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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타락을 정치로 착각하는 이들에게(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2-07 10:22
조회
419

오항녕 / 인권연대운영위원


 

1.


자료로 보나 행태로 보나 검찰은 욕을 먹어도 싸다, 확실히 뜯어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선지 ‘검찰이 수사는 안 하고 정치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허나 이 말은 부정확하다. 정치는 사회나 국가를 위한 권한, 이익, 가치의 조정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조직이나 사회든 정치가 있기 마련이다. 검찰도 정치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검찰이 정치를 못하는 그 무능함에 있다. 수사든 정치든, 이미 수준이 타락 단계라는 게 문제이다.



이재명 대표는 ‘검찰이 수사는 안 하고 정치를 한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사진)


 

1.


장면① 독일 튀빙엔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린다. 무슨 일이지? 사고 났나? 고개를 빼고 살피는 건 나 하나뿐이다. 다들 데면데면하다. 기사는 출입구로 와서 깔판을 내린다. 곧 휠체어를 탄 승객이 깔판을 통해 버스에 오른다. 튀빙엔의 모든 버스는 저상 버스인 데다 차체가 승강장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어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타고 내리는 데 어려움이 적다. 그들은 출입문 아래 부착된 깔판을 이용할 수 있고 보통 버스 안의 다른 승객이 이를 돕는다. 20년 전쯤 도쿄 지하철을 이용할 때 보았던 시스템과도 비슷했다. 아무튼 부러웠다.



튀빙엔 버스는 저 깔판을 펴면 휄체어 승객이 쉽게 승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눈 온 뒤 찍은 사진이라 좀 더럽다.


 

장면② 뮌헨의 고미술관(Alte Pinakothek), 한 아이가 뒤뚱거리며 걸어온다. 기저귀를 떼지 않은 듯 보인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는다. 아예 바닥에 뒹군다. 아이 뒤에는 유모차를 미는 엄마가 따른다. 그림을 보다 말고 아이 모습에 눈길을 빼앗겼다. 이래서 미술관에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그리 쉽게 눈에 띄었구나.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모차, 휠체어를 제공하는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흐뭇했다.



유아를 데리고 관람하는 엄마


 

1.


재작년쯤인가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미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한 경제와 군사력, 거기에 촛불만으로 부패-불법 정권을 몰아낸 시민의 힘은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수천 년 침략을 당했던’으로 시작하는 약소국 콤플렉스를 사실로 보든 정서로 헤아리든 별로 동의하지 않던 나로서는 반가운 현상이었다. 자신의 사회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건 건강한 징조라는 게 내 진단이었다. 동시에 아직은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선진국-후진국이라는 말이 서구중심의 자본주의적 프레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현상이 결코 인간사회가 이루어야 할 ‘살만한 곳’이란 뜻의 선진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1.


인권연대의 장발장 은행이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 멀었다는 증거의 하나이다. 벌금이 없어 징역을 살아야 하는 ‘현대판 장발장’들에게 대출을 시작한지 8년, 대출심사도 100차를 넘었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권을 거치면서도 엄청난 예산을 가진 정부가 하지 못하고, 아직도 시민단체인 인권연대가 운영하고 있다. 내가 이 나라 정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장발장 은행은 또 다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작년 대법관 후보로 오석준이 올랐다. 오석준은 ‘800원을 횡령한’ 운수노동자에게 해고 판결을 내렸던 자이다. 당시 버스기사는 17년간 그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오석준은 지금 대법관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는 말이다. 내가 이 나라 국회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800원 횡령을 이유로 버스기사에게 해고 판결을 내렸던 오석준의 청문회 선서 장면. 요즘 유행한다는 송혜교 씨 필로 한 마디 해주련다. ‘훌륭하다, 석준아!’ (연합뉴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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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를 이유로 삼각지역을 무정차 통과한다는 문자를 발송했다고 한다. 전장연이 ‘대중교통이나 도로 등의 공공시설을 타격하거나 무단으로 점거하는 불법을 일삼는다는 이유였다. 전장연을 시민의 불편을 야기하는 집단으로 돌리는 서울시의 야비함이 행정과 법집행 속에 숨어있었다.


불법으로 무단점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온통 계단 천지인 서울의 대중교통망, 휠체어나 유모차 하나 넣을 공간이 없거나 부족한 버스와 기차, 전철을 개선해달라는 요청이 그렇게 용서받지 못할 일일까? 서울시장 오세훈의 말처럼 이런 요청이 무관용의 대상인가? 이곳이 ‘우리의 서울’인 것이 과연 자랑스러운가?


나는 교통, 나아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이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약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안녕과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 중이다. 더구나 이 시대에 누구나 언제든 약자의 지위에 놓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대다수 우리는 이미 약자이고 소수자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에 대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잔인한 대처 이후 시민들의 전장연 후원금이 늘었다고 한다. (한겨레신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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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①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구약성경 시편 146:9)


말씀② 늙었는데 처가 없거나 남편이 없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 어려서 부모가 없는 어린이 등 환과독고(鰥寡獨孤) 네 부류는 세상에서 곤궁하여 하소연할 데도 없는 사람이므로, 문왕이 복지 정책을 펼 때는 반드시 이 네 부류를 우선 대상으로 삼았다.(맹자 양혜왕 하편)


 

1.


《성경》과 《맹자》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저 아래로 내려가는 걸 경계했다. 타락이 아니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하한선이다. 현대판 장발장을 외면하고, 800원에 횡령죄로 해고하고, 장애인의 호소를 형사처벌로 대응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치 또는 정책, 행정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차마 못할 짓’이라고 불렀다. 이는 권력은 있으되 정치를 못하는 것, 즉 정치적 무능을 자백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한다는 건 개인이든, 정당이든, 또 어떤 주체든 이미 타락했다는 뜻이다. 주의할지어다, 편들다간 같이 타락하리니. 그리하여 기억할지어다, 지옥에는 타락한 자들의 방 만이 아니라 방관한 자들의 자리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나니.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