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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경제학자가 뒷걸음치다 밟은 진실(도재형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3 15:58
조회
212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9월 18일 한국노동연구원의 박기성 원장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국무총리실 2008 회계연도 세입․세출결산」에 소관기관 배석자로 나와 “사석에서 노동3권을 헌법에서 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느냐”는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의 질문을 받자 “나는 그게 소신이다”라고 한 후 “개헌을 하면 (노동3권을 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사철 한나라당 의원이 무슨 취지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자 “다른 나라는 노동3권이 법률로 보장되면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질 수 있는데, 우리는 헌법적 권리여서 현실하고 어긋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9월 18일자 한겨례신문).
그의 전공이 경제학이긴 하지만, 그런 식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경제학자의 전형적 생각 혹은 올바른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제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시장이라는 경제적 도구 외의 다른 것(예컨대 민주주의)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9월 18일자 신문에 나타난 위 해프닝은 시장 외의 것에는 무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치명적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공 분야 외의 것에 대해서 무지한 것은 거의 모든 학자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이 전공이 세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전공 분야에 대해서까지 잘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더 큰 잘못은 그가 자신의 직책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행동을 비유하자면, 마치 경제 관련 국책 연구기관의 원장이 우리 헌법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어느 학교의 교수이거나 경제학자에 불과하다면, 이런 말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이 노동정책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설립된 국책 연구기관의 수장이라는 점, 그리고 한국노동연구원이 중립적 시각에서 국가의 노동정책을 개선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행동은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연구원의 중립성을 훼손한 것으로서 매우 큰 과오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와 반대되는 일을 해야만 하는 한국노동연구원의 원장으로 부임하지 않는 것이 경제학자로서 올바른 태도였을 것이다. 그는 한국노동연구원의 원장으로 재직하다 임기를 마친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되지만, 그로 인하여 훼손된 한국노동연구원의 중립성은 남아 있는 구성원들이 오랫동안 치유해야 할 상처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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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교섭 성실 이행을 촉구하며 8일 째 전면파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노동연구원 노동조합은 29일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운찬 신임 총리는 한국노동연구원 사태를 즉각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러한 발언이 진실성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제헌 헌법 이래 한국 헌법에서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계속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사관계의 현실이 그러한 헌법적 규범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무지한 자들이 국가의 규범 체계를 비난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려 할 때에는 1차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그 정당성을 찾는다. 예컨대 폭력을 행하는 교사는 학생들을 규율하는 방법으로서 체벌(體罰)만을 떠올리고,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권력을 휘두른 경험을 가진 자들은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공권력의 확대나 민간인 사찰과 같은 과거의 도구만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법제화시키고자 노력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박기성 원장의 발언은 어느 정도 한국 노사관계에 관한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경험한 바와 같이, 한국 노사관계의 현실은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단결권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사업장에서의 복수 노조의 설립은 매우 어렵다. 공무원이나 교사의 단체교섭권이나 단체행동권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통합된 공무원 노동조합이 민주노총에 가입하려고 하는 행위마저도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의 힘으로 국책 연구기관의 원장에 취임한 자가 헌법의 노동3권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이렇게 현 정부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바람에 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9월 18일의 해프닝은 노동정책에 관한 현 정부의 생각을 읽는 단초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헌법 개정 논의를 비롯하여, 향후 노동법 개정 작업과 관련하여 정부의 움직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