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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뼈를 묻고 싶었던 태국 여성 (허윤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9 22:28
조회
362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태국의 ‘단또’라는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9남매 중 다섯째 딸인 폰피몰은(오빠 3명, 언니 4명, 남동생 1명) 어머니(74세)와 함께 농사일을 도우며 생활했습니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외지로 떠난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늙으신 어머니를 수발하며 성실히 사는 평범한 시골 아가씨였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중개업소를 통해 한국인 남편을 만났습니다. 잘사는 나라로 알려진 한국으로 시집갈 기회가 생긴 것이기에 가족들도 기뻐해 주었습니다. 결국 2004년 결혼이민자 여성으로서 한국에 왔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결혼 중개업소를 통해 시집온 많은 외국인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많이 있습니다. 언어, 문화, 생활방식, 시댁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온전치 못한 남편과의 생활 등 그 어려움은 다양합니다. 다행히도 폰피몰은 남편과의 사이가 좋았고, 시어머니도 잘 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폰피몰의 한국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온 한국에서도 가난한 생활이 지속되었습니다. 남편이 일하는 양말 공장에서 함께 일하며 매달 겨우 50만 원 정도의 생활비를 받아 반지하방에서 살았습니다. 양말 공장 사장님은 남편의 둘째 형입니다. 제대로 된 월급을 요구할 수 없는 것도 정신연령이 낮은 남편의 능력으로는 단순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보 같은 동생을 거두어 준 것 만으로도 고마운 형님이었습니다. 어려서 큰 병을 앓았던 남편은 초등학교 저학년의 정신연령밖에 되지 않아 의사소통과 부부관계 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매일 남편의 일을 돕느라 한국말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으니, 눈치껏 생활해야 하는 폰피몰의 한국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활고, 언어장벽, 남편의 장애 등의 어려움 속에서 결국 폰피몰 혼자서 한국생활을 적응해나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폰피몰은 의지가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올 때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내며 살겠다고 어머니에게 다짐도 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착한 남편이 그녀에게 유일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에게 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2007년 폰피몰이 위암판정을 받고 위의 75%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사실 2006년부터 배가 많이 아팠지만, 남편의 무지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었고, 시댁식구들도 음식이 맞지 않아 단순히 체한 것으로 여겨 적절한 치료를 제때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병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결국 저희 기관에 도움을 청해 왔을 때는 이미 완치가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당장의 위급함에 위절제술을 받았지만 뼈까지 전이된 암 때문에 결국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니 마음을 편하게 해주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폰피몰의 상태가 얼마나 위중한 것인지 남편이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댁식구들도 암이라는 진단에 집안에 우환거리가 들어왔다며 냉대할 뿐이었습니다.



090616web01.jpg병상에 누워있는 폰피물
사진 출처 - 필자



   결국 폰피몰은 2009년 2월 태국의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고향의 가족들을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어쩌면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향에 가서 상태가 더 악화되는 바람에 돌아 올 수 없었습니다. 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이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것입니다. 태국의 의사들 역시 이제 가망이 없고 편안히 죽음을 준비하도록 가족들이 배려하는 일만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폰피몰은 가슴 아래까지 마비가 된 상태로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폰피몰이 남편을 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지만 시댁식구들은 남편의 태국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인지능력이 떨어져 안전상의 이유로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실상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기관이 모든 재정지원을 하고, 저희 직원과 수녀님이 동행하겠다고 설득했습니다. 부부가 이제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만남의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설득을 계속하였습니다. 마침내 2009년 4월 24일에 태국선교사 1명과 다문화가정지원센터의 수녀 1명이 남편과 동행하여 4박 5일 동안 태국을 방문하여 폰피몰과 그의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남편은 이번에 가서 꼭 아내를 데려오겠다고 말합니다. 아내인 폰피몰이 얼마나 위독한지 잘 모르고 그저 다리가 아파 누워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빨리 다리가 나아서 한국으로 오라고 합니다. 폰피몰이 그러겠다고 말했지만, 이것이 이 부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서로가 많이 부족하고 가난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잘 해주었던 남편이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꼭 나아서 한국에서 남편하고 계속 살고 싶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죽고 싶다고 눈물짓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래도 어려움과 아픔보다는 착한 남편과의 좋은 추억만을 이야기해 주는 폰피몰이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090616web02.jpg남편의 위로를 받는 폰피물
사진 출처 - 필자



   그로부터 일주일 후 폰피몰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남편이 함께 하지 못했지만 먼 길을 찾아와준 고마운 남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안식을 누리길 기원했습니다. 병고만 아니었어도 폰피몰의 의지와 착한 남편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다문화가정이 되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10여만 명이 넘어가는 결혼이민자 여성이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며 한국인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하며 살아가는 그들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