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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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빨간 베레모의 공수부대 중령 출신. 친미 우익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실업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거리로 뛰쳐나와 저항하는 민중의 편에 서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하여 옥고를 치르고 나와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인물이다. 그가 국민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며 일독을 권한 책이 있다. 올해 출판 400주년을 맞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이다. 스페인의 시골 귀족이 기사도 소설 읽기에 탐독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스스로 ‘돈키호테’라고 자칭하는 기사가 되어 세상의 부정과 부패를 없애고 학대당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몽상에 빠져 낡은 갑옷과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로시난테라는 앙상한 말을 타고 그를 따르는 하인 산초 판사와 함께 겪는 좌충우돌의 모험담을 내용으로 하는 풍자소설이다. 흔히 돈키호테를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자, 시대의 이단아, 앞뒤 계산도 없이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저돌적 인간형과 연결시킨다. 호기심도 많고 고민도 많지만 가는 곳마다 현실세계와 충돌하며 우스꽝스럽게 돌출행동과 돌출발언을 일삼는 돈키호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주변 사람들과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아도취에 빠져 엉뚱한 것에 집착하고 무모한 도전으로 결국 실패를 맛볼 수 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돈키호테.   스페인 광장에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동상 그런데 그는 국민들에게 돈키호테를 따라 배우자고 하고 있다. 정부 예산으로 돈키호테 소설책 100만권을 제작해  공공장소에서 국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며 “우리 모두 소설 돈키호테를 읽어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없애고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나서는 전사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며 “돈키호테의 추종자가 될 것”을 역설하고 “앞뒤 재지 않고 이상을 향해 용기있게 나아가는 행동형 인간이야말로 불평등과 불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필요한 현실주의자”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어쩌면 돈키호테적 발상을 가진 어느 나라 대통령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우리와 별로 상관도 없을 터인데 그냥 관심없이 넘어갈 수도 있다. 그는 19세기 스페인 식민시대 중남미 독립의 전설적 영웅 시몬 볼리바르를 계승해 자주적 진보국가를 건설하고 제2의 중남미 해방을 꿈꾸며 볼리바르 혁명이라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의 독특한 민중혁명을 추진 중에 있다. “민중에게 권력을 주지 않는 한 가난을 없앨 수 없다”는 신념으로 민중의 참여를 볼리바르 혁명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정말 돈키호테 같은 발언과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당당하게 미국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미국 주도의 정의롭지 못한 세계를 바로잡자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미국에 종속되고 의존하는 중남미 지역의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경제적 착취의 역사를 종식하기 위해 미국 주도의 중남미 자유무역지대에 맞서 세계 5위의 자국의 풍부한 석유자원을 매개로 한 에너지 협력, 중남미 은행 창설 등 미국의 굴레에서 벗어난 중남미 지역의 독자적 경제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제국 중심의 자유시장, 자유무역,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을 기치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대항해 “민중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이지, 시장이 결코 신이 아니다”라고 주창하며 민중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에서 벗어나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대안의 경제체제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돈키호테적 열정은 브레이크 없는 기차마냥 멈출 기세가 없다. 미국의 노골적인 암살 위협에도, 군사적 침공 위협에도 거침없는 행보를 막을 길이 없으니 말이다. 친미 기득권 세력의 쿠데타도, 총파업 시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쿠데타 세력에 의해 유배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대통령궁은 그의 복귀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시위 인파로 뒤덮였다. 대통령직에서 몰아내기는커녕 며칠 만에 복귀함으로써 민중권력이 강화되어 볼리바르 혁명의 가속도만 붙는 형국이 되었다. 석유산업의 명실상부한 국유화를 통해 확보한 재정을 바탕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프로그램이 확대되었다. 지주들로부터는 토지를 몰수하여 경작 농민들에게 분배하였고,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 100만 예비군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중남미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중동의 알자지라와 같은 방송국을 설립하여 제2의 중남미의 해방을 위한 볼리바르 형제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사진출처: 연합뉴스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북한과 쿠바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어 걱정스럽단다. 1998년 대통령 선거, 2004년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국민소환투표 등 중요한 고비마다 선거혁명으로 오뚜기처럼 부활한 그를 두고 좌파 포퓰리스트(민중주의자)의 선거제도를 악용한 선동에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현혹되었단다. 볼리바르 혁명을 지향하는 그로 인하여 중남미에 좌파 포퓰리즘이 확산되어 중남미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게 되었단다. 앞으로 중남미 각국의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에 그가 개입하지 않을 선거가 없을 것이란다. 그래서 멕시코, 볼리비아, 니콰라구아, 콜롬비아 등 친미성향의 정권이 흔들거리고 있단다. 민중의 힘을 등에 업은 돈키호테 대통령. 신자유주의에 맞서 돈키호테 정신으로 우고 차베스와 함께 시몬 볼리바르와 체게바라의 전설을 이어가는 베네수엘라 민중들. 우리가 보기에는 초강대국에 당당하게 맞서 조금도 식을 줄 모르는 에너지로 제2의 중남미의 해방을 꿈꾸는 그들이 너무나 무모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불의와 허구에 찬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돈키호테처럼 씩씩하게 싸우고 있을 때 우리는 그동안 살아왔던 무기력한 모습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미동맹의 예찬가를 부르며 어두운 터널 속에 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돈키호테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찾아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돈키호테의 꿈이 가소롭게 여겨진다면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이 지겨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언제까지 거꾸로 역사를 읽고 거꾸로 된 세상을 보며 거꾸로 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돈키호테가 되어 돈키호테와 같은 용기와 꿈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우리 모두가 돈키호테가 되는 날 세상은 비로소 바로 돌아갈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86 | 추천: 0
‘수돗물불소농도조정사업’(수불사업)이 중대한 국면을 맞고 있다. 그동안 일부 지자체에서 실시해 오던 ‘수불사업’을 중앙정부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실시하도록 의무화하는 ‘구강보건법 개정안’이 지난 6월 국회에 제출된 상황에서, ‘수불사업’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의견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개정안은, 충치예방 효과가 뛰어나고 인체에 무해한 수돗물 불소화를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되, 지방자치단체의 문제 제기가 있는 경우에는 여론조사를 실시해 명시적 반대 의사를 밝힌 사람이 과반수가 되지 않으면 그대로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출처: 노컷뉴스  ‘수불사업’이 처음에 ‘상수도수불화사업’이라는 공식명칭에서 ‘수돗물불소농도조정사업’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수돗물에 불소를 과다하게 첨가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불소는 자연 상태에도 도처에 존재하므로 수돗물에서 불소의 농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조정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고 있다. 공식명칭이 바뀌게 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수불사업’은 과학적인 논쟁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역사회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라고 본다. 불소의 충치예방 효과는 권위있는 여러 연구들에게 이미 입증된 바이고, 그 안전성에 대해서도 큰 의문이 없다. ‘수불사업’에서 권장하는 수돗물의 불소 농도는 0.8~1.0ppm이다. 이에 비해 설악산의 오색약수를 비롯한 여러 약수들은 불소농도가 1.3~1.5ppm이고, 차에도 불소가 1ppm 이상 들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소의 충치예방 효과와 안전성에 대해 지역주민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주민들의 몫이 아니라 ‘수불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사진출처: 한겨레  우리나라는 여러 개의 핵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다. 유가의 변동에 대처하고, 미래에 원유가 고갈될 것에 대비해서 핵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입장은 완고하다. 하지만, 핵발전소 가동에 따르는 핵폐기물을 처분할 핵폐기장을 건설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어느 지자체도 핵폐기장 건설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핵 전문가들과 정치권은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과 더불어 지역주민들을 설득하여 동의를 이끌어내는 절차를 거쳐야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필요를 앞세워 안면도 사태, 부안 사태와 같은 무리수를 두고 있다. ‘수불사업’을 추진하는 분들은 이들과 어떻게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건치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다수 주민이 원하는데도 소수의 반발로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지역 관료들이 불소화 시행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개정안의 취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요체는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이 아니라, 소수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수불사업’은 한국 사회가 형식적인 민주화 이후에 지역자치의 차원에서 실질적인 민주화를 진행해가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58 | 추천: 0
추석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추석이 되기 전 주말이면 수도권 인근의 국도는 성묘객이 몰고 나온 차로 북새통을 이루고, 라디오는 어느 길과 어느 길은 성묘 인파로 막히니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친절하게 안내하기 바쁘다. 그래도 그 막히는 길을 찾아간다. ‘왜 이렇게 길이 막히는지 모르겠다’라거나 ‘내년에는 사람 없을 때에 성묘 가자’ ‘시간을 당겨서 새벽에 가자’라고 말하면서도 고생길을 달려간다. 사람보다 느리니 달려간다고 할 수도 없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상 모시기는 참으로 유별나다. 설, 한식, 추석이면 꼭 성묘를 다니고, 조상을 찾아뵙고, 제사 지내고, 차례 지내고,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모시는 시제 지내고……. 영문도 모르는 세살짜리 꼬마 녀석에게 절을 시키며 절하는 흉내라도 내면 좋아라 박수치며 잘했다고 칭찬하고 그 부모는 으쓱해 한다. 술 한 잔 따라 올린 남자들은 대단한 일 한 것처럼 가슴 뿌듯함을 느끼고, 힘들게 음식 장만한 아낙네들은 그런 남자들을 보며 올해도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요즘 내가 사는 동네는 주말이 되면 확성기 소리와 북 소리로 시끄럽다. 토요일 밤이 되면, 그리고 일요일 아침이 되면 관리실에서 안내방송을 내보낸다. “일요일 아침 10시에 ○○성당 앞에서 반대집회가 있으니 주민여러분의 참여를 부탁드린다”는 내용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성당에서 납골당을 만들기로 했단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그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혐오시설인 납골당 건립을 반대한다는 것이고, 납골당 허가를 해준 구청에 항의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플랜카드가 나붙었다. 아이들이 곡소리 때문에 학교 다니기 무서워한다거나, ○○성당의 신부들은 지옥 불에 떨어지라거나 학교 근처에 잡귀신이 나돌아 다녀서야 되겠냐는 등의 내용이다. 납골당이 생기면 교통 혼잡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내용도 보인다. 그런데 집값 떨어진다는 말은 보기 어렵다. 분명히 떨어질텐데……. 남한의 면적은 99,461㎢라고 한다. 1999년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남한 내 묘지 면적이 996㎢인데, 이는 전 국토 면적의 1%에 해당하는 정도이고, 주택면적 총 대지 2,177㎢의 절반에 가깝고, 서울 면적의 1.6배에 해당하고, 전국 공장부지 418㎢의 두 배를 넘는 수준이다. 공설묘지든, 법인묘지든 묘지를 만들기에는 전국토가 이미 포화상태이다. 아울러 납골당 설치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라는 것이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일반화된 의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1조는 “이 법은 매장·화장 및 개장에 관한 사항과 묘지·화장장·납골시설 및 장례식장의 설치·관리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보건위생상의 위해를 방지하고, 국토의 효율적 이용 및 공공복리의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공설묘지든, 법인묘지든 묘지를 만들기전에는 전국토가 이미 포화상태이다." 라고 규정한 뒤, 제4조에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묘지의 증가로 인한 국토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화장 및 납골의 확산을 위한 시책을 강구·시행하여야 한다”라고 하여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규정한 뒤에 구체적으로 자치단체장들에게 묘지 등의 수급계획을 세우도록 명하고 있다. 화장 및 납골의 확산은 결국 국토의 효율적 이용 및 공공복리의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시책과 수급계획까지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렇게 국토의 효율적 이용에 도움이 되고, 공공복리 증진에 도움이 되는 납골당 건립을 사람들이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뭔가. 아이들이 납골당을 지나면서 곡소리를 들으면 무서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맹모가 맹자를 데리고 3번 이사하면서 장의사 옆에 있던 집에서 이사를 했다는 고사를 생각하면 학교 옆에 납골당이 생기는 건 부적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교통 혼잡을 야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명절, 한식 때면 길이 막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성묘를 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납골당이 생겼을 때 그곳으로 찾아올 수많은 성묘객은 충분히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작과 사실은 엄연히 다른 법. 과연 납골당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속내가 공공 이익을 위한 합리적 근거와 인정(人情)의 틀 안에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나의 귀에는 저들의 목소리가 속 좁은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 외침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작은 성당 안에 납골 봉안실이 과연 몇 개나 될 것이며, 그 봉안실을 찾을 유족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이기에 곡소리가 무서워 아이들이 학교가기가 무섭다고 하는가. 그 곡소리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 아닐까. 죽음이 삶의 자연스런 연장이고, 죽음조차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삶의 무게를 느끼는 살아있는 체험장이 될 수도 있을 것 아닌가. 내 조상 아니니 안 된다는 것인가. 자신의 조상은 차례다, 제사다, 어떤 음식이 올해는 빠졌다, 음식 위치가 바뀌었다, 절은 몇 번 해라, 술잔은 어떻게 돌려라, 뭐다 뭐다 하며 챙기지만 정작 다른 이의 조상은 잡귀신에 불과한 게 우리의 정신세계인가. 차라리 솔직하게 반대하는 이유를 말하면 밉지나 않겠다. 무시무시하게 새빨간 글씨로 쓰여 진 플랜카드를 보는 것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속내는 솔직히 집값, 땅값 떨어진다는 이유로 납골당 건립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식하지 못한 정신적 괴리를 스스로 드러낸다. 실제 조상을 정말 잘 모실 생각이면 그 멀고도 막히는 길 허위허위 찾아가 일년에 한 두 차례 성묘를 하는 것보다 가까운 납골묘에 모셔두고 자주 찾아뵙는 것이 오늘날 변형된 효의 모습일 것이다. 생활공간에 자리잡은 LA 로즈힐의 장례식장.  이곳에선 결혼식도 진행된다. 도심한복판에 위치한 호놀룰루의 한 공원묘지. 여유로운 도심 공원을 연상시킨다. 다른 나라에서는 죽은 자를 산자와 함께 삶의 한복판에 두고 있는데, 효를 지상 최고의 가치인양 여기는 우리는 왜 죽은 부모 형제를 삶의 현장에서 제거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체계를 배신하는 행위 아닌가. 서글펐다. 어쨌든 남에게 나의 조상은 잡귀신에 불과했으니까. 아무튼 이런 일을 전해들은 한 할머니께서 한 말씀 하셨단다. “지들은 안 죽나?”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58 | 추천: 0
최근 10년간 일본에 있는 조선인 학교(통칭 민족학교)의 수가 1/3로 줄어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의 기쁨을 그리던 조국의 형제들과 함께 누리지도 못하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수 없어 낯선 이녘의 땅에 차가운 냉대를 삭이며 살아온 재일조선인 1세대들의 한과 눈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몸서리 쳐 지도록 묻어있는 민족학교. 적국은 패배했으나 그들의 땅에서 또다른 패배자로 몸사리며 살아야 했던 조선인 1세대들이 강제동원되어 살과 피를 묻었던 방제공장, 군수공장의 학대와 채탄장과 돌산과 비행장 활주로 공사의 피를 짜내는 노동의 설움을 딛고 조선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황무지를 눈물로 가꿔온 땅에 세운 조선학교.     ⓒ한겨레21  가끔씩 일본인에 의해 치마 저고리가 찢기는 일이 있을때나 관심을 갖다가 이내 냉담해지는 조국을 그럼에도 고향하늘로 섬기며 간절히 통일을 염원하는 그들의 역사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1946년. 쓰레기 매립장으로 강제이주 당한 조선인들이 비가오면 무릎까지, 태풍이 불면 허리까지 차는 오염된 물줄기를 쓸어내고 터를 닦아 세운 도쿄도의 에다가와 조선학교도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도쿄도(도지사가 이시하라라고 툭하면 망언을 일삼는 극우인사죠)에서 지난 13년간의 토지사용 임대료 4억엔을 물어내라고 소송을 건것입니다. 얼마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에다가와 민족학교 대책회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그전에 그일을 담당하신 지구촌 동포 청년연대의 담당자께서 행사 내용에 관한 연락을 해 주셨지만 이미 그전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던것은 몇년전 방문했던 토쿠야마 민족학교나 쿄토의 우토로 마을에 대한 강한 인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학생수가 더 줄어들었을테지만 유치원.초.중.고등학교를 불과 40여 가정에서 내는 교육비로 운영을 해야하는 토쿠야마 민족학교의 운영실태와 그럼에도 똘똘하고 맑은 아이들, 열정이 넘치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그와 다르지 않을 에다가와 민족학교의 모습속에 투영이 되었고 이번 에다가와 재판이 일본내에 있는 재일교포들의 교육에 대한 탄압의 도미노로 이어지지는 않을까하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겠지요. 이사건이 단순한 토지 사용료 부담을 둘러싼 재판이라기 보단 점차로 우경화 되어가는 일본사회의 반 평화 분위기가 차별의 극단으로 치달아 천황을 앞세워 총칼을 이웃들의 가슴에 들이댔던 지난 역사의 반복으로 이어질까하는 우려 때문이구요.   ⓒ 한겨레21  "평화와 공존 상생"이라는 인류의 화두에 반대하는 호전적 무리들의 준동에 대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거세되지 않은 반역의 역사는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의 목줄기에 복수의 칼을 겨눌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언제고 다시 움직이는 현재로 이해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거사 진상 규명에 관한 일들도 바로 현재의 왜곡된 역사의 형태를 바로잡는 일이라 생각이 됩니다. 토쿠야마 학교에 갔을때 20대 여선생님이 당돌하게(?) 질문을 했던일이 생각납니다.  "이 선생님은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낯부끄러운 삶은 살지 않았다고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만... 그때 저는 사실 저 스스로에게 무척 자랑스럽지 않았나 싶습니다. 21세기에도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에다가와 소식을 들으며 훗날 낯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내가 되지 않길 바라며...    ⓒ 한겨레21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84 | 추천: 2
지난 7월 중순 기획예산처는 2006년도 보건복지부 예산요구안에 대한 검토의견서를 통해, 자활후견기관 운영비 지원단가를 1억5천5백만원에서 1억4천만원으로 감액해서 심의하고 있음을 밝혔다. 감액이유는 ‘목적사업비보다 기관운영비를 초과 집행하는 기관과 자활공동체를 3년간 구성하지 못하는 기관에 대한 지정취소 또는 통폐합’을 통보했던 ‘04년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자활후견기관의 목적사업비 비율은 지방자치단체에 책임을 물을 일이며, 자활공동체 구성 역시 일관성 없는 정부정책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에 감사원의 감사는 탁상감사의 표본이라 할만 했고, 보건복지부 역시 이를 인정하여 지정취소 및 통폐합 조치를 유보한 바 있다. 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기획예산처가 다시 그것을 예산삭감의 근거로 들이대는 것은 정부의 예산안 검토작업이 매우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빈민’ 들의 자립을 돕는 복지단체와 종교, 시민사회단체 등 전국 242개 자활후견기관의 활동가들이 지난 8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 종묘공원에서 자활사업의 참여권리 확대와 민간 구실 축소 중단, 운영비 정부보조금 증액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한겨레 . 이 기회에 가난한 이웃들의 경제적 자립과 자활사업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힘쓰는 모든 분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정부가 빈민운동세력의 ‘생산공동체운동’에 주목하고 이를 법제화하여 ‘생산적 복지’의 한 사업으로 시작했던 ‘자활사업’과 ‘자활후견기관’의 참의미를 되새기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피하려는 것만 같은 정부 자활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자활사업을 경제적 효율성만으로 평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예산편성이 경제적 성과에 의존하여 진행된다는 것이다. 자활사업을 통해 얻어야 할 공공선은 빈곤가정이 사회적 박탈감을 극복하여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자활사업에 대해 수량적 근거에 의하여 그 성과를 판단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실현하는 장으로 진행되어야 할 자활사업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논리로 해석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밀려난 사회적 약자를 공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자활사업에 대해 탈수급, 자활공동체 창업 등의 평가기준은 가난한 이들을 다시금 시장의 경쟁체제로 밀어 넣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과 제도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셈이다. 둘째, 민관 협력관계가 깨어지고 관 주도의 자활사업이 집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설계 당시의 자활사업은 지역 현장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활동한 민간단체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창출하여 자활 자립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더 이상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사람들이기에 지역의 민간자원을 동원하고 틈새시장을 찾아 공략해야 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민간역량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민간의 현장성과 정부의 자원 및 추진력이 보완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연합뉴스  그러나 자활사업에 대한 방향과 결과물에 대해 정부가 지역상황과 참여주민들의 노동현실을 무시한 성과위주의 정책을 일관함으로써 민간은 그저 국가예산을 집행하고 전달하는 역할로 축소되고 말았다. 더 이상 민간자원의 자발성과 현신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요구하는 성과를 채우기 위해 지자체를 설득하여 예산을 확보하고 참여주민들에게 성과를 독려하는 역할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자활사업 참여 주민들을 사회적 약자로 보는 관점이 없다는 것이다. 자활사업 현장에서 만나는 참여 주민들은 이미 민간시장의 경쟁체제에서 밀려나 자활사업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다. 자본의 경쟁 속에서 그들의 노동능력에 맞는 노동으로 자립 자활을 일구어 가는 것은 너무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들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은 이들에게 최선의 노동을 보장하고 그 노동의 대가가 적절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보호된 시장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량적 목표치에 급급하여 단기간에 자활후견기관을 전국 곳곳에 지정하고 운영하면서 이에 따른 정부의 역할이 지정-예산투입-감사-행정조치로 일관한다면, 더 이상 기대했던 민간참여의 성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자활후견기관을 운영하는 민간자원은 거대한 자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열정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부가 법과 제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민간이 그들과 함께 노동하고 삶을 나누고 교육을 통해 변화를 체험하면서 사회적 소외와 빈곤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활사업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대원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신부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30 | 추천: 0
눈만 뜨면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기기들로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내심 위축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새로운 소식에 먼저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기자로서의 생리가 이런 처지에 당혹감을 더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른바 ‘괜한 걱정’에다 ‘사서 하는 고생’까지 더해서. 출근하면서, 출근하자마자, 쉬면서…. 틈나는 대로 각종 소식지나 인터넷을 뒤져야만 불안감을 털어낼 수 있는 신세는 간혹 ‘이러고 살아야 하나’하는 자문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디지털문화와 그것이 용해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일상적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보와 그 양에 의해 평가받는 듯하다. (여기서 정보의 질은 그 다음 문제인 것 같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몇 전문가의 영역이다시피 하던 ‘저장 용량, 처리 속도, 화소…’ 등의 용어는 이미 어린아이들의 대화에서조차도 생소하지 않다. 따라서 이런 일상 속, 낯설지 않은 생활 속에 놓인 ‘허구’와 ‘부조리’를 놓치지 않고 살기란 갈수록 쉽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기록에 민감한 기자이다 보니 기록 매체를 둘러싼 허구적(?) 현실에 혀를 차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예로, 한계가 어디일 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고 있는 카메라 화소수 경쟁만 하더라도 조금만 떨어져 살피다 보면 근본도 모른 채 ‘광고’라는 타자(他者)에 휘둘리는 군중들의 모양새를 어렵지 않게 발견케 된다. ‘폰카’(이제 이 말도 따로 설명을 달 필요 없이 대중화된 세상이다)를 애용하는 이들 가운데서 ‘이 정도면 쓸만한데’라는 자만심을 가지는 순간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되고 마는 세상. 그래서 이른바 ‘마니아그룹’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정보 세상을 휘젓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 그들이 그렇게 매달리는 화소수라는 게 일정 수준 이상이면 눈으로 봐선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화소라는 게 디지털 카메라에서 빛에 반응하는 필름 역할을 하는 반도체 센서(CCD 또는 CMOS)에 담긴 회로의 집적도를 말하는데, 사진의 화질은 이 화소와 함께 렌즈의 정밀도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소수가 아무리 높아도 렌즈가 따라주지 않으면 헛물만 켜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귀하의 탁월한 선택’이라는, ‘자존심’으로 포장된 ‘허영심’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의 선택은 귀결되고 만다. 여기에다 ‘광고’를 통한 선택 행위가 수용자 자신은 물론 주위에 적잖은 귀감이 되는 양, 그래서 리더라도 되는 양 그럴싸하게 포장까지 하고 있으니 선택은 갈수록 쉬워지면서도 쉬운 것만은 아닌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이 구축한 독점적 질서(질서라 부르기도 뭣하지만)를 자연스럽게(?) 강제하는 파쇼적 기제를 ‘광고’ 속에서 읽어낸다면 논리적 비약일까.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다소 무식하게 비치더라도 먹고 사는 일, 책임져야 할 나를 둘러싼 환경에 당장 문제를 낳는 일이 아니라면 조금은 디지털세상에 무관심해지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무식한 듯 보이더라도 ‘손맛’과 ‘경험’에 의지하는 우직함이 값어치 있어 보인다. 이런 일탈(?)을 즐기다 보니 디지털이라는 ‘편리’를 외피로 내 속에 잠재돼온 파쇼적인 본질에도 눈을 뜨게 되는 요즘이다. “그 또래라면 누구나 다 하니 너도 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 “이번에 ○점 이상(누구는 그까짓 점수라고 할 지 모른다) 못 받으면 컴퓨터 못하는 거야” 말이야 부드럽게 하지만 얼마나 아이들을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떠밀어댔는지 돌아보게 된다. 부끄럽게도 너무 늦게 그런 자신을 발견하면서 아이들에게 두 번 다시 이런 일로 용서를 청하지 않길 다짐하게 되는 요즘이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03 | 추천: 1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검사들이 삼성으로부터 떡값 받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폭로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술렁이고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당사자로 지목된 검사들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자신들은 전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는 가운데 법무차관이 사표를 냈고, 법무부 장관은 감찰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을 수사하여야 할 주체인 검찰이,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 도청 파문으로 권력과 언론의 불법적인 유착관계를 보여주는 범죄행위를 자행한 삼성에 대해서는 수사를 하지 않고 있을 뿐더러 수사할 의지조차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검찰인지, 이런 검찰에게 수사권을 독점케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검찰이 말하는 것을 그냥 믿어야 하는 국민들만 불쌍하다. 검찰 스스로 지난 세월 불법적으로 취득한 증거들을 가지고 법원에 기소를 하였고, 또한 법원은 적법 절차 없이 취득한 압수물이라고 할지라도 증거 능력이 있다고 하며 검찰과 궁짝을 맞추면서 판결하여 왔음에도, 마치 검찰은 지난 세월동안 적법절차를 준수하였던 것처럼 수사를 할 수 없다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정말 이율배반을 넘어 후안무치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먼저 스스로 지난 세월 불법적으로 취득한 증거를 가지고 사용한 사실부터 먼저 국민 앞에 사과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나도 검찰에서 검사를 몇 년 하면서 명절 때 떡값을 받은 사실이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를 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며, 돌을 던진다면 기꺼이 받겠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 대다수의 검사들은 변호사 등으로부터 떡 값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던 관행이 있었고, 이후 의정부 법조비리, 대전 법조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이런 검찰의 떡값 문제가 거의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오래된 떡값 관행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도 사죄를 하지 않는 작금의 행태도 이제는 극복해야 할 때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떡값 문화는 역사적으로 그 뿌리가 깊다고 생각한다. 온정주의적 사회 행태는 촌지라는 명목으로, 떡값이라는 명목으로 아직도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이러한 떡값 문제를 단순히 일시적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범사회적인 ‘떡값 퇴치 문화 운동’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언론 보도들은 이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번에 폭로된 검사들의 떡값 사건은 단순한 떡값이 아니고 뇌물 사건으로 불러야 마땅한데도, 각종 언론들은 그야말로 단순한 ‘떡값’ 문제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행태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번 사건은 ‘뇌물 사건’이다. 뇌물 사건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그 금액의 과다 문제다. 과연 떡값이 얼마나 비싸기에 몇 백만 원에서 몇 천만 원 단위까지 지불되어야 하는가. 금액으로 볼 때 이는 분명 뇌물의 성격이다. 둘째는 업무의 연관성이다. 이미 공개된 녹취록에서 드러나듯이 뇌물을 제공한 삼성은 분명히 삼성과 관련된 사건이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예방적 차원에서 검사들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제는 투명하고 정직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 사회의 법조인들부터 양심 고백을 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기를 국민 앞에 맹세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국민들로부터의 신뢰를 받을 수가 없다. 이제 그 부끄러운 떡값 문제를 떨치고, 검찰이 신뢰받는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하여 국민 앞에 스스로 옷을 벗는 용기가 필요할 때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58 | 추천: 0
엊그제 짧은 구간을 급하게 이동할 일이 있어 개인택시를 이용하게 되었다. 택시의 라디오에서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는데 마침 8.15 북측 방문단의 동정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현충원 참배에 이어 국회의 초청을 받아들여 국회를 공식 방문하게 되었다는 보도였다. 보도를 접한 택시 기사 분은 이내 “저거 나중에 남측 방문단이 북한 방문할 때 김일성이 묘에 참배하게 하려고  저러는 거지.”라고 내뱉는다. 북측 방문단의 심려 끝의 결단을 다 ‘꿍꿍이’가 있어 하는 행동이라고 쉽게 단정하는 것을 보니 북측의 모든 언행들에 대하여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는 듯했다. 조중동을 보지 못해 단정은 못하겠지만 인터넷 매체에 소개된 짧은 기사를 보건대 그들은 잉크를 튀기며 반대 논조의 기사로 도배를 했음이 틀림없다. 아마도 그들의 ‘교시’는 나름의 네트웤을 통해 금세 퍼져나갔을테고... 설사 ‘꿍꿍이’가 있으면 또 어떤가?     기껏 김일성 묘소에 대한 참배 유도가 그들의 속셈이라면 아 그까짓거 뭐가 대수라고 주저하며 마다하겠는가? 그 정도 행위가 영혼을 파는 행위인가? 김일성 묘소에 대하여 참배함으로써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게 되고 통일이 한 십년은 앞당겨진다면 당연히 취해야 할 것 아닌가? 북측도 그런 기대로 현충원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한반도에 긴장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외세(대표적으로 일본과 미국)의 입장을 앵무새 되뇌듯하는 그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지 묻고 싶다.     8.15가 가져다 준 분단이라는 불완전한 해방과 광복이 정녕 계속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칭 보수라고 일컫는 그들도 언젠가는 통일이라는 지상명제를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라는 것을 안다면 과정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도무지 과정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적어도 한 나라에서 집권을 하겠다고 하거나 주류언론의 반열에 오르고 싶다면 국가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시의적절하게 발전 단계별 의제들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고작 그들은 외세의 이익을 대변하는  ‘용병’ 내지는 ‘기관지’의 역할 밖에 못하고 있는 것 같아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정녕 한반도에서 전쟁을 획책하고자 하는 미국이나 일본의 ‘꼬붕’인가? 오랜 기간의 단절을 메울 수 있는 길은 교류의 확대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여러 관문이 있을 텐데 이번 북측 방문단은 일종의 터부를 깨는 듯한 과감한 결단을 내린 셈이다. 어차피 거쳐야 할 관문이라면 빠를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북측이 보여준 이번의 소위 ‘파격적’ 행동들은 너무도 반갑다. 오랜 기간 굳어진 생각과 틀들이 과감히 깨지며 ‘부드러운’ 통일에 대한 염원이 널리 퍼지고, 한반도에서 주변 열강이 감히 삿된 마음으로 넘보기 어려운 평화의 기운이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40 | 추천: 0
며칠 전 한 인디 밴드가 공중파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해 성기를 노출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 해당 프로그램은 당분간 방송중단 되었고 제작진들이 징계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 뿐 아니라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인디 밴드들에까지 불똥이 튀어 ‘퇴폐적인 공연을 하는 밴드를 단속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라’는 서울 시장의 지시까지 내려졌다고 한다. 공중파의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성기를 노출한 행동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나마 이번 사건의 주인공들은 그 행위 속에 별다른 명분이나 특별한 주장을 담을 생각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방송인 줄 몰랐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은 것을 보면 그 ‘생각 없음’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는 한 인디 밴드가 철없이 벌인 멍청한 해프닝’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그 바보스러운 행동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만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철없는 젊은이들이 벌인 해프닝에 대해 이 사회가 보여주는 반응은 가히 마녀사냥을 방불케 한다. 블랙리스트라니, 한동안 듣지 못했던 그 단어가 이런 맥락에서 튀어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 우리가 도대체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아연해 지는 순간이다. 극단의 정치적 보수주의가 근엄한 문화적 도덕주의와 그리 멀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문제가 된 MBC TV의 ‘음악캠프’는 오랜 역사를 가진 대중가요 순위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포함해 다른 방송사들도 방송하고 있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은 대중가요 시장을 신세대 취향의 주류 대중가요 중심으로 왜곡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MBC의 ‘음악캠프’는 그런 비판을 나름대로 수용해 공중파를 통해 접하기 어려운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을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음악평론가들이 번갈아 가며 한 팀씩 추천해 출연시키는 이 코너를 통해 그동안 TV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마이앤트메리, 허클베리핀, 싸지타 등의 인디 밴드, 천지인 같은 민중음악 그룹, 그리고 이승렬, 변재원 같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공중파를 통해 시청자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코너 하나로 금방 대중음악 문화의 다양성이 회복되고 인디 음악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동안 비주류 문화에 인색했던 공중파 방송이 이런 코너를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을 터이다. 요컨대 한 인디 밴드가 벌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 때문에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갖지 못한 도덕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비주류 문화 전반이 퇴폐의 온상쯤으로 매도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슨 블랙리스트니 방송에 대한 규제 강화니 인디 밴드 공연에 대한 단속이니 하는 것은 이 사건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또 다른 반문화적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인디 음악을 포함한 비주류 문화는 상업주의가 지배하는 대중문화 풍토에서 그나마 문화적 창의성과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자 보루이다. 도덕주의로 포장된 마녀사냥으로 비주류 문화를 매도하는 행태는 그들이 주장하는 ‘건전한 문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다시 한번 예술적 창의성을 옥죄면서 대중문화의 불모성만을 조장할 뿐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16 | 추천: 0
대학에서 인권관련 교양과목을 강의하는 나는 강의 첫 시간에는 늘 학생들에게 우리가 인권에 대해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이번 한 학기가 지난 후에 아마도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잘못된 이해 내지 오해들이란, 예를 들면, “인권타령은 70년대, 80년대 민주화 투쟁 때나 필요했던 것이지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인권타령이냐?,” “국가보안법은 운동권 학생들에게나 문제 되는 것이지 나 같이 법 잘 지키고 죄 안 짓고 사는 선량한 시민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 먼저 갖추어진 후에야 비로소 인권을 언급해야 하는 것 아니냐?” “교회가 인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입을 하는 것은 교회의 본분을 넘어서는 것 아닌가?” 그리고, “과거 시절에 무장공비가 출현했을 당시 그를 체포하여 공개처형을 방불케 처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니었나?” “딴 나라의 인권문제는 그 나라의 문제일 뿐이며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 그리고, “인권은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 권리만 너무 강조하는 건 아닌가?” 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독재정권에 의해 침해되던 인권을 지금 우리는 누리고 있지만 인권문제는 축소된 것이 아니라 더욱 확장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에 의해 우리 국민 모두는 자기검열 및 사상검열에 알게 모르게 이미 익숙해졌다는 사실,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은 인권이라는 목적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가치에 불과하다는 사실, 성서에 담겨있는 ‘하느님 나라’, 이웃에 대한 사랑 및 정의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이 인권이라는 사실, 즉, 성서는 하나의 인권교재이기도 하다는 사실, 무장공비에게도 인권이 있기에 적어도 그는 죄수복으로라도 옷을 갈아입고 재판을 기다리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까지는 아니라도 사형을 앞두고 스스로를 뒤돌아볼 기회라도 가졌어야 한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극형을 언도받아야 했던 것은 그 어린 청년이 아니라 그에게 주입되었던 이데올로기와 분단이라는 민족의 원죄였다는 사실, 과거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학살을 경험했던 우리는 더 가까운 과거에 동티모르에서 벌어졌던 학살을 외면하지 말아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끝으로, 다른 이들의 인권과 공동체 전체를 존중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나는 인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 등을 그 학생들이 깨닫게 될 때까지는 사실 별로 오래 걸리지 않는다.     청소년 대상의 소그룹 강의에서도, 또 종교단체인 가톨릭 수도단체에서의 특강에서도 이러한 오해들이 발견된다. 청소년 대상으로 ‘세계인권선언’을 중심으로 인권을 강의한 후 어떤 학생이 물은 질문인즉슨, “이렇게 인권의식을 우리 청소년들에게 심어주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게끔 만드는 건 아닌가? 책임질 수 있는가?”이었고, 어느 수도회 수사의 질문은 “성서에서 하느님은 사랑하라고 강조하셨는데, 인권은  싸우라는 것 아닌가? 인권을 주장함보다는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이 분부하신 것 아닌 가?” 더 하여, 인권단체 주최의 시민 인권교육 강좌를 하면서 성인 시민들의 수강소감을 들어보면, “인권이라 하면 어려운 것이고 나랑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이 일상생활 영역에서 인권침해의 피해자 및 가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얘기들을 한다. 청소년들부터 인권이 입에, 몸에, 그리고 가슴에 베어야  그들이 살아갈, 그리고 그들이 책임질 장래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 굶는 이들에게 매번 가져다주는 자선도 중요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굶지 않을 권리, 일할 권리,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주장하도록 일깨워주고 힘을 실어주는 일도 분명 커다란 사랑이라는 사실, 악한 이들에게 그들의 악함을 그들 스스로가 깨닫도록 해주는 일도 그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등도 깨닫기가 어렵지는 않다. 인권강의는 그런 분명한 깨달음을 주는 일이며, 깨달음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어쩌면, 인권강의를 하는 나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 즉,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 모두는 인권교육을 제대로 받아볼 기회가 없었기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교육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사실 인권교육에 별 관심도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도 맞는 말이면서도 혹시 오해는 아닐까?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가 내게 던진 말인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면 안 되지요”라는 말 속에, 그리고, 바쁘고 피곤하기 마련인 평일 저녁에 인권강좌를 들으려 모이는 시민들을 보며 나는 내 오해에 대해 돌이켜보며 동시에 인권교육은, 인권운동은, 그리고 인권의 실현은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라고 다시금 깨닫게 된다. 끝으로, 정치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정치학자들이라면 인권에 대해 당연히 고민해보았고 공부도 많이 했을 거라는 생각, 그리고, “인권” 운운 하는 모든 정치인들은 당연히 인권에 대해 나름대로 올바른 일가견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도 또 하나의 오해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정치 공동체의 올바른 형태, 그 안에서의 올바른 분배와 올바른 행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면,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는 일이 정치”임을 잊지 않는 정치인들이라면, 그리고, 적어도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헛된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다면, 분명 그들은 궁극적으로는 인권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또 하나의 오해는 아닐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근 60년, 독재정권이 무너진 87년 6월항쟁 이후에만도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우리에게 인권에 대해 배울 권리가 있음을, 그리고 바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인권 가운데 하나임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인권에 대한 오해에 의해 뒷받침 되던 인권 침해의 권력구조와 의식구조를 이제라도 깨달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양학부에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87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