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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진실한 사랑과 나눔이 그리운 계절 (김대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3 09:27
조회
385
어느덧 2007년도 빠르게 흘러 12월을 맞게 되었습니다. 연말이면 ‘나눔’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여러분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를 풍성하게 살리는 ‘나눔의 신비’를 알고 계십니까? 물론 소극적인 나눔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모두를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천박한 자본주의 현실을 완화시키지는 못하는 줄 압니다. 오히려 칭찬과 드러내기 일색이어서 돕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 모두를 더 천박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몇 해 전 결식아동 돕기가 붐처럼 일어 방송과 신문에서 눈물샘을 자극할만한 사연들을 골라 유독 경쟁적으로 보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방송사의 성화에 못 이겨 아이들의 신상을 밝히지 않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한다는 조건을 걸고 어린이 공부방 몇 곳을 소개해 주었다가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했습니다. TV에 결식아동으로 소개된 몇몇 아이들이 친구들로부터 ‘거지’로 놀림 받고 따돌림을 당한 것입니다. 책임이야 약속을 지키지 않은 방송사에 있었지만 누구 탓을 한다고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공부방엔 아이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한 아이는 그 일로 학교까지 옮겨야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무료급식현장 노숙인 들에게 보내고 싶다며 모 회사에서 양말과 내복을 들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넙죽 받았지만 그 뒤 그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적지 않은 실망을 했습니다. 회사 홍보를 위해 띠를 두르고 직원들이 그 선물을 직접 나누어 준 후 기념촬영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물건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건 이후, 어떤 경우에도 수요자를 드러내 공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던 것입니다. 수요자의 구체적인 신상과 사연을 통해 호소하는 것이 구호단체들의 보편적인 모금기법인데다 구체적인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는 각종 취재를 매번 거절하는 일도 쉽지 않아 꽤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사실 모금이라는 것 자체가 그 목적과 내용이 구체적으로 충분히 설명되어야 설득력을 갖는 법이기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기부, 봉사, 자선행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살 빼기를 위해 몇 백 만 원짜리 다이어트 약을 스스럼없이 구입하면서 구걸하는 사람에겐 두툼한 지갑을 뒤져 끝내 동전이나 천 원짜리 한 장 달랑 건네고 맙니다. 앵벌이 하는 아이들에게 동전 몇 닢 던져주며 그 아이들 수입이 적지 않을 것이고 배후가 있을 것이라며 열변을 토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름 석 자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향력 있는 신문과 방송을 고르고 골라 기부하는 기업인들이 허다합니다. 이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인지, 그 일을 통해 과연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줄 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설령 무료급식소가 난립하여 노숙인 들이 하루 다섯 끼를 먹고, 앵벌이 아이들이 하루 수 십 만원을 번다고 한들 과연 그들의 삶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구걸의 이유나 그 배후나 그들의 행복 여부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먹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사먹을 만 한 돈을 조용히 건넬 넉넉함이 아쉽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잃어버려도 몰랐을 동전 몇 닢에 우리의 양심을 너무 값싸게 팔아버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071205web03.jpg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처럼 기부와 봉사 활동을 수없이 목격하면서도 사심(私心) 없는 사람을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보석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특별히 대우해 드리지 않아도, 요란스런 대가가 없어도 묵묵히 보이지 않게 남을 돕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해 초겨울 일입니다. 추운 겨울 거리에서 무료급식을 받아 드시는 노숙인 들을 본 뒤 두 달이 지난 신문기사를 기억해 내고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엄청난 금액의 급식버스를 기증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날 불쑥 찾아와 비밀로 해달라며 적지 않은 후원금을 주고 가신 분들이 있는가 하면, 20년 째 빠짐없이 정해진 날짜에 후원금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사심은 사람을 눈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합니다. 어찌 나눔과 기부의 현장에서만 겪는 일이겠습니까. 대선을 앞둔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바로 그 사심 때문에 대의도, 진리도 잃고 결국 소인배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우리 개개인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지요. 가끔이라도 부끄러운 우리의 양심, 불균형한 우리의 가치관, 실종된 사랑을 돌아볼 일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행여 들킬 새라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배려하고 베풀었던 사춘기 시절 짝사랑의 아련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요란하게 떠벌이고 조건을 앞세우는 사랑이 범람하는 현실 속에서 아주 가끔씩이라도 상처받은 이들을 조용히 배려하고 그 은밀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