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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하늘, 그러나 욕망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9 01:24
조회
21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정치인과 종교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받든다 하고, 종교인이 하늘의 뜻에 따른다고 하는 ‘형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자신보다는 국민과 하늘을 앞세우는 듯 한 모습에서 이들은 참 닮았다.

그러면 그 받들고 따르는 ‘내용’은 어떨까? 국민과 하늘이란 서로 다른 개념일 듯싶지만, 실상 그렇지만은 않다. 전 국민이 정치 평론가인 마당에 나라고 정치 현실 판단에 한 몫 끼지 못할 이유도 없겠거니와, 나름 종교 전문가이기도 한 내 눈으로 보건대, 국민과 하늘의 그 실질적 내용이 정말 다른지는 크게 의심스럽다. 국민의 뜻과 하늘의 뜻 운운하는 언어는 외견상 다르지만, 정말로 받들고 따르는 것은 사실상 자기의 ‘욕망’일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받든다’는 미명하에 사실상 그 이름을 ‘팔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가 많다면 그것은 억측일까. 행여 ‘욕망’이라는 원초적인 표현이 거슬린다면, 그저 자신의 뜻이라고 해도 좋다. 국민/하늘의 뜻이라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사실상 자신의 뜻일 때가 태반이다. 흔히 자신의 뜻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뜻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 아닌 것을 가져오는데, 그것이 자신을 자신되게 해준 존재론적인 근거, 정치와 종교의 용어로 하면, 국민과 하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은 아닐 것이고, 모든 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도 아닐 터이다. 그러나 비록 의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뜻과 하늘의 뜻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받들어져야 할 국민이 이렇게 바닥까지 무시될 수가 있겠고, 다 같이 하늘의 뜻을 따른다면서 종교인들의 아집과 종교간 갈등이 어찌 이리 끝없을 수 있겠는가.

 

090107web05.jpg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 개정 강행처리 시도에 반발해 파업을 계속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6일 저녁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언론장악저지
민주주의 수호' 촛불문화제에서 언론관계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 자기의 뜻과 국민/하늘의 뜻은 구별될 수 있을까. 있다.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것인지, 하늘의 이름을 ‘파는’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준과 증거가 있다. 정말 국민의 뜻을 받들려면, 정말 하늘의 뜻을 받들려면, 그렇게 받드는 주체의 뜻은 스스로 발아래 내려놓고, 욕망은 깨끗이 비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놓고 비워진다면, 실제로 손해가 올 가능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설령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기꺼이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국민/하늘의 뜻을 받든다면서, 그 실제 목적과 결과가 자기 이익의 확대 쪽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분명 욕망의 증거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던 권력이 주어질 수도 있고, 뜻밖에 재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의외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받든다면서 결국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고, 하늘의 뜻에 따른다면서도 무언가 금력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국민/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듯 분명한 사실이자 원리이다.

물론 정치인이 국민의 뜻을 실제로 받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때의 국민은 극히 일부이거나, 자신의 뜻/욕망을 정당화하도록 자의적으로 해석된 국민이다. 당연히 국민 전체가 아니다. 종교인이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있지만, 그 때의 하늘 역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해주도록 투사된 하늘일 때가 많다. 하늘 자체가 아닌, 자신의 뜻에 맞게 해석된 하늘인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맞음직한 일부 국민의 뜻을 전체 국민의 뜻이 되도록 조작하기 위해 정치인이 손대고 싶어 하는 분야가 언론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본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욕망을 하늘의 뜻이라며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인은 자신의 욕망에 어울리는 경전의 구절을 본래 맥락과 관계없이 뽑아 내세운다. 경전에 그렇게 써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자신 안에 가두고, 결국은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런 식으로 국민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하고, 하늘의 이름으로 전쟁까지 벌인다. 이러한 엄청난 착각도 오래 습관이 되다보니, 양심의 가책도 받지 못한다. 가책을 받을 양심조차 실종되었달까, 아니면 두터운 무지로 인해 전혀 볼 수 없게 된 것이랄까. 물론 모든 정치인과 종교인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람과 하늘을 받드는 이들도 도처에 많겠기 때문이다.

세계적 추세 운운하며 이른바 코드가 맞는 거대 미디어 재벌을 탄생시켜서 결국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 및 확대하려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들의 추태, 하늘의 이름으로 이웃을 정죄하고 저주하면서 스스로 하늘에 자리에 오르려는 종교인들의 교만을 곳곳에서 보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았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