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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의 배후(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11-03 11:00
조회
891

이재성 / 인권연대 운영위원


 10.29 이태원 압사 참사는 (일방통행 안내 같은) 간단한 조처만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참사보다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이 압도적으로 명백한 인재다. 나는 세월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관리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최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일부러 방치했다.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뻔한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질서를 책임지는 주최 쪽이 없다면 안전사고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주최자가 없다는 건 방치의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 개입의 사유로 삼아야 했다. 개입의 법적 근거가 없다는 변명 역시 해괴하기는 마찬가지다. 법적 근거가 있어야만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정부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법적 근거가 없으면 이번처럼 국민이 죽어가도록 내팽개쳐도 좋다는 말인가.



정치에 악용하지 말라는 정치적 주장


도처에서 세월호 데자뷔가 감지된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다가 비난 여론이 일자 축소와 왜곡에 나서는 것도 동일한 패턴이다. 이태원 참사를 축소왜곡하려는 준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단순 해상 교통사고라며 축소하는데 급급했던 바로 그들이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고 부르라며 추모 글씨 없는 근조 리본을 강요하고 있다.


경찰력으로 막을 수 없었던 사고라는 이상민의 발언은 세월호 당시 청와대는 콘트롤타워가 아니라던 반응을 떠올리게 한다. 11월 1일 경찰청장의 국회 답변을 보면, 아마도 경찰은 112 신고를 무시한 하급 직원들을 제물로 바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또한 참사 현장의 ‘토끼머리띠 청년’을 세월호 사건의 유병언처럼 국면전환 카드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면피와 떠넘기기에만 열중하는 자들이 희생자 유족의 세금과 통신요금 감면, 외국인 주검 이송비용 지원 등 정부 돈을 쓰는 데는 열심이다. 정부는 책임이 없다면서 돈은 지원하겠다는 건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책임은 지기 싫지만 푼돈은 줄 수 있다는 것인가. 국민을 돈 몇 푼에 매수하려는 얄팍한 속임수요 국민 무시 발상이다.


사후 수습과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사고 원인과 책임자 규명은 필수적이다. 진정한 애도는 철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때 가능한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골든타임이 있듯이 원인 규명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세월호 때 그랬던 것처럼 정쟁을 그만두고 애도에 전념하자는 탈정치 주문이 쏟아진다. 이례적으로 서둘러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지금은 애도할 때이니 책임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정작 자신들은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려 온갖 술수와 국민 무시 발언을 일삼으면서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라니, 적반하장의 달인들답다. 이념투쟁 하지 말자는 자들이 가장 이념적이듯, 정쟁하지 말자는 자들이 가장 정치적이다. 이태원 참사를 가장 정치적으로 대하는 집단은 참사에 정치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들이다.


바뀐 것은 행정권력 뿐


다중안전사고는 손에 쥔 물처럼 빈틈을 찾아 흘러내린다.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는 하드웨어 참사를 지나, 유치원생과 중고생이 집중적으로 희생당한 씨랜드와 인천 호프집 화재를 겪었고, 무엇보다 악몽같은 세월호 대참사를 당하고 나서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인간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대형 참사는 없을 줄 알았다. 참사의 아픔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져서 더는 빈틈이 없을 줄 알았다. 아니, 사람 사는 세상에 빈틈은 없을 수 없겠지만 행정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 믿음이 사실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수정권과 대형참사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꽤 있다. 특히 이태원 핼러윈 축제의 경우 해마다 열렸던 것이고, 수십만이 다녀간 것도 올해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관계당국의 대응에서 문제점을 찾는 건 논리적인 귀결로 보인다. 코로나 거리두기 해제라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코로나 이전에도 많은 인파가 모였던 점을 고려해 볼 때, 대통령부터 구청장까지 모든 기관장이 국민의힘 계열로 바뀐 데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바뀐 것은 행정권력 뿐이라는 문제의식이다. 나는 이것이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검사정부의 약탈적 관점


참사 당일 경찰은 이태원에 137명을 배치했지만 정복경찰은 58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마약 등을 단속하는 사복경찰이었다고 한다. 경찰봉을 들고 질서유지를 하는 교통이나 경비 경찰은 아예 없었다. 10만명 이상 모일 것이라는 걸 경찰도 알았지만 범죄단속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안전은 뒷전이었다. 이 사실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폭로한다. 국민을 단속의 대상으로 보는 약탈적 관점이 참사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아무리 잘해도 인사고과에 반영되지 않지만, 범죄를 단속하면 건수가 올라간다.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실적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경찰만이 아니라 이 정부의 타고난 유전자다. 정적 수사에 편파적으로 올인하고 있는 검찰을 보라. 대통령이 된 검찰 선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조직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단위마다 치열한 실적경쟁을 벌이고 있다.


행정의 본질은 서비스인데 이 정부는 처벌과 단속이라 생각한다. 위임받은 권력으로 봉사할 생각은 않고 군림하려고 한다. 자영업자들이 자기 장사하는데 우리가 왜 돕느냐는 용산구청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안전무시 발언


이태원 참사는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잉태된 것이다.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는 대통령 발언의 파장은 원전업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파리바게뜨 빵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무참하게 죽어나가도 이 정부는 특별연장근로시간을 늘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 가려졌지만, 봉화 아연광산 매몰 사고 현장 구조작업은 헛되이 골든타임을 허비하는 중이다. 대통령의 안전무시 철학은 공무원 사회와 기업 전체에 바이러스처럼 퍼져, 이제 대한민국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장전 상태가 되었다.


이 정부는 참사를 참사로 덮고 있다. 국제 외교무대에서의 욕설 파문으로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켜 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오히려 화를 내더니 김진태가 쏘아올린 채권시장 경색으로 덮었다. 그 위를 이태원 참사가 덮었고, 이제 이태원 참사 위에 북한발 미사일이 쌓이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외눈박이 외교로 북한을 도발하고 일본과 밀착하여 전쟁 위험을 키우고 있다.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임계점을 향해 밀도를 높이고 있다. 공급망 붕괴와 에너지 위기에 이어 유례없이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인해 실물경제의 경착륙이 이미 진행 중인데, 이 정부 인사들의 위기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 중인 경제와 안보 참사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건 국민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진출처 - 넷플릭스 <서부전선 이상없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리더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 휴전협상 발효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해당 부대의 독일 장군은 비겁한 사민주의자들의 타협에 굴복할 수 없다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가서 싸우라고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다. 몇 시간만 지나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병사들은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온다. 20세기 초반의 독일 군대와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는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리더가 미쳤어도 바로 잡을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