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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폭력일 뿐 (김대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8 10:57
조회
478
나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미워하는 법을 배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명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학생 두 명이 앞으로 불려나가 서로 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상대의 뺨을 번갈아 때리도록 하는 벌을 받았다. 처음엔 차마 상대의 뺨을 때리지 못했지만 교사의 무자비한 폭력에 결국은 상대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교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업을 진행했고 그 두 학생의 뺨 때리기는 방향을 바꿔가며 얼굴이 부르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반 아이들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치를 당하고 있는 그들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이나 그 순간은 누구도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 자괴감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랴. 나 역시 스스로가 미웠다. 이해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그 때 나는 힘없는 자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방법을 배웠다. 어찌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무력하게 고개 숙이고 자기를 미워하며 자기에게 분노하는 방법을 배웠다. 폭력으로 무장한 권력 앞에서 예의 갖추어 말 잘 듣는 방법을 배웠다.
예전 학교가 그랬다. 정기적인 시험이 끝나면 전교 등수가 떨어진 만큼 매를 맞거나 틀린 개수만큼 몽둥이찜질을 당해야만 했다.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앉아 걸상을 손에 든 채 단체기합을 받았고 그 상태에서 발바닥을 회초리로 맞기도 했다. 한없이 뺨을 때리는 교사도 있었고 얇은 플라스틱 자로 손등을 때리는 교사도 있었다. 아이들은 항변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맞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 나는 학교에서 정규 수업시간에 진정한 사랑이 담긴 교육과 민주적 인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지금도 여전한가보다. 남자 교사가 여학생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을 야단치며 뺨을 때리며 책을 던져 문제가 되자 교사직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어이없게도 교육당국은 해당교사의 사표를 수리하고 매번 그랬듯이 체벌과 관련한 세부지침을 마련하여 기준을 강화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한단다. 교사와 학생 간에 위계와 힘의 역학관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체벌은 폭력임이 분명하다. 그런 체벌을 ‘교육의 방법’이니 ‘사랑의 매’니 하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심지어 교사의 정당한 권리로 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니 참으로 어이없다. 우리 사회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내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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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21


 얼마 전, 가출청소년쉼터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알았다. 아이들은 집이 싫어 거리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에 가기 싫기 때문에 집을 나온 것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을 수만 있다면 가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이들이 꽤나 있었다. 학교에 가기 싫은 것은 갖가지 폭력이 단연 최고의 이유였다.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학교폭력의 결과가 이렇게 무서웠다.

폭력임이 너무나 분명한 체벌이 다시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체벌은 단순폭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체벌은 폭력에 순응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 폭력을 내면화하는 ‘반교육’이다. 체벌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개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폭력문화의 오랜 체험 때문이다. 여기에 교사와 부모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유교문화가 결합되면서 폭력문화에 대한 자각이 더욱 어려워진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다. 이는 그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그래서 체벌에 의존하는 교육방법은 아이들을 비주체적 인간으로 만든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하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누군가의 강제와 지시에 의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옳음과 그름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도 유보한 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옳은 일에는 침묵하고 옳지 않은 일에 협조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한다.

폭력의 내면화는 모방과 전염성으로 드러난다. 폭력은 힘과 규율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력을 잃어버리고 굴종하게 하면서, 그 피해의 아픔을 나중에는 가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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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


쾌감으로 바꾸어 가는 사람을 만든다. 상대의 귀를 잡고 뺨을 때리는 것도 어색해 하던 친구가 후배 괴롭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중에는 그 폭력을 즐기기까지 하는 경우를 보았다.

교육적인 효과도 의문이다. 체벌로 인해 교사와 제자의 인간관계가 무너진 뒤에 무슨 교육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폭력이 두려워 문제행동을 중단하는 것이 체벌의 효과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얻은 효과는 그 물리적인 힘이 사라지면 효과도 동시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리적인 체벌이 효과가 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임시방편일 뿐이며 점점 더욱 큰 물리적 폭력을 낳게 된다. 인간은 결코 때려서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어떠한 폭력이든 무조건 싫다.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추구하는 종교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인간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제발이지 학교에서만큼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민주시민을 육성해야 할 학교에서만큼은 스스로가 인간이길 포기하고 상대방의 인격 완성마저 방해하는 폭력일랑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