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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증오하는 사람의 인권 (김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9 01:45
조회
308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강○○의 연쇄 살인 사건을 계기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논쟁이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즉 연쇄살인범 등 흉악범죄자의 얼굴 공개, 흉악범에 대한 사형 집행, CCTV 전국적인 확대 설치 주장 등이 마치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용산 철거민 참사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강○○의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고 경찰에 지시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 된 점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논쟁 유발이 준비된 시나리오라는 생각도 지워 버릴 수 없는 심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위와 같은 논쟁 중에서 흉악범죄자의 얼굴 공개 문제에 국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얼굴 공개

헌법 제27조 제4항에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흉악범의 얼굴 공개는 위법 또는 부당하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1789년 프랑스 혁명 후 그 이전의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의 유죄 입증이 불분명한 경우에도 혐의만을 가지고 처벌을 함으로써 억울한 피고인을 양산하였고, 이에 따른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부터 형사절차에 실천원리로 구현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얼굴 공개가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유죄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피고인의 얼굴을 공개한다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여 피고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아울러 피고인에 대한 여론재판의 위험성까지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흉악범 얼굴 공개의 문제는 무죄추정의 원칙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의 원칙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원에서 범인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 범인의 얼굴을 공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이 확정된 경우에도 범죄자와 범죄자 가족 등의 인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행하는 재판에서 오판 가능성은 항상 염두 해 두어야 한다. 만일 오판이 발생하는 경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피해와 인권침해를 야기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굴 공개 문제 역시 더욱 신중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여전히 중요성과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미국에서 1973년 이래 99명이 유죄확정 후 무죄로 밝혀져 석방되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아무리 흉악범죄자라고 할지라도 그 얼굴 공개 등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국가가 얼마나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흉악범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천하에 얼굴을 공개하는 것과 같은 감정적 대응 방식은 예기치 못한 후유증과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길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자각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사안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국민적 합의도 없이 일단 터트리고 보자는 식의 보도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인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얼굴공개의 실효성이 거의 없다.

그러면 흉악범 얼굴 공개를 주장하는 측의 논거는 무엇인가. 대표적으로 범죄 예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얼굴을 공개당한 흉악범의 경우 이미 체포 또는 구속 상태가 십중팔구이기 때문에 얼굴을 공개한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형벌의 일반 예방적 효과가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여부는 아직도 입증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아울러 연쇄살인범과 같은 흉악범들은 대다수가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인격 장애자들이 대다수인 현실에 비추어보면,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얼굴이 알려진다는 두려움 때문에 범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냉정하게 살펴보면 흉악범의 얼굴 공개에서 범죄예방효과도 기대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NISI20090201_0000665858_web.jpg얼굴 가린 연쇄 살인범
사진 출처 - 뉴시스




   흉악범의 경우에 한정해서 얼굴을 공개한다고 하는데 흉악범의 기준을 어디에 놓을 것인지도 여전히 논란꺼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1명을 살해하는 행위는 흉악범이 아니고 강○○처럼 7-8명을 살인해야 흉악범이 될 수 있는가. 성폭력을 1회 자행한 자는 흉악범이 아니고 몇 번 정도 더 범행을 저질러야 흉악범인가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정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률이라는 것은 명확성이 그 생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명확성 때문에 흉악범의 개념을 언론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곤란하다. 따라서 수사기관에서 법률을 제정한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위와 같은 불확정적인 개념으로 인하여 법률제정도 대단히 곤란하다.

이러한 논란은 흉악범으로 지목하여 수사기관에서 범인의 얼굴과 범죄혐의를 공개적으로 전국에 지명수배 하는 수사의 수단과는 차이가 존재한다. 공범이 이미 확정판결을 받았으나 여타 공범이 붙잡히지 않은 것과 같이 범인이 확실시되고 증거도 명백하게 존재하는 경우 등에는 얼굴 공개를 포함한 지명수배를 통해서 범인에게 심리적 또는 행동적인 위축을 주어서 범죄를 예방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공개된 사진 등을 통해서 일반인과 수사기관이 범인을 좀 더 용이하게 검거하는데 기여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라면 범죄예방 효과, 범인 검거의 필요성과 같은 공익적 필요성이 지극히 높아서 피고인의 초상권 등과 같은 피고인의 인권 보호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얼굴 공개가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흉악범 얼굴 공개의 문제는 얼굴 공개의 필요성 및 공익적 요구와 범죄자의 인권과 그 지인들에 대한 인권 보호 필요성, 공개한다고 할지라도 인권 침해를 어떻게 최소화 할 것인가에 대한 법익의 충돌에 대한 조화점을 찾는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는 위와 같은 경우와는 다른 상황이다. 강○○의 얼굴을 공개한다고 해도 아무런 공익적 필요성을 충족시켜주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 공개는 현대판 연좌제 도입과 다름이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세계의 역사 속에 존재해왔고, 지금의 문명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진 공개처형제도를 살펴보자. 대중이 모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사형을 집행하거나 사형집행 장면을 공개하면 동일·유사한 범행을 일반인들이 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하여 공개처형이 실시되어 왔었다.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의 사형집행 장면이 공개되면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문제가 심각하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기도 하였던 사실을 상기해보자. 북한의 사행집행 공개는 잔인한 형벌, 비인도적인 형벌 집행, 잔혹한 인권침해, 인권의 보편성, 비문명국가로서의 수치 등의 방정식으로 활용되지 않았는가.

그러면 아직 유죄판결도 확정되지 않은 범인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위와 같은 공개처형과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다른 것일까. 형벌이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죄인을 만천하에 공시하고, 신체에 낙인을 찍고, 공개적으로 효수형을 집행하였던 야만적인 과거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형벌은 인간이 이성을 회복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는 인권유린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다시 상기해 보아야 한다. 먼 과거에 범죄자 얼굴에 천형처럼 낙인 도장을 찍어 “나는 범죄자다.”라고 공시하였던 것과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언론매체를 통해서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서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실질적으로 대동소이한 ‘주홍 글씨’ 아닌가.

강○○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어떠한 이득을 얻게 되고, 어떤 손실을 입게 되는가. 화려한(?) 처벌을 통해서 얻을 것은 야만적인 형벌 수단을 구사하는 비문명국가라는 조롱일 뿐이고, 준엄한(?) 공개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강○○와 관련을 맺고 있는 부모형제, 자식, 친구 등의 충격과 아픔일 뿐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인가. 강○○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개된 흉악범의 얼굴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고, 고통스러워야 하고, 이들이 얼굴을 들고 돌아다닐 수 없도록 수치심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얼굴 공개의 목적인가.

강○○는 자신의 얼굴이 공개된 사실을 알고 “내 아들은 어떻게 살라고”라는 말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 실제로 범죄자의 아들 미니홈피가 온갖 비난으로 넘쳐나서 홈피를 폐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한다. 그럼에도 각종 언론에서는 타인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자식새끼만 걱정한다는 식으로 범죄자의 악성을 부각시키면서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이러한 질타가 과연 옳은 태도이며 이성적인 언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가. 거꾸로 역지사지 해보자.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강○○의 잔혹한 범행을 옹호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강○○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강○○가 미워도 강○○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불가피한 사람들의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

아무리 죄인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식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고통을 부과해야 할 이유는 없다. 범인의 자식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본권을 향유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고통을 가할 권리를 사회와 국가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러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판 ‘연좌제’ 혹은 현대판 ‘마녀사냥’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 모든 문제는 강○○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다. 따라서 아무리 흉악범이 미워도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고유한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공개해서는 안 된다. 범죄자의 얼굴 공개로 범죄자의 인권이 침해되는 결과는 곧바로 범죄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의 인권침해로 귀결되기 때문에 얼굴을 공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범죄자의 인권과 범죄자 가족 등 지인의 인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한 국가와 사회가 강○○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관용의 한계점이며, 지켜져야 할 관용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동시에 강○○와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국가가 범죄자를 정당한 법절차에 따라 처벌하는 것 이상으로 범죄자의 지인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무모한 시도는 포기하는 것이 이성적인 태도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의 인권도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얼굴 공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피해자의 인권에는 무관심하고, 가해자의 인권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다. 형사법에서 피해자의 인권과 범죄자의 인권은 두 마리 토끼와 같은 존재다. 수사기관이 상대적으로 피해자 입장에 경도되어 있는 사실은 수긍할 만한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수사기관에게는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을 앞장서서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사안의 진상을 밝혀서 범죄자를 처벌해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자 인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범죄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인권을 짓밟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두 마리 토끼라는 숙명적인 함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랜 형벌권 남용에 대한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언론매체를 포함한 사회도 역시 마찬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 어느 하나에 경도되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인권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결과하였다”는 세계인권선언문을 다시 상기해보자.

범인의 얼굴공개를 주장하는 의견이 과도한 사회라면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랑할 자격을 잃는 것이고, 인권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범죄는 미워해도 범죄자는 미워하지 말라”는 법언이 있다. 이런 태도가 성숙한 시민사회의 태도이며,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지점임은 분명하다.

미국의 저명한 대법관 홈즈는 “사상의 자유는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인권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도 지켜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의심치 아니한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이 글은 수사연구사에서 발행하는 수사전문 잡지「수사연구」월간지에 기고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