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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위대한가 - 법정과 옹기 (서상덕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3 16:21
조회
243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어릴 적 누구나가 받았음직한 질문 리스트 가운데 이런 유의 물음이 꼭 한두 개쯤은 들어있을 것이다. 문득 치기어린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얼마 전 입적한 법정 스님으로 인해서다.

지난해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법정 스님까지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많은 이들이 서운함과 아울러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1년 남짓한 새 우리 곁을 떠난 위대한 지도자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예의 질문과 비슷한‘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조금은 장난기 서린 물음을 갖게 된 건 기자정신의 발로라기보다 오로지 그들의 위대함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도 이런 비교가 이뤄지는 경우는 인물들의 위대성이 전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깝게는 역대 최고의 물리학자로 일컬어지는 ‘아인슈타인과 뉴턴’이 그렇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르네상스의 두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그러하다. 그래도 이 두 경우는 인기투표나 설문조사 등 어떤 식으로든 우열을 가늠할 수가 있다.

아인슈타인 대 뉴턴의 대결에서는 대체로 아인슈타인의 손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 편인 것 같다. 아마 조금이라도 현 세대와 가까운, 그래서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아인슈타인이 과학자들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있는 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경우는 대결 양상이 조금씩 다르게 전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두 사람 다 동시대를 살았다고는 하지만 500년도 더 된 오래전 인물인데다 개인적인 기호나 분야에 따라 선호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두 사람의 가상대결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분야에서 심심찮게 얘깃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두 사람은 ‘천재’라는 점을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사뭇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미술뿐 아니라 다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어 만능을 추구하는 ‘현대 슈퍼맨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다빈치가 위대한 예술가로 꼽히는 미켈란젤로를 앞서 있다고 본다. 대학은 고사하고 정규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했지만 근대적 모든 인문학을 선도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다빈치의 천재성은 시대를 훨씬 앞지르는 것이었다. 그러한 자신을 두고 ‘경험의 제자’라고 부른 다빈치는 인체와 자연, 그리고 세상에 관한 예리한 관찰을 통해 자신의 위대성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다른 한편 현상을 관찰하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남다른 천재성을 보인 다빈치에 비해 끊임없이 ‘인간 존재’에 집중한 미켈란젤로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튼 타고난 천재인 다빈치와 노력형 천재라 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 둘 다 시공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에게는 복된 존재였다.

이런 가상 대결의 장으로 우리 시대의 성자(聖者)로 꼽혀온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해보면 어떨까. 물론 판정의 요체는 누가 우리 시대에 더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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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원로 법정스님이 지난 11일 입적했다.
사진은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알려진 대로 법정 스님은 법정이라는 법명보다 ‘무소유’가 아호로 불릴 정도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가난’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 가난한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아호마저 옹기(甕器)로 삼은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을 향해 열린 삶으로 많은 이들에게 참다운 평화와 기쁨을 선사했다.

열 살 터울인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그들 앞에 가로놓인 숱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도반(道伴)으로 우리에게 참사랑의 길을 열어 보여준 존재들이었다.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이 공히 나눔과 사랑을 강조한 것은 우리 시대의 결핍이 무엇인지 들려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약자의 편에서 수시로 만났고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우리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던 존재였다. 두 사람 모두 나눔을 통해 자신들이 지닌 재능뿐 아니라 주위의 역량까지 극대화시켜낼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였던 셈이다.

결국 내 물음도 예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식이 되고 말았다.
비교의 미로는 끝이 없다. 하지만 인류가 비교를 통해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왔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두 위대한 존재의 삶을 돌아봄으로써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세상을 조금이라도 깊이 엿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새롭게 내디뎌야 할 첫걸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한 걸음 떼기도 쉽지 않을 것이기에….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