 보니 일본에서는 기본기 습득이 중요하다고 보아 가위치기나 태클과 같은 변칙기술은 초등학교 때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더욱이 이러한 기술들은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선수보호차원에서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선수들이 위험한 기술을 구사하면서 대승을 거두자 일본에서는 체중 차이가 많이 나는 선수들끼리 대진표를 작성하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 선수들의 화려한 가위치기도 일본의 꼼수도 아니다.  친선경기의 결과다.  우리 선수들은 초등학교 때는 일본을 압도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격차는 줄어든다.  초등학교 때는 그렇게 잘하던 우리 선수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일본을 겨우 이기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답은 여러분들이 아는 그대로다.  일본선수들은 기본에 충실하게 실력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FTA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면서 의욕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문제라고 한다.  FTA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는 필자로서는 찬반양론 모두 일리는 있기에 뭐라 의견을 덧붙이기 어렵다.  다만 우리에게 한미FTA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니 적어도 현 정부가 그만큼의 절박성을 갖고 추진해야 할 정책은 우리의 기본역량을 키우는 것 아닐까.  김민웅 교수가 한 인터넷언론의 칼럼에 기고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변변한 ‘외교사’책 하나 제대로 없는 나라이다.  요즘은 조금 사정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필자가 업으로 삼고 있는 법률분야 역시 아직도 많은 부분을 일본책에서 그대로 차용(우리나라에서는 ‘도용’의 순화된 표현이다)하는 경우가 많다.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동안 정말 절박하게 추진해야 할 것은 주택시장의 공공성 확보, 교육의 공공성 강화, 인문학 등 기초학문 지원 등 너무나 기본적이라서 상투적으로 들리기 쉽지만 우리가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런 문제들 아닐까. p.s. 한일전에서 패한 후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손목이 부러진 상황에서도 일본 선수를 반드시 이기겠다고 투혼을 불태운 선수”라는 이야기가 펴져 나갔다.  그래서 많은 분들의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고 남은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한일전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정 원 위원은 법무법인 지평 소속의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57 | 추천: 0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삶’이란 매우 중요한 일이다. 2006년 자살률 세계 1위, 이혼율 세계 3위에 오른 대한민국. 구조조정으로 인한 고용불안과 소득격차 심화에 따른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는 현재 우리의 모습에서는 더욱 그렇다. 며칠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행복의 실체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모두들 경제력, 학업성적과 외모가 행복을 좌우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40대 후반의 부유한 경제인과 그의 초등학교 동창들의 33년 전 졸업앨범, 생활기록부를 검토하고 현재 생활 만족도와 소득 등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분석한 결과 그들의 행복을 예언하는 중요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행복한 사람의 현재를 만들어낸 것은 과거 그들의 성적도, 외모도, IQ도 아닌 ‘정서적 안정성’이었다. 정서적 안정성은 일반적으로 화나 짜증을 자주 내지 않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만든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정서적 안정성이 높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성인이 된 후 느끼게 되는 행복이 훨씬 더 크다고 한다. 그리고 유치원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는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이해력, 업무수행력, 창의력 등이 훨씬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 출처 - 동화작가 존 버닝햄의 작품, 헤럴드 생생뉴스 그러나 정작 정서적 안정성이 중요한 학창 시절의 ‘학교’에서는 학생들 모두에게 1등만을 강요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식교육에 많은 부모들이 ‘올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들이 자식교육에 모든 것을 거는 이유는 아마도 교육이 이 땅에서 신분상승과 행복을 얻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고 인생은 성적순, 출세는 대학순이며, 부정과 범죄를 통한 성취가 아닌 다음에야 이 사회에서 행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사회의 모든 문제는 구조적인 모순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교육문제 또한 부모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사실 모든 부모들, 아니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조금씩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공부의 늪 속에 아이들을 빠트린다. 2-3개가 넘는 학원인생이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다. 대학 진학을 위한 1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계절이 바뀌어 꽃이 피고 눈도 오건만 그런 것은 아랑곳할 여유조차 없다. ‘계절이 흐르는 게 공부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학생에게 있어 나아갈 바는 오로지 공부밖에 없다’는 시각만을 강요할 뿐이다. 부모들의 이런 강요에 아이들은 ‘친구들을 누르고 일류대학에 가는 것, 그것만이 나의 행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부모들은 곧잘 교육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교육의 목표가 ‘인간’이 아닌 단지 ‘일류대학 입학’이라는데 문제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돌아서서 하는 행동은 너무도 다르다. 아이를 어떤 학원에 보낼지, 어떤 공부를 시킬지, 당장 학교에서 몇 등을 했는지만 관심을 갖는다.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지는 관심도 없다(물론 전인교육을 실천하는 부모들도 많다). 자식 교육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속내의 흉물스러움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서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생각은 그만 버려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 자신의 인생이 있다. 공부도 할 만큼 하면 되고, 되지 않는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지켜보는 미덕을 배우자. 사실 공부가 어디 쉬운 일인가? 오히려 공부만을 강요하는 부모들에게 자신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공부를 잘 했는지 되묻고 싶다. 비록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지금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공부하라’고만 닦달하지 말고 아이들의 성적을 독촉하지 말자. 잘되면 좋고 설사 안 되어도 또 다른 인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또한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작은 사회인 학교에서 아이들이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며, 친구들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자기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 하자. 그 것이 아이의 정서적 안정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이다. 부모의 욕심을 버리면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63 | 추천: 1
나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미워하는 법을 배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명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학생 두 명이 앞으로 불려나가 서로 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상대의 뺨을 번갈아 때리도록 하는 벌을 받았다. 처음엔 차마 상대의 뺨을 때리지 못했지만 교사의 무자비한 폭력에 결국은 상대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교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업을 진행했고 그 두 학생의 뺨 때리기는 방향을 바꿔가며 얼굴이 부르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반 아이들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치를 당하고 있는 그들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이나 그 순간은 누구도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 자괴감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랴. 나 역시 스스로가 미웠다. 이해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그 때 나는 힘없는 자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방법을 배웠다. 어찌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무력하게 고개 숙이고 자기를 미워하며 자기에게 분노하는 방법을 배웠다. 폭력으로 무장한 권력 앞에서 예의 갖추어 말 잘 듣는 방법을 배웠다. 예전 학교가 그랬다. 정기적인 시험이 끝나면 전교 등수가 떨어진 만큼 매를 맞거나 틀린 개수만큼 몽둥이찜질을 당해야만 했다.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앉아 걸상을 손에 든 채 단체기합을 받았고 그 상태에서 발바닥을 회초리로 맞기도 했다. 한없이 뺨을 때리는 교사도 있었고 얇은 플라스틱 자로 손등을 때리는 교사도 있었다. 아이들은 항변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맞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 나는 학교에서 정규 수업시간에 진정한 사랑이 담긴 교육과 민주적 인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지금도 여전한가보다. 남자 교사가 여학생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을 야단치며 뺨을 때리며 책을 던져 문제가 되자 교사직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어이없게도 교육당국은 해당교사의 사표를 수리하고 매번 그랬듯이 체벌과 관련한 세부지침을 마련하여 기준을 강화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한단다. 교사와 학생 간에 위계와 힘의 역학관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체벌은 폭력임이 분명하다. 그런 체벌을 ‘교육의 방법’이니 ‘사랑의 매’니 하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심지어 교사의 정당한 권리로 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니 참으로 어이없다. 우리 사회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내는 증거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얼마 전, 가출청소년쉼터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알았다. 아이들은 집이 싫어 거리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에 가기 싫기 때문에 집을 나온 것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을 수만 있다면 가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이들이 꽤나 있었다. 학교에 가기 싫은 것은 갖가지 폭력이 단연 최고의 이유였다.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학교폭력의 결과가 이렇게 무서웠다. 폭력임이 너무나 분명한 체벌이 다시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체벌은 단순폭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체벌은 폭력에 순응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 폭력을 내면화하는 ‘반교육’이다. 체벌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개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폭력문화의 오랜 체험 때문이다. 여기에 교사와 부모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유교문화가 결합되면서 폭력문화에 대한 자각이 더욱 어려워진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다. 이는 그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그래서 체벌에 의존하는 교육방법은 아이들을 비주체적 인간으로 만든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하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누군가의 강제와 지시에 의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옳음과 그름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도 유보한 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옳은 일에는 침묵하고 옳지 않은 일에 협조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한다. 폭력의 내면화는 모방과 전염성으로 드러난다. 폭력은 힘과 규율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력을 잃어버리고 굴종하게 하면서, 그 피해의 아픔을 나중에는 가해의   사진 출처 - 한겨레 쾌감으로 바꾸어 가는 사람을 만든다. 상대의 귀를 잡고 뺨을 때리는 것도 어색해 하던 친구가 후배 괴롭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중에는 그 폭력을 즐기기까지 하는 경우를 보았다. 교육적인 효과도 의문이다. 체벌로 인해 교사와 제자의 인간관계가 무너진 뒤에 무슨 교육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폭력이 두려워 문제행동을 중단하는 것이 체벌의 효과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얻은 효과는 그 물리적인 힘이 사라지면 효과도 동시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리적인 체벌이 효과가 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임시방편일 뿐이며 점점 더욱 큰 물리적 폭력을 낳게 된다. 인간은 결코 때려서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폭력이든 무조건 싫다.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추구하는 종교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인간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제발이지 학교에서만큼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민주시민을 육성해야 할 학교에서만큼은 스스로가 인간이길 포기하고 상대방의 인격 완성마저 방해하는 폭력일랑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482 | 추천: 0
세계가 너무 소란하다.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 인류가 북의 미사일 시험발사로 예측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분위기다. 북이 하늘로 쏘아 올리는 것이 인공위성이든, 대륙간탄도미사일이든, 발사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발사 그 자체로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과 다름없는 호전적이고 불순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유엔 안보리마저 대북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북한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이번의 미사일 발사는 동북아와 그 이상 지역의 평화와 안정, 안보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라고까지 표현한 마당에 이와 다른 견해로써 북의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하여 가타부타 언급하는 것 자체가 별 소용이 없다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북미 사이의 첨예한 정치군사적 대결을 도저히 방관할래야 방관할 수 없는 숙명적 입장에서 남들처럼 또 하나의 조국 북에 대한 오만가지 편견으로 일방적 여론몰이에 가담하여서도 가담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북미 사이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적대적 대치 국면에서 착오 없는 올바른 판단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더욱 그렇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 북미사이의 첨예한 군사외교적 대립 과정에서 북의 호전성과 불순한 기도를 연신 지적하는 주류 여론에서 미국이 북을 상대로 핵 공격 모의훈련을 실시하고, 북의 핵 의혹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선제공격을 공공연히 거론하며, 작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북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계획을 세워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을 실시하고, 북의 지하군사시설을 타격하기 위한 소형 핵무기 개발 실험을 재개하며, 북의 미사일 위협을 구실로 미사일방위체제 구축을 위한 군비 확장에 열을 올리고, 북을 악의 축 국가로 규정하여 북을 선제 핵공격 대상으로 포함하는 국가안보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처하는 국가의 행동에 대하여 침략성과 불순한 기도를 타이르는 것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본 바가 없다. 아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손을 놓고 있다. 오히려 미국의 행동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으로 포장, 강변되어지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결의안' 표결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에 비하여 북의 행동은 당연히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과연 그런가. 북의 미사일 시험발사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북미사이의 힘겨루기 과정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들 알 수 있다. 북은 1993년, 1998년, 그리고 2006년에 이르는 일련의 미사일 시험발사 및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다름없는 인공위성 발사를 통하여 미국이 끊임없는 그 어떠한 군사적, 경제적 압력과 제재를 가하더라도 북의 체제를 붕괴시킬 수없다는 점과 북의 핵 및 미사일 문제로 표출된 북미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미 사이의 직접 협상을 통하여 동시이행, 일괄타결의 방식으로 북미간의 상호적대행위를 중지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는 북미사이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방식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을 미국에게 줄기차게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 역시 북이 군사적 행동을 통하여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외교적 목적과 논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 90년대 미 클린턴 정부 시절만 놓고 보더라도 당시 북미 관계는 영변, 금창리 핵 의혹시설 및 노동미사일과 대포동 미사일 문제로 전쟁 일보 직전 상황까지 이르는 위기를 여러 차례 맞기도 하였으나 클린턴 정부 마지막 시기에는 결국 대북정책조정관 페리 전 국방장관의 대북정책 검토 보고서에 기초한 새로운 대북정책에 따라 북미 사이의 대타협을 이루고 조명록의 백악관 방문과 울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이 실현되기까지 하였다. 이어서 클린턴 대통령이 방북하여 미사일문제에 대한 합의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수순을 밟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비록 북미 사이의 대타협 국면에서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는 가운데 이후 노골화된 대북강경정책으로 북미 사이의 대결국면으로 회귀하고 말았으나 북미 사이의 대결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직접 대화로 협상을 통한 관계정상화에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북이 미국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개선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북미직접접촉과 대화를 회피하고 있고 북의 핵 및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시간을 지체하며 북미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핵문제, 인권문제, 대북금융제재로 강경한 대북 압력을 가함으로써 북을 붕괴시킬 수도, 스스로 붕괴될 수도. 굴복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 점점 통설이 되고 있다. 북미 사이의 지리한 적대적 공방을 마감하는 상식적이고 합리적 해결책이 국제사회 앞에 확인된 마당에 북과의 직접 협상을 거부하는 미국의 속셈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부시의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북과 대화를 하면 국제사회 앞에 초강대국 미국의 명예가 큰 손상이라도 입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미국이 제아무리 군사적 위협과 대북금융제재 등 경제제재조치를 취하고 인권, 마약 공세로 북을 붕괴시키려 열을 올려도 북은 무서울 것 하나 없고 절대 물러서지 않으며 굴하지 않고 혼자서라도 미국에 맞서 북의 사회주의 체제를 지켜 나가겠다는 각오이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에 참석중인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사진 출처 - 연합뉴스    60여년을 미국과 대결하는 가운데 단 한 번도 양보한 적 없이 맞서왔고 항상 벼랑 끝에 서서 절대 굴복하지 않는 자존심 강한 또 하나의 조국을 위하여 부시 대통령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북미관계를 진심으로 개선할 의사가 있다면 크리스토퍼 힐도 좋고 라이스도 좋고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도 좋고 부시 대통령 자신도 좋으니 직접 평양을 찾아 모든 문제를 북미 사이에 일괄타결하면 안 될까. 부디 부시 대통령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세계최강대국의 대통령으로서 대국의 지도자답게 약소국인 주제에 인민을 굶기며 허풍만 남아 택도 없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나 하는 가소로운 북의 목소리에 따뜻한 마음으로 귀기울여 인내심을 가지고 아량 넘치는 자세로 시종일관 북과의 협상에 임하여 북미관계정상화의 디딤돌을 놓는 훌륭한 세계적 지도자의 반열에 올라 노벨평화상을 받는 그날을 꿈꾸어 본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979 | 추천: 3
아내와 나는 연애시절부터 이런 저런 영화보기를 좋아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조용하고, 내용이 풍부하고, 감미롭고, 때론 감정의 역류를 억제할 수 없는 것들이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주로 때리고, 부수고, 웃기는 것들이다. 하지만 같이 영화를 본다.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내가 좋아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직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아내가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의 감성이 허리우드 영화에 잠식된 결과겠다. 어제 밤 아내와 ‘브로크백마운틴’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아내는 친절하게 내게 말한다.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를 휩쓸고 있데.” 아내의 설명은 여기까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부류를 알고 있는 아내는 내가 영화를 보며 지루해하거나 중간에 영화보기를 그만둘까봐 사전포석을 한 셈이다. 끝까지 보라고. 아니나 다를까. 지루하다. 대자연의 풍부한 영상, 한 컷을 잡기도 어려울 아름다운 화면 이것만으로 나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두 사내가 나온다. 두 사내가 같이 양치기 아르바이트를 한다. 양치기 청년들. “늑대가 나타났어요.”라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든 두 사내. 도입부를 보며 나는 “저 많은 양들을 어떻게 다 관리한데. 늑대가 나타나 한 마리 물고 가도 모르겠구먼.”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조금 지났다. 한 사내가 식량을 가지고 오다 곰을 만나고, 놀란 말에서 떨어지고, 짐 싣고 오던 노새 2마리를 잃어버리고, 노새를 찾으러 뛰어가고, 밤이 되어서야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노새와 함께 캠프로 돌아온다. 나머지 한 사내가 피 흘리고 있는 사내에게 얼굴을 닦으라고 수건을 준다. 말없던 한 사내가 조금 말이 많아졌다. 술을 같이 마신다. 둘에게 양은 이미 관심 밖이고 술 마시고 놀다 그만 캠프에서 나동그라진다. 한 사내는 텐트 안에서, 한 사내는 불 옆에서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영화가 이상하게 흐른다. 나는 잘 그려 놓은 서부극정도로만 상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난데없는 이야기가 눈앞에 시작되고 있다. 거친 사내 둘이 텐트 안에서 서로의 욕구를 드러내고, 웃통을 벗고 풀밭에서 뒹군다. 그리고 양들의 방목이 끝나자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양치기도 끝나고 둘은 헤어진다. 더 거칠어 보이던 사내가 다른 사내를 보내고 나서 헛구역질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울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엔딩...   답답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남는 느낌이다. 무엇인지 정리되지 않는 느낌. ‘우리의 히어로가 지구를 구하는 걸로 끝내면 더 이상 잔상도 없고, 깔끔하고, 얼마나 좋아.’라는 푸념도 한다. 그러나 아내에게 들리지 않게... 인간의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관심사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일 것.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그려도, 예컨대 그것이 그림이건, 소설이건, 영화이건 일단 비판과 비난을 받을지언정 금기시하지는 않는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인 한. 최근 개봉되었던 한국 영화 중에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란 영화가 있었다. 여기에는 7가지의 사랑 얘기가 있다. 그런데 유독 관객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던 사랑 얘기가 하나 있다. 극중 천호진이 분한 조 사장의 사랑 얘기가 그것이다. 왜?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한 장면  동성애. 동성애의 역사는 어쩌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되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 중 종족번식을 위한 목적 외의 목적으로 사랑행위를 하는 동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행위가 동물의 사랑행위와 그 목적에서부터 다른 마당에, 자신의 사랑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물과 비교하며 자연의 섭리 운운하는 것은 비정상이고 몰상식이다. 이미 인간은 동물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 존엄한 존재임을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그 존엄한 존재가 자신의 존재 형식을 스스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것도 자신이 가진 자연스런 감정에 따라.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하는 두 사내의 만남을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가로 막고 있던 장벽은 무엇일까. 가족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비로소 만남의 기쁨을 얻을 수 있게 한 장벽은 무엇일까. 14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두고서만 사랑을 가능하도록 한 장벽은 무엇일까. 기껏해야 1년에 한번 아니면 2년에 한번 만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장벽은 무엇일까. 가족과 헤어져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랑이도록 만드는 장벽은 무엇일까. 이렇게 만나지만 두 사내의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만드는 장벽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죽음으로 서로를 갈라놓는 장벽은 무엇일까. 만년설 뒤덮인 와이오밍 주의 수려한 자연 경관 보다 아름다운 두 사내의 사랑. 이런 두 사내의 사랑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과연 당신은 두 사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해본 적은 있느냐고.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49 | 추천: 0
어제 교회구역모임에서 술을 좀 마셨다고, 일요일 아침에 아내가 서더리탕을 끓였습니다. 체중을 줄이고 싶어서 아침밥은 반 그릇만 먹으려고 했는데, 얼큰한 국물 맛이 혀에 착 감겨듭니다. 기름이 우러난 생선 국물을 연거푸 떠먹으면서, 남겨 두었던 밥 반 그릇을 마저 먹기로 합니다. 오늘은 예배 후 점심밥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아내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서더리탕 국물을 연신 입으로 퍼 나릅니다. * 서더리탕       - 원래 말은 "서덜", 서덜은 생선의 살을 발라낸 나머지(알, 뼈 등)를 말한다.         서더리탕은 살을 발라내고 알, 뼈, 내장, 아가미 등으로 끊인 탕을 일컫는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을 떠올립니다. 회를 먹고 남아서 싸가지고 온 서더리탕이랑 밥 한 그릇이 이렇게 근사한 한 끼 식사가 되는구나! 이틀 전 부모님께 식사대접을 하려고 찾은 회집에서는 참 많은 요리가 차려져 나왔습니다. 소위 ‘스끼다시’라는 요리들이. 음식 가짓수가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닌데, 그 식당 음식은 입에도 잘 맞았습니다. 덕분에 부모님과 아이들을 즐겁게 해 드릴 수 있었지요. 다들 식사를 잘 하셔서, 맨 나중에 나오는 서더리탕은 재료를 포장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실, 여름엔 오이 하나로도 된장 찍어서 밥 먹을 수 있어야 돼.” 이렇게 말하는 예쁜 아내의 말에 나도 찬성합니다. 우리는 될수록 단순하고 좀 느린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관습에 길들여진 부분도 많아서,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은 제법 그럴싸하기를 기대하지요. 우리가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드셔야 하는 음식이니까요. 그래서 요리가 잘 나오는 그 회집을 찾아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서더리탕 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그날 식사가 좀 과했던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제법 그럴듯하게 차려낸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생활을 ‘문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소위 문명화된 세계는 도시화로 표현되는 세련미가 우선 눈에 띕니다. 먹을거리나 주거 형태가 보다 편리하고, 아름다워 보이지요. 외국은 고사하고, 어쩌다 노원구 롯데백화점이나 강남역의 어느 거리를 걸어보아도, 내가 사는 동네와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여러 가지 상품들과 또 그런 상황에 어울리게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들....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 기술이 발달하고 경제가 살아난다고 들 말하지만, 보다 맛있게 먹고 보다 세련되게 살아가려는 가운데 우리는 어떤 만족감에 도달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우리는 욕구를 내세우느라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단순하고 정직한 국물 맛의 만족감 때문에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화려한 요리는 어떤 ‘문명’일까요? 내가 찾고 있는 하느님은 이런 문명 속에서 더 복잡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을 맛으로 비유한다면 깨끗한 물 맛 이나 바람의 맛일 것 같습니다. 반찬 한 가지로 손님을 대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찌개 하나로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익숙해져 있는 관습을 쉽게 덜어내지 못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한 걸음씩 천천히 가야겠지요.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462 | 추천: 0
나는 새벽의 상상력이 좋다. 하루의 일과를 곱씹어보거나 그리운 이름을 떠올려 보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잡문을 끄적거릴때 새벽의 고요가 가져다주는 마음속의 풍경은 마치 도화지 같아서 나는 늘 새벽의 풍요위에 상상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간혹 여명(黎明)을 창으로 불러 함께 아침을 맞이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농익은 살구, 새벽비에 떨어지듯 현관을 “툭” 치고 바삐 돌아서는 신문 배달부의 부지런한 생산력에 감사하거나 우는듯 혹은 웃는듯 새벽 골목을 헤매이는 폐지 줍는 노인들의 리어카 소리를 리듬처럼 듣고 난 후이다. 또한 지금까지 나의 부족한 창작물의 대부분은 새벽의 고요가 부화시킨 어린 생명과 같은 것이므로 새벽은 나에겐 중요한 생산 수단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 나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독일 월드컵 16강 경기를 틈틈이 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현재 스코어 1:1 ... 대단하다. 토레스와 비아, 라울의 스페인 공격진은 정교한 패스워크와 공 보다 빠를 것 같은 스피드로 프랑스를 압박하고 노쇠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프랑스의 아트사커는 비에이라의 발끝에서 이어진 리베리의 결정력으로 섬세하게 살아난다. 이 정도의 경기라면 나의 중요한 생산수단인 새벽을 통째로 반납해도 괜찮을 만큼 축구의 묘미는 충분하다. 돌이켜 보면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축구가 재미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3백과 4백이 혼재된 수비라인은 간간이 상대방 포스트 플레이어에게 결정적 기회를 허용했고 조재진의 머리에만 의존하는 듯한 원톱 시스템의 공격진은 때론 단조롭거나 무료하기도 했다. 토고전과 프랑스전에서 얻었던 이천수. 안정환. 박지성의 골에는 잠자는 딸 아이가 울며 나올만큼 환호했고 스위스전 심판의 어설픈 판정(내가 보기에 오심은 아님)에는 육두문자가 절로 나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 새벽에 전국 150만 씩이나 되는 국민들이 잠시 붉은악마가 되어 거리응원을 펼치거나 2006년 한해를 모두 월드컵에 바친 방송 3사의 충성어린 경쟁과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기뻐하는 프랑스 선수들 사진출처 - 네이버 예선전을 포함한 월드컵 기간동안 한국은 세 명의 감독을 맞았었다. 그중 코엘류 감독은 월드컵 예선을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그것이 여론이 되어 사임했으며 이어 감독으로 선임된 본프레레도 코엘류와 같은 동병상련을 맛보아야 했다. 코엘류 감독은 떠나면서 국가대표 팀의 총 연습시간이 약 72시간정도라며 투덜거렸고 본 프레레는 자국에서도 한국에 대한 독설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 약 9개월을 남겨두고 부임한 아드보카드 감독에 대한 언론의 애정은 이전의 감독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국가대표팀의 전 경기를 봐 왔던 나는 그가 다른 감독에 비해 월등히 나은 면을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언론은 내가 찾지 못하는 그의 장점들만 일일이 나열해 갔다. 이번 독일 월드컵에 대한 방송사들의 상업적 경쟁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것이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화면에 오직 캐스터나 해설자의 상품성에 의존하여 채널을 선택해야 하는 답답함과 월드컵 특집 뉴스나, 그것도 모자라 거의 24시간 월드컵 관련 편성 까지 했던 방송사의 과도한 광고경쟁은 붉은악마의 자랑스런 “대~한민국” 구호와 맞물려 월드컵을 정작 축구는 사라지고 돈벌이와 묘한 애국주의만 남는 공허한 제전으로 만들었다. 명절 대목을 준비하는 재래시장 상인처럼 아마도 방송 언론사들은 아드보카트의 장점만을 부각시켜 여론을 축구에 대한 환각으로 몰아넣고 월드컵한탕 대목을 위한 담합과 경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은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방송 3사가 들인 돈이 500억이 조금 넘고 수익도 그 정도라니 그만하면 된 듯 싶다. 한국팀이 16강 8강의 무대에서 2002년 4강팀의 면모를 보여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최대 800억 이상의 수익을 예상했다던 방송사의 기고만장한 상업주의적 행태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고 축구의 재미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붉은 티를 입은 어린 꼬맹이의 “대~한민국”을 더 듣지 않아서 다행이다. 90년대를 관통하면서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극심한 내부적 갈등에 놓여 있다. 사회적 사안 하나하나마다 첨예하게 갈리는 의견의 대립은 지난해 유행했다던 상화하택(上火下澤)의 형국을 극복하지 못한 채 올 하반기를 맞이해야 한다. 단 한 치의 관용조차 용인되지 못하는 현재임에도 전 대회 4강팀의 16강 탈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다. 선수들의 투혼에 불타는 헌신과는 별개로 애초에 16강에 못들 전력이었다면 지금처럼 호들갑 떨지 말았어야 했고 16강 전력인데도 탈락했다면 한번쯤 의문을 던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24일 새벽(한국시간) 하노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스위스에 0-2로 패한 태극전사들이 경기가 끝난 후 허탈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아쉽지만 잘 싸웠다”는 의견이 전부인걸 보면 그동안 없었던 관용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역시 지단이다 3:1 프랑스 승 달빛에 기대어 서로의 칼날을 맞세우다가 상대방 호흡의 빈틈을 여지없이 파고들어 승부를 가르는 무인의 단 일초식 처럼 축구는 저렇게 하는 것이다. 저 조각같이 빚어내는 숨막히는 승부의 경연을 보기위해 나는 이 새벽의 생산을 중단할 것이고 여전히 지단을 가진 프랑스는 위대하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9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